부뉴엘

부뉴엘

다른 표기 언어 Luis Buñ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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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0. 2. 22, 스페인 칼란다
사망 1983. 7. 29, 멕시코 멕시코시티
국적 스페인

요약 초기의 초현실주의 작품들과 멕시코에서의 상업영화 제작으로 특히 유명하다. 또한 매우 개성이 강한 스타일과 사회의 부정부패, 종교적 맹신, 까닭없는 잔혹함, 에로티시즘 등에 대한 그의 집착은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928년 자신의 첫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를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공동으로 감독하여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자연스럽고 과장되지 않는 영화들이 주도하던 분위기에서 그는 초현실주의 운동으로부터 비롯된 충동적 성향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절대적 진지함은 때론 유행과 관습을 무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영화산업의 한계를 느끼는 가운데 50년 넘게 모국인 스페인과 프랑스, 미국, 멕시코 등지에서 대부분의 작품활동을 했다. 그는 어느 감독들보다도 분명하게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문제를 시종일관 개성있고 솔직하게 표현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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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생애

개요

초기의 초현실주의 작품들과 멕시코에서의 상업영화 제작으로 특히 유명하다.

또한 매우 개성이 강한 스타일과 사회의 부정부패, 종교적 맹신, 까닭없는 잔혹함, 에로티시즘 등에 대한 그의 집착은 논쟁을 야기시킬 정도로 유명하다.

생애

스페인 동북부지방에서 7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사업가였던 부친 레오나르도 부뉴엘은 14세에 가출, 군에 입대해 쿠바에서 미국-스페인 전쟁(1898)에 참전했는데, 부뉴엘은 부친으로부터 바로 이같은 모험심을 이어받았다. 사라고사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학교성적이 아주 뛰어났으며 방학 때만 고향에서 시간을 보냈다. 권투 등 여러 운동에 소질이 있었으며 바이올린도 곧잘 연주했다. 사라고사에 있는 예수회대학에 다니다 17세에 마드리드대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교분을 맺었다.

1920년 스페인 최초의 영화 클럽을 창설했으며 그곳에서 상영된 작품들에 관한 비평을 쓰기도 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접하고 신앙을 버렸으며 1925년 파리로 이주하여 영화가 자신의 진정한 표현수단이라고 생각하여 영화제작 서클에 가입했다. 1926년 조감독이 되었고, 1928년 자신의 첫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를 달리와 공동으로 감독했는데 이 영화는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당시는 영화가 자연스럽고 과장이 없는 요소에 의해 주도되는 경향이었으나 부뉴엘은 초현실주의 운동으로부터 비롯된 충동적인 성향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뒤이어 만든 2편의 영화, 즉 프랑스에서 만든 철저하게 성직자와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내용의 〈황금시대 L'Âge d'or〉(1930), 스페인의 한 비참한 지역에 관한 다큐멘터리 〈빵이 없는 땅 Las Hurdes〉(1932) 등에는 꿈꾸고 상상할 자유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회문제에 대한 혁명적인 태도, 공격적인 성향의 유머 감각, 전통적 논리에 대한 부정 등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부뉴엘은 스페인에서 스페인 고유의 영화산업을 구축하기 위하여 다수의 상업영화 제작자로 활동했다.

1936년 스페인 내란이 발발하자 파리에서 공화국 정부측의 자원병으로 입대했으며, 1938년 스페인 공화국을 다룬 2편의 할리우드 영화의 기술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미국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몇 편의 영화를 편집했고 뉴욕 시 근대미술박물관에서 잠시 일 했으나 무신론적인 내용의 영화 〈황금시대〉를 감독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 일마저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47년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멕시코에 정착했다.

멕시코에서 감독으로 활발한 활동을 재개하여 흥행을 목적으로 2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부뉴엘은 자유롭게 이 2편의 영화에 창의력 넘치는 한두 장면들을 집어넣었다. 그 가운데 하나인 〈매우 무모한 사람 El gran calavera〉(1949)이 성공함으로써 영화 〈잊혀진 사람들 Los olvidados〉(1950)을 독자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빈민가 젊은이들을 탁월하고 감동적으로 그린 이 작품으로 부뉴엘은 명감독으로서의 명성을 재확립하게 되었다. 부뉴엘은 '자유로운' 장면을 작품에 자유롭게 삽입하여 자신의 영화가 인습적인 것이 되지 않게 했으며, 그의 작품에는 신성모독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부뉴엘 특유의 세계가 더욱 빈번하게 나타났다.

곧 그의 작품은 모두 심지어는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1952)같이 제작자들의 요구에 따라 만든 작품조차 부뉴엘 자신의 우주, 즉 기이하고 희귀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꿈의 세계를 표현하게 되었다. 그는 작품에서 시적인 장면도 부드러움에 바탕을 둔 공격성과 결합시켰다. 멕시코에서 생활하면서 만든 훌륭한 작품으로는 〈아르치발도 데 라 크루스의 범죄인생 Ensayo de un crimen〉(1955)과 속세를 초월한 사제에 관한 내용의 〈나사린 Nazarín〉(1958)을 꼽을 수 있다.

1960년 스페인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자 영화 〈비리디아나 Viridiana〉(1961)를 만들었다.

그러나 스페인 당국은 이 영화가 교권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상영을 금지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다른 나라로 유출되어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고 대상을 수상했다. 1962년 멕시코에서 그의 또다른 주요작품 〈섬멸의 천사 El ángel exterminador〉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저녁만찬에서 참석자들이 만찬장소를 떠날 수 없게 된 자신들을 발견한다는 내용인데, 역시 반(反)교권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그 무렵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부뉴엘은 다시금 자신이 의도한 대로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가 있었는데, 그러한 자유로운 분위기는 과거 프랑스 시절 이후 한번도 누려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다음 작품 〈하녀의 일기 Le Journal d'une femme de chambre〉(1964)는 세기말 프랑스 귀족들의 타락상을 현대로 옮겨 파시즘의 성장에 비유한 것으로 그의 영화 가운데 가장 정치성이 강한 것이었다. 42분짜리 영화 〈사막의 시몬 Simón del desierto〉(1965)은 은둔생활을 하는 고행자 시몬이 받는 유혹에 관한 것이며, 〈메꽃 Belle de jour〉(1967)은 중산층 여성의 환상을 다룬 작품으로, 이야기 방식이 상당히 다르지만 그의 영화에서 주종을 이루는 주제들을 추구하고 있다.

좀더 잘 알려진 후기의 영화들 〈트리스타나 Tristana〉(1970)·〈부르조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1973)·〈욕망의 모호한 대상 Cet obscur objet du désir〉(1977) 등은 꿈과 현실, 진실과 허위의 혼동, 사회구조의 토대에 대한 불신, 강박관념의 본질 등에 대한 부뉴엘 자신의 관심을 반영한 작품들이다. 1983년에 자서전 〈나의 마지막 탄식 My Last Sigh〉이 간행되었다.

영화제작자들 중에서 부뉴엘은 아마도 가장 큰 논란의 대상이었는데 그의 명성은 절대적인 진지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유행과 관습을 무시하고 50년 넘게 모국인 스페인과 프랑스·미국·멕시코 등지에서 영화산업의 한계를 느끼며 대부분의 작품활동을 했다. 그러나 부뉴엘은 어느 감독들보다도 명백하게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문제를 시종일관 개성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