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음악

다른 표기 언어 music , 音樂

요약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주로 음으로 나타내는 소리 예술.

음악
음악

음악은 형식미와 감정표현을 위해 성악과 기악을 결합한 예술이다. 리듬, 선율, 화성(서양음악의 경우)이 주요요소이다. 그밖에 음을 구성하는 요소로는 음조, 음색, 기악편성법 등이 포함된다.

음악은 민족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음악은 모든 인간사회에 스며들어 있는 예술이며 의식, 예배, 의사소통, 오락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의 목적에 사용된다. 따라서 음악에는 각 민족별, 시대별로 다양한 철학과 문화를 담고 있다.

역사적 개념

개요

음악은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음악이란 무엇인가?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음악이 인간의 감각과 지성에 대해 가지는 관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인간의 담론세계가 예술에 필연적인 장치임을 확신한다. 음악의 정의에 관한 역사는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의 성격과 그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는 이유를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다. 20세기초에는 악음(樂音)의 성격은 그 음이 보여주는 진동의 규칙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이러한 성질은 악음에 고정된 음높이를 부여해 '소음'과 음을 구별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미국의 존 케이지를 비롯한 현대 작곡가들에 의해 임의의 음향은 물론 소음 그 자체도 작곡의 한 요소로 사용되자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전자기계류는 인간으로 하여금 전통적인 해석자의 역할이 제거된 작품을 생산하게 해 인간능력으로는 불가능했던 음향을 테이프로 재생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개념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에서 음악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 음악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음악에 대한 사변적 사색의 글을 많이 남기고 있다. 음악이란 체육에 대칭되는 총칭적 술어로서 뮤즈 여신들의 관장하에 실행되는 모든 예술과 과학을 가리켰다. 피타고라스(BC 550경)는 최초로 음악을 수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음향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색인:그리스 음악).

플라톤(BC 428~348/347)은 특정 선법(旋法)들이 인간에 미칠 수 있는 효과 때문에 그 선법들의 사용을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격한 훈육가였던 그는 인간의 성격과 인간을 재현하는 음악 간에 일종의 상응관계가 있다고 여겼다. 단순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으며 리듬적·선율적 복잡성은 그것들이 인간을 의기소침과 혼란으로 이끌기 때문에 금기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음악은 하늘의 조화를 반영하는데 리듬과 선율은 천체 구조의 움직임을 모방하고 있으므로 그것들은 천체의 음악을 묘사하여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지상의 음악이 지니는 정서적 효과를 불신했으며 어떤 선법들의 감각적 성질은 위험스러운 것으로 규정했다. 말하자면 플라톤은 지상의 음악을 이데아의 그림자로 다루면서 예술 안에서 상징적 의미를 찾았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으로서의 예술 개념을 보다 진전시켰지만 음악이 역시 보편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술작품이 그 안에 진리를 탐지할 수 있다는 그의 견해는 그러한 상징적 견해를 뒷받침했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그는 음악이 인간의 성격을 이루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선법을 인정했고, 행복과 즐거움을 개인과 국가 모두에 요구되는 가치로서 인식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아리스토크세노스는 청자의 지각력을 중요시하고 수학적·음향학적 관심을 배제했다. 그에 의하면 음악은 정서적인 것이고, 청자의 듣는 행위와 지적 능력 2가지 모두에 필연적이고 기능적 역할을 충족시킨다. 그리스 사상은 오늘날에도 음악이 윤리적 삶에 영향을 준다는 신념 속에, 음악이 수와 같은 요소로 설명된다는 사고 속에, 음악이 특수한 효과와 기능을 갖는다는 생각 속에, 음악이 인간의 정서와 연관되어 있다는 계속해서 재론되어온 견해 등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리스도교 시대의 음악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은 로마 철학자 보이티우스(480~524경)에 의해 혁신을 두려워하는 보수적인 교회의 요구에 적응되었다.

언어의 부수물로서의 음악의 역할이,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보다 더 두드러졌던 적은 없었으며 교회에서는 언제나 가사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음악에 매료되어 종교에 대한 음악의 유용성을 가치있게 여겼던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음악의 감각적 요소를 두려워하여 선율이 말보다 중요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것은 역시 플라톤의 관심이기도 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음악의 근거가 수학적이며 천상의 운동과 질서를 반영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경~74)에 의해 다시 반복되었다.

17, 18세기 서구의 개념

음악사상사를 조망해보면 피타고라스주의 학자들은 어느 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다.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는 음악을 유성의 운동과 관련시키고자 시도하여 천체의 조화에 대한 사고를 영속시켰다. 르네 데카르트(1596~1650) 역시 음악의 근거를 수학적으로 생각했다. 음악이 상상적이고 흥미있어서 야기되는 부도덕한 효과를 막기 위해 중용의 리듬과 단순한 선율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충실한 플라톤주의자였다.

독일의 철학자·수학자였던 라이프니츠(1646~1716)에 의하면 음악은 우주의 리듬을 반영하고 또 수적 관계를 잠재의식으로 이해함으로써 마음에 경험된 근본적인 수학적 현실을 반영했다.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자신이 구분한 예술의 계통 구조 내에서 음악을 최하위에 두었다. 그가 음악을 가장 불신했던 것은 가사가 없는 음악의 경우였는데 그런 음악은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는 있어도 교양을 위해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음악은 시와 더불어 개념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 역시 예술이 신적인 것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철학에 종속된다고 말하면서, 음악의 추론적 성격을 찬양했다. 그는 여러 가지 정서를 표현하는 음악의 특별한 능력을 인정했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성악음악을 기악음악보다 더 가치있는 것으로 보고 가사 없는 음악을 주관적이고 불명확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음악의 본질이 리듬이라고 생각하고 그 대응물을 인간의 내적 자아에서 찾았다.

헤겔 사상의 고유한 점은 음악이 다른 예술과 달리 공간에서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며 '객관적'이지 않다는 주장이다. 18세기 이후에 이르러 음악의 내적 본질에 관한 사고는 더욱 다양하고 심오해졌다. 음악의 기능과 의미에 관한 보다 포괄적인 이론에 필요한 요소들이 등장했다. 그 가운데 유일한 공통분모는 정서적 삶과의 관계를 인정한다는 것, 즉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의 확고한 힘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현대의 음악의미 이론

역동주의의 개념

오늘날 상징주의로 불리는 음악의 개념은 2명의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와 니체(1844~1900)의 철학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과 용어를 사용하여 음악이론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는데, 두 사람 모두 역동주의라는 하나의 원리에 충실하고 있다. 그들은 음악을 다른 예술의 현현(顯現) 조건인 공간성을 갖지 않는 예술로 파악하고 내적인 과정의 역동성에 더 근접하는 것으로 여겼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객관화된 의지로 보고 음악은 결코 다른 예술들처럼 이데아의 복사가 아니라 '의지 그 자체'를 담아낸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음악은 단순히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물자체(物自體)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인간의 감정과 음악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음악이 의지의 복사나 상징이듯이 음악은 정서적 삶의 유비(類比)라고 설명한다.

니체는 아폴론-디오니소스 양분법을 제시하고 전자를 형식과 합리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후자를 취태(醉態)와 황홀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겼다. 니체에게 있어 음악은 본질적으로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다. 〈음악의 정신에서 비극의 탄생 The Birth of Tragedy from the Spirit of Music〉에서 니체는 상징 만들기가 필연적이고 어느 정도는 자동적인 인간활동이 된 20세기 상황을 예견했다.

그의 통찰력이 보여주는 풍부한 암시와 예지는 '상징적 유비'의 개념, 즉 실제 세계의 구성 요소들을 정돈하고 고양한다는 예술의 기능을 보여준다.

관련주의자와 비관련주의자

음악의미이론을 모색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일관되게 일치되지 않는 생각은 음악이 음악 외의 의미를 지시할 수 있고, 또 지시한다고 주장하는 관련주의자(또는 타율주의자)와, 예술은 자율적이고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비관련주의자(이따금 형식주의자 또는 절대주의자로 불림) 사이의 견해이다.

오스트리아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음악의 미 The Beautiful in Music〉(1854)에서 음악이 내적 원리와 이념을 가지는 예술이라고 주창했다. 그러나 열성적인 형식주의자였던 한슬리크조차도 음악 내의 정서 문제에 고민했다. 한슬리크의 입장은 수정된 타율주의자의 이론으로 분류되고 있다.

현대 미국의 이론가 마이어는 저서 〈음악에 있어서의 의미와 정서 Emotion and Meaning in Music〉(1956)에서 음악의 의미를 '지시적 의미'와 '구체적 의미'로 구별하는데 이것들은 외적·내적 의미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 내적이고 구체적인 의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극도의 형식주의자는 음향적 패턴 그 자체가 음악의 의미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관련주의자들은 음악을 정서적으로 의미있고 표현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관련주의자들 또한 음악에서 표현적인 내용을 찾는데 이러한 정서적 내용이 음악 외적인 것일지라도 문제되지 않는다. 마이어는 대개의 관련주의자들이 표현주의자들인 반면 모든 표현주의자들이 관련주의자들은 아님을 주지한다. 그는 절대적 표현주의자와 관련적 표현주의자를 구별하는데, 자신은 '형식주의적·절대적 표현주의자'의 입장에 서 있다.

상징주의자의 공헌

비록 형식주의적·표현주의적·심리학적 요소들을 보여주긴 하지만 20세기에 상징주의자로 분류되는 몇몇 학자들은 음악이론에 의미있는 기여를 했다(→ 색인:상징주의운동). 가장 영향력있는(그리고 반론이 제기되는) 사람은 랭거이다.

그녀에 대한 완강한 비판은 그녀가 사용하는 상징이라는 술어가 분명한 어떤 것을 나타내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상징이 옹호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녀가 예술을 정서적 삶의 상징적 유비로서 추론하고 있다는 면에서이다. 그녀는 예술을 원래 유기적인 것으로 보는데, 이는 예술의 형식과 내용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고 각 예술은 그것의 독특한 상태로 현상화된다는 상징주의자들 사이에 오랜 동안 주장되어온 견해를 다시 반향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음악의 상징은 성격상 음조적(넓은 의미에서는 청각적)이며 시간 내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음악에 대한 상징적 해명에서 상황적 해명으로 넘어가기 전에(약호가 이해될 때 지시적 의미를 만드는 외적 신호를 갖는) 음화(音畵)가 대개 음악의 상징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관련주의자들은 음악적 의미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상징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기꺼이 수용하지 않는다.

또 음악의 사회적·심리적 효과에 관심을 가지는 이론가들은 내적이고 심오한 의미개념에 반대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의미에 무관심하다. 한편, 절대주의자라 하더라도 음악을 인간의 환경과 분리하여 연구할 수 없다. 마이어는 음악에 관한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의도적으로 피하면서, "음악이 언어인지, 아니면 음악적 자극이 기호나 상징인지를 결정하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음악의 의미와 소통은 문화적 상황이 고려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정보이론

프랑스의 이론가 아브라암 몰은 그의 〈정보이론과 미적 지각 Information Theory and Esthetic Perception〉(1966)에서 '정보이론'이라고 하는 새로운 과학을 음악지각에 적용했다.

여기서 그는 형식개념을 본질적인 것으로 강조하면서 '소리 전언'(sonic message)이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이 소리 전언의 차원은 한 작품을 다른 작품으로 변형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하나의 소리 전언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체이다. 따라서 정보이론은 유기론자와의 새로운 연대를 보여준다. 마이어는 정보이론을 전통적인 이론의 도움 없이 전개시키고 있다. 마이어에게 있어 정보이론을 통해 식별된 음악적 전언은 비관련적이지만, 몰은 음악적 전언을 소리 레퍼토리 상징들 내의 측정 가능한 요소들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정의될 수 있는 각각의 시간적 단계는 '언어에의 음소와 유비될 수 있는 상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음악적 의미의 정수를 찾는 탐구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 모른다. 내적인 의미, 외적인 의미, 무수히 많은 의미들이 존재한다. 더욱이 모든 종류의 의미들은 그것의 사회적 장치 내에서 그리고 그 장치를 통해 드러난다.

교회·극장·방송이 음악을 특징적 방법으로 존재하게 하는 데 영향을 끼쳐왔고 또 끼치고 있다. 예컨대 현대의 음악회는 형식적이고 자율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고안이다. 이런 차원에서 연주실제와 관련된 음악적 의미의 고찰도 가능할 것이다.

음악비평

역사적 발전

음악비평이 처음으로 그 버팀목을 얻게 된 것은 17,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체계적인 비평가로 공헌한 초기 음악저술가들로는 프랑스의 장 자크 루소, 독일의 요한 마테존, 영국의 찰스 에이비슨과 찰스 버니가 있었다. 그들의 작업은 유럽 전역에서의 정기간행물 및 신문의 출현과 그 시기를 같이한다. 최초의 음악비평전문 저널은 1722년 마테존이 간행한 〈음악비평 Critica Musica〉이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아카데미즘의 시대가 가고 묘사의 시대를 맞이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지도자인 슈만·리스트·베를리오즈는 종종 음악 안에서 시적이고 문학적인 개념을 구체화시켰다. 대부분의 낭만주의 음악가는 묘사적 비평가들이었다. 이 시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비평가였던 슈만은 1834년 정기간행물 〈신음악지 Neue Zeitschrift für Musik〉를 창간하여 10년 동안 편집장을 맡았다. 이 비평지는 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대단히 분별있는 통찰의 글로 가득 차 있다.

19세기 후반은 현대 음악비평의 아버지로 불릴 만한 빈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에 의해 지배되었던 시기였다. 그의 〈음악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Vom Musikalisch-Schönen〉(1854)는 비평사의 한 이정표를 이루며, 낭만주의 경향에 맞서서 음악의 자율성과 다른 예술에 대한 음악의 독립성을 강조한 그의 글은 보다 분석적이고 덜 묘사적이다.

한슬리크의 영향으로 20세기의 비평가들은 분석의 시대를 위해 묘사의 시대를 거부했다.

비평가들은 '구조'·'주제성'·'조성'과 같은 말을 즐겨 썼다. 후고 리만, 하인리히 솅커, 헨리 해도 경, 도널드 토비 경, 어니스트 뉴먼,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을 비롯한 음악미학의 진정한 근거를 질문하는 일군의 음악가 겸 사상가들이 등장했다. 비평 자체가 비판되고, 그것의 근본적인 약점이 진단되었는데 그 탐구는 음악평가를 위한 판단 기준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는 20세기 후반에 급속히 변화된 음악어법에 의해 그 어느 때보다 더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비평의 실제

비평의 실제는 가치판단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평이론은 그 가치 판단을 설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비평가가 어떤 작품은 걸작이고 어떤 작품은 범작(凡作)이라고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이유를 해명하는 시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① 통일성:빈 출신의 비평가 루돌프 레티는 그의 〈음악의 주제적 과정 The Thematic Process in Music〉(1951)에서 훌륭한 작품이란 단일체를 다양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그 작품들은 모든 가능성과 정보를 함축하고 있는 하나의 개념으로부터 생성된다는 것이다. 그 음악에 들어 있는 대조적 주제들은 그 주제 각각이 하나의 기본적 사고의 다른 측면을 나타내기 때문에 함께 엮어질 수 있다.

② 매체:또 하나의 문제는 왜 하나의 작품이 특수한 매체를 통해서 표현되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작품이 다른 걸맞지 않는 매체로 변형된다면 그것은 이상스럽게 왜곡된 형태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음악의 법칙이 근본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그 매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동일성이라는 가장 선명한 확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음악가의 영감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매체를 선택하는 한편 어떤 악기가 지니는 한계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③ 주제의 전후관계:훌륭한 작품일 경우 그 주제의 출현은 왜 순서적으로 바뀌지 않는가? 즉 왜 주제의 전후관계가 좋게 들리는가? 만일 훌륭한 소나타나 교향곡의 악장들이 서로 바뀐다면 그결과는 음악적으로 형편없는 것이 될 것이다. 한 악장의 주제와 같은 곡의 다른 악장의 주제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④ 경제성:위대한 음악작품에서는 경제성의 법칙도 발견된다. 브람스는 "모든 음은 그 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음악적 의미를 소통시키는 데 요구되는 음보다 음이 많거나 또는 적을 경우 의미는 불분명해진다. 이 법칙은 3가지 하부원리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생각과 발화(發話) 간의 동일성의 원칙이다. 한 작곡가가 의도한 것(생각)과 실제로 그가 작곡한 것(발화) 사이에 구체적인 음악적 차이가 존재한다. 둘째, 형식과 내용의 관계이다. 어떤 음악가들은 형식과 내용 사이의 구분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다른 하나는 들려지지 않으며, 하나는 다른 하나의 유기적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좋은 형식일 경우 형식은 음악재료로부터 불가피하게 주어진 것이지만, 나쁜 형식일 경우는 음악이 생겨난 내적 방향과 그 음악이 따라야 하는 외적 방향이 결과적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가청성(可聽性)이다. 모든 작품의 실제 원리가 총체적인 청각적 효과임에도 어떤 악절은 실제 연주에서는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예컨대 협주곡에서 독주자가 건반 위 아래를 오르내리며 포르티시모를 연주하는 장면에서도 그 음들이 들리지 않는 경우를 상상해보라. 그외 다른 원칙들은 작곡이론의 원칙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대한 연구는 훌륭한 음악에 담겨 있는 가치의 느낌을 궁극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과정에 대한 탐색이다.

연주

연주는 음악적 사고가 실현되고 청자에게 그것이 전달되는 음악 과정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소리로부터 도출하는 즐거움은 그들 자신이 소리를 만드는 데서 얻는 즐거움과 언제나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에 음악의 기원을 연주행동과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노래는 아마 가장 오래된 음악활동일 것이다(→ 색인:가창). 한 사람이 부르는 단조로운 음악형태는 교창과 응창식의 부르기 방법으로 발전하고 나중에는 다성음악이라는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낳았다.

해석적 예술로서의 음악은 상대적으로 최근의 현상이다. 원시사회에서 음악은 구전 전통에 기초하여 제의적(祭儀的) 역할을 맡았다. 연주자가 해석자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시기적으로 기보법의 발전과 일치한다. 즉 수세기 동안 작곡가는 자신의 음악 연주를 감독하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음악을 기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해석자로서의 연주자는 인쇄된 악보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여 그에게 부과된 한계영역 내에서 음악을 연주한다. 또한 그의 개인적 취향이 그가 연주하는 음악에 대한 정보와 충돌하는 정도 안에서 연주할 수 있다.

고대 수메르·이집트·그리스·로마인들은 현대 서구세계의 음악과 관계를 가지는 최초의 미학이론과 음악체계를 보여주었지만 불행하게도 현존하는 실제 음악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중세에는 음악연주의 전통이 교회음악과 방랑 음유시인들의 음악에서 유지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성음악과 근대적 조성의 선구적 형태의 음악이 작곡·연주되었다. 바로크 시대 동안 연주자는 음악적 관심과 목적의 중심인물로 등장했다.

개인 연주가의 역할이 증대되고 연주기교를 과시하는 극적인 몸짓이 점점 많이 나타났고, 악기구성의 세련성도 강조되었다. 또한 현악기·관악기·건반악기의 조율을 위해 평균율 체계를 씀으로써 음악언어의 성격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뒤를 이은 로코코와 고전시기에는 장식적이고 대위법적인 바로크 음악이 포기되고 미묘한 음량에 차별성을 주는 음악이 선호되었다. 조성적 재료와 보다 큰 규모의 음악형식은 소나타나 오페라 같은 음악을 가능하게 했다. 한편 낭만주의시기는 심오한 문학적 내용을 바탕으로 로코코적 원칙이 세련되고 강화된 시기였으며 또한 거장 연주자들이 출현했고, 관현악단이 그 극한까지 발전한 시기였다.

대체로 현대음악은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음악회는 대(大)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음악적 기반을 지배하면서 어느 정도 19세기의 모습이 유지되었다. 보다 많은 실내악·교향곡·오페라 프로그램들이 연주되었지만 소위 음악상의 진보는 20세기에 등장한 재즈·록·즉흥음악·실험음악·전자음악·라이브음악, 멀티미디어 그룹의 시도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