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주의운동

상징주의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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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세기말 일군의 프랑스 시인들이 시작한 문학 및 예술 운동.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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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징주의 문학
  2. 상징주의 회화
  3. 상징주의 연극

회화와 연극으로 확대되었고, 20세기 유럽과 미국 문학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지극히 상징적인 언어를 암시적으로 사용해 개인의 정서적 체험을 표현하고자 했다.

상징주의 문학

주요 상징파 시인으로는 프랑스의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쥘 라포르그, 앙리 드 레니에, 르네 길, 귀스타브 , 벨기에의 에밀 베르하렌과 조르주 로덴바흐, 그리스 태생인 장 모레아스, 미국 태생인 프랜시스 비엘레 그리팽과 스튜어트 메릴 등이 있다.

가장 중요한 상징주의 비평가는 레미 드 구르몽이었지만, 상징주의의 원칙을 소설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였고, 희곡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벨기에 태생의 모리스 메테를링크였다. 20세기 프랑스의 시인인 폴 발레리와 폴 클로델은 상징파 시인들의 직계 후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프랑스 시의 기법과 주제는 고답파 시의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에 뚜렷이 드러나 있듯이 완고한 관습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런 관습에 대항하여 일부 프랑스 시인들이 일으킨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상징파 시인들은 인간의 내면생활과 경험의 덧없고 순간적인 감각을 묘사하기 위해 시를 설명적인 기능과 형식적인 미사여구에서 해방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 생활에 대한 감각적 인상과 형언할 수 없는 직관을 환기하고자 했으며,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시인의 정신 상태를 전하고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난해하고 혼란된 통일체'를 암시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은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를 전달하려 했다.

베를렌이나 랭보 같은 상징주의의 선구자들은 샤를 보들레르의 시와 사상, 특히 〈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57)에 수록된 시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감각들간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보들레르의 개념을 받아들였고, 이것을 바그너가 이상으로 삼은 여러 예술의 종합이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시의 음악성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상징주의자들은 조심스럽게 선택한 낱말들의 고유한 화성과 음조 및 색채를 섬세하게 다루어서 시의 주제를 전개하고 조정할 수 있었다. 시의 표현 수단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강조하려는 상징주의자들의 노력은 예술이 다른 어떤 표현 수단이나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또한 물질 세계의 유형성과 개별성 밑에는 또 하나의 현실이 놓여 있다는 유심론적인 확신에 일부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이 또 하나의 현실의 본질은 예술 작품을 낳는 데 이바지하는 주관적 감정의 반응과 예술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주관적 감정의 반응을 통해 가장 잘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를렌의 〈무언가 Romances sans paroles〉(1874)와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 L'Après-midi d'un faune〉(1876) 같은 걸작들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는 프랑스의 진보적 시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장 모레아스는 1886년 9월 18일자 〈피가로 Le Figaro〉지에 상징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사실주의 연극과 자연주의 소설 및 고답파 시의 묘사적인 경향을 비난하고, 보들레르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퇴폐'(décadent)라는 용어를 '상징파'와 '상징주의'라는 용어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1880년대말에는 상징주의를 지지하는 평론지와 잡지가 수없이 생겨나, 상징파 작가들은 이 운동에 적대적인 비평가들의 공격에서 비롯된 논쟁에 자유롭게 참여했다. 말라르메는 상징파 시인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여담 Divagations〉(1897)은 지금도 이 운동의 미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설서이다.

고정된 운율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로운 시의 운율을 얻기 위해, 많은 상징파 시인들은 산문시를 쓰고 자유시(vers libre)를 사용했다. 자유시는 이제 현대시의 기본 형식이 되었다.

시 분야에서 극단적인 상징주의 운동은 1890년경 절정에 이르렀다가 1900년 무렵부터 갑자기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뚜렷한 초점도 없이 분위기만 느껴지는 상징파 시의 수사적 표현은 결국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가식적인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고, 상징파 시인들이 한때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퇴폐'라는 용어는 단순히 세기말의 퇴폐적인 풍조와 부자연스러운 겉치레를 비웃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상징주의 작품들은 20세기에 대부분의 영국 문학과 미국 문학에 강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실험적 기법은 현대시의 기법을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상징주의 이론은 W.B. 예이츠와 T.S. 엘리엇의 시,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가 대표하는 현대소설로 열매를 맺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낱말의 음악적 조화와 이미지 유형이 줄거리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상징주의 소설로 성공한 몇몇 작품 가운데 하나는 J.K. 위스망스의 〈역로 À rebours〉(1884)이다. 이 책은 권태에 빠진 한 귀족이 퇴폐적인 미학을 추구하여 놀라운 임기응변의 재주로 다양한 실험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20세기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이 상징주의 운동을 개관한 책 〈액슬의 성 Axel's Castle〉(1931)은 현대 문학 분석의 고전이며 상징주의 운동에 대한 권위있는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 문학에 있어서의 상징주의는 1910년대에 백대진·김억 등이 발표한 글에서 비롯되었다.

백대진은 〈20세기 초두 구주 제 대문학가를 추억함〉(신문학, 1916. 6)에서 레니에·보들레르·모레아스 등의 상징파 시인들을 소개했고, 〈최근의 태서문단〉(태서문예신보, 1918. 11. 30)에서 말라르메 계열의 지적 상징주의를 소개했다. 반면 김억은 〈요구와 회한〉(신문계, 1916. 9)·〈프랑스 시단〉(태서문예신보, 1918. 12)에서 베를렌 계열의 감상적 상징주의를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그는 〈태서문예신보〉 6호에 베를렌의 시 〈거리에 내리는 비〉·〈검은 끝없는 잠은〉·〈아름다운 밤〉 등과 11호에 베를렌의 〈작시론 作詩論〉을 번역해서 실었고, 상징주의 시가 곧 자유시임을 보여주는 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펴냈다. 그러나 베를렌의 영향을 받은 그는 내면의식의 섬세한 음영(陰影)이나 외부세계와 자아와의 교감이라는 상징주의의 본질적 측면을 간과하고, 기분의 시학으로서만 이해했다는 점에서 한국 상징주의 시의 오류와 한계를 드러냈다. 이어 1920년대 후반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에 이르러 감각과 사상이 결합된 한국적 상징주의 시로 발전했다.

1950년대 이후 상징주의 시는 김춘수의 존재론적 순수시, 전봉건의 언어의 마술적 암시성, '현대시'동인들의 내면의식의 추구라는 형태로 변모했다.

상징주의 회화

회화에서 상징주의는 상징파 시인과 문학 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인 동시에, 사실주의의 객관주의적 지향성과 점차 영향력이 강해지는 인상주의 운동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운동은 비교적 구체적인 묘사를 추구했지만, 상징파 화가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환상과 상상력에 바탕을 둔 작품을 좋아했다.

상징주의 회화의 입장은 고갱의 열렬한 숭배자인 젊은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가 〈메르퀴르 드 프랑스 Mercure de France〉(1891)에 실은 논평에서 권위있게 밝힌 바 있다. 그는 '개념에 감각적 형식의 옷을 입히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라는 모레아스의 주장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고, 내면생활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의 주관적·상징적·장식적 기능을 강조했다. 상징파 화가들은 주관적인 정신 상태를 시각적 형태로 재현하기 위해 신비주의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에 의존했다.

나비파(Les Nabis)만이 아니라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 같은 후기 인상파 화가들도 그들 예술의 어떤 측면에서는 상징주의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상징주의의 진정한 미학적 이상을 대표하는 화가는 귀스타브 모로, 오딜롱 르동, 피에르 퓌비 드 샤반 등이다. 모로는 전설이나 고대적 주제를 그린 화가였다. 그는 독창적인 화풍으로 보석처럼 눈부신 색채를 이용하여 상상 속의 신전과 궁전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내부를 묘사했으며, 그 안에 있는 인물들은 거의 옷을 입지 않은 채 조상(彫像)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이국적인 관능과 장식적인 화려함이 특징이다. 르동은 그림과 그래픽에서 신비주의적·환상적이며 흔히 섬뜩한 주제를 추구했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초자연적·환상적인 인물들은 각각의 특성이 뚜렷이 나타나 있는 반면, 전반적으로는 색조의 섬세한 조화를 통해 색채의 시학을 강조한다. 퓌비 드 샤반은 오늘날 주로 벽화가로 기억되고 있다.

상징주의 연극

극작가들도 역시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들, 특히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았다. 말라르메는 1870년대에 〈데르니에르 모드 La Dernière Mode〉지에 연극평을 쓰면서, 그 당시 연극계를 지배하고 있던 사실주의극에 반대하고 인간과 우주의 숨은 신비를 재현하는 시적인 연극을 제창했다. 연극은 시인-극작가가 자신의 시적 언어가 지닌 암시적인 힘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조응을 드러내는 신성한 의식이 되어야 한다고 말라르메는 주장했다.

상징파 극작가들은 본능적이거나 직관적으로 알아낸 존재의 심오한 진실을 언어로는 직접 표현할 수 없으며, 오직 상징과 신화 및 분위기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요한 상징파 극작가는 벨기에의 모리스 메테를링크와 프랑스의 빌리에 드 릴라당, 폴 클로델이다.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역시 상징주의 신념의 영향을 받았다.

상징파 연극의 유명한 보기로는 릴라당의 〈악셀 Axël〉(1884 초연, 1890 결정판),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메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Pelléas et Mélisande〉(1892), 알프레드 자리의 풍자적인 작품 〈위뷔 왕 Ubu roi〉(1896) 등이 있다.

1890년에 프랑스의 시인 폴 포르는 '예술 극장'을 세우고, 고대와 현대의 시를 낭독하는 한편 상징파 연극을 상연했다. 1892년 포르가 은퇴하자, 오렐리앵 마리 뤼녜 포가 자신의 외브르극단에서 20세기까지 상징파 연극을 계속 상연했다. 상징파 연극은 통합된 하나의 운동으로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환상과 분위기 및 기분에 의존하고, 사실주의 전통과 분명하게 단절한 것이 20세기 극작가들과 연극 공연에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