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

제임스 조이스

다른 표기 언어 조이스 , 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요약 테이블
출생 1882. 2. 2, 더블린
사망 1941. 1. 13, 취리히
국적 아일랜드

요약 〈율리시스〉·〈피네건의 경야〉와 같은 장편소설에서 실험적인 언어사용과 새로운 문학양식을 개척한 것으로 유명하다. 1904년 아일랜드를 떠난 이후 트리에스테·파리·취리히에서 여생을 보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젊은시절과 작품
  3. 트리에스테(1905)
  4. 취리히(1915)
  5. 파리(1920)

개요

〈율리시스 Ulysses〉(1922)·〈피네건의 경야(經夜) Finnegans Wake〉(1939)와 같은 장편소설에서 실험적인 언어사용과 새로운 문학양식을 개척한 것으로 유명하다.

1904년 아일랜드를 떠난 이후 트리에스테·파리·취리히에서 여생을 보냈다.

젊은시절과 작품

15형제 중 살아남은 10명의 아이들 중 맏아들이었으며, 6세 때 예수회 재단 기숙학교인 클롱고스우드 칼리지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아일랜드의 이튼'으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그는 이 학교에서 행복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술을 많이 마시고 일을 게을리했으며 사무실에서 돈을 빌려 쓰는 바람에 부유하던 가정형편이 점점 어려워졌다. 아이들은, 빚쟁이들이 집을 찾아오고, 가재도구를 자주 저당잡히며, 다른 집으로 이사가서는 집세도 내지 못하고 또 다시 떠나야 하는 등 곤궁한 생활환경에 익숙하게 되었다.

조이스는 1891년 여름방학이 끝난 뒤 클롱고스로 돌아오지 못했고, 그가 밝히지는 않았지만 크리스천브라더스 스쿨에 몇 달 다닌 것을 빼고는 그후 2년을 집에서 지내면서 어머니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가며 독학했다. 1893년 4월 동생 스태니슬로스와 함께 더블린에 있는 예수회 재단 그래머 스쿨인 벨버디어 칼리지에 수업료를 면제받고 입학했다. 조이스는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사실상 학생장에 해당하는 마리아회 회장으로 2번이나 선출되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신앙을 잃어버렸다는 의심을 받고 학교를 떠났다.

그뒤 더블린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1879년 왕립대학령으로 권한의 제한을 받기는 했으나 예수회 사제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신학이나 철학을 배우지 않았고, 외국어를 공부하고 학과외 활동에 힘을 쏟았으며, 예수회에서 추천하지 않은 책을 위주로 광범위한 독서를 했으며, 대학의 문학·역사 학회에 열심히 참여했다. 헨리크 입센을 대단히 좋아하여 원본을 읽기 위해 노르웨이 표준어를 배웠으며 입센의 〈우리 죽은 자가 깨어날 때 Naar vi døde vaagner〉에 대한 평론 〈입센의 새로운 극 Ibsen's New Drama〉을 18세 생일이 지난 직후 1900년 런던 〈포트나이틀리 리뷰 Fortnightly Review〉에 실었다.

어려서 인정을 받자 용기를 얻어 작가가 될 것을 결심했으며 가족과 친구, 선생님도 이 결심을 인정해주었다. 1901년 10월 아일랜드 문예극장(후에 더블린 애비 극장)이 대중의 취향에 영합했다고 공격하는 평론 〈민중의 날 The Day of the Rabblement〉을 출판했다. 그전에 조이스는 이 극장을 지지했고 학생들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캐슬린 백작부인 Countess Cath- leen〉이 이설(異說)이라고 공격할 때도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이무렵 무절제한 생활을 했으나 졸업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라틴어에서 2등급 우등'으로 대학입학 허가를 받았으며 1902년 10월 31일에 학사학위를 받았다.

글솜씨를 훈련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시를 썼으며 신이 인간의 눈에 신성(神性)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인 '현현'(顯現 epiphany)이라고 자신이 이름붙인 짧은 산문 구절로써 연습했다.

조이스는 이 말을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을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 그는 실험을 통해 관찰한 대상을 정확히 기록하면서 간결한 문체를 개발할 수 있었다. 창작을 위한 생계비를 벌려고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더블린에서 몇 번 강의에 참석한 뒤, 빌릴 수 있는 한 많은 돈을 빌려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2주간 강의를 들은 뒤 더블린에서 얻은 자격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와 1개월 동안 휴가를 보냈다.

파리로 돌아가자마자 의학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서평 몇 편을 썼다. 이 수입과 영어강의 수업료, 어머니에게서 받은 약간의 송금액으로 생 주느비에브 도서관에서 연구를 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귀스타브 플로베르에 대한 미학이론을 정리했다.

1903년 4월 어머니가 죽자 고향으로 돌아왔고, 교사직을 비롯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지금은 아일랜드의 조이스 박물관이 된 샌디코브의 마르텔로 타워 등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지냈다.

이때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에 바탕을 둔 긴 자연주의 소설 〈스티븐 히어로 Stephen Hero〉를 이미 쓰고 있었는데, 1904년 조지 러셀이 아일랜드가 배경인 단편을 1편당 1파운드씩 주고 농민잡지 〈아이리시 홈스테드 The Irish Homestead〉에 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더블린 사람들 Dubliners〉(1914)로 출판된 단편을 쓰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자매 The Sisters〉·〈에블린 Eveline〉·〈경주가 끝난 뒤 After the Race〉가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가명으로 발표된 후 편집자는 조이스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한편 조이스는 노라 바너클이라는 소녀를 만났는데 '블룸즈데이'(Bloomsday : 그의 소설 〈율리시스〉의 배경이 되는 날)라고 선택한 6월 16일에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결혼식은 치르지 않았지만 결국 그녀를 설득해 아일랜드를 떠났다.

트리에스테(1905)

조이스와 노라는 1904년 10월 더블린을 떠났다.

조이스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폴라에 있는 베를리츠 스쿨에 자리를 잡고 시간을 내어 소설과 단편을 썼다. 1905년 트리에스테로 이사했으며, 동생 스태니슬로스가 그곳으로 왔고 아들 조지와 딸 루시아도 태어났다. 1906~07년의 8개월 동안 로마의 은행에서 일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을 혐오했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아일랜드는 기분좋은 곳으로 여겨졌다. 동생 스태니슬로스에게 보내는 글에서 자신은 단편 속에 아일랜드 사람의 미덕인 후한 마음을 높이 산 적이 없다고 하면서 새로운 단편 〈사자(死者)들 The Dead〉을 쓰기 시작했다고 썼다.

그가 말했다시피 초기 단편에서는 더블린의 마비상태를 보여주려고 했으나 작품에는 말 한마디, 세부항목 하나까지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생기가 넘친다. 유럽 문학을 연구하면서 상징주의와 사실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결과 작품 속에 이 대립된 두 사조가 종합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티븐 히어로〉가 예술적 통제력과 형식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춘 〈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이라는 제목의 '5개의 장(章)으로 된 작품'으로 재구성해 집필했다.

1909년 〈더블린 사람들〉을 출판하려고 아일랜드를 2번 방문했으며 아일랜드 영화관의 체인을 세웠다. 그뒤 별다른 성과도 없고, 옛 친구가 1904년 여름에 자신도 노라의 사랑을 받았다고 말함으로써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다른 친구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밝혀주었다. 이때 조이스의 태도는 코넬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그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차분한 구절만 뽑아 〈제임스 조이스의 편지 Letters of James Joyce〉 모음집에 실었는데, 원래의 편지 내용에는 매우 외설적인 내용도 있다.

조이스는 배반당했다고 계속 느끼고 있었고, 배반이라는 주제는 후기 작품 대부분에서 다루어진다.

취리히(1915)

이탈리아가 전쟁을 선포하자 스태니슬로스는 억류되었고 제임스와 그의 가족은 취리히로 가게 되었다.

우선 영어 개인교습을 했고 처음에 〈헌터 씨(氏)〉에 대한 단편소설로 생각하고 〈율리시스〉의 첫 장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때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처음에는 왕립도서기금에서 75파운드의 보조금을 받았고, 그뒤 에디스 록펠러 매코믹 부인으로부터 많은 보조금을 받았다. 〈에고이스트 Egoist〉의 편집자 해리엇 쇼 위버로부터 계속 보조를 받았는데, 1930년에는 그 금액이 2,300파운드에 달했다.

위버의 후한 보조는 그의 작품을 좋아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겪는 고생을 동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가난에 쪼들렸을 뿐만 아니라 죽는 날까지 눈병을 앓았다. 1917년 2월에서 1930년까지 홍채염·녹내장·백내장 등으로 25차례나 수술을 받았고 아예 눈이 먼 적도 있었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활동했는데 작품 가운데 가장 유쾌한 구절 일부는 건강이 최악일 때 쓴 것도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책으로 출판해줄 영국인 인쇄업자를 찾을 수 없자, 위버가 직접 미국에서 인쇄하고 출판했는데 영국의 에고이스트출판사보다 먼저 B.W. 휴브시가 1916년 12월 29일에 역시 미국에서 출판을 했다.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자 1918년 3월 미국의 〈리틀 리뷰 Little Review〉가 〈율리시스〉에서 에피소드를 뽑아 출판하기 시작하여 1920년 12월 작품이 판금될 때까지 계속 출판했다.

파리(1920)

제1차 세계대전 뒤 트리에스테로 돌아와 몇 달 동안 지내다가 에즈라 파운드의 초청을 받고 1920년 7월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는 '셰익스피어사'라는 서점의 주인 실비아 비치가 1922년 2월 2일에 〈율리시스〉를 출판했다. 검열문제로 이미 알려져 있던 책이라 금방 유명해졌다. 조이스는 발레리 라르보의 강의를 들으면서 비평에 대비했다. 라르보는 〈율리시스〉가 호메로스의 작품 〈오디세이아 Odyssey〉와 유사한 구조라고 지적하면서 "각각의 에피소드는 특정한 예술과 학문을 취급하며, 독특한 상징이 있고, 인간의 신체 중 특별한 기관을 나타내며, 독특한 색과 ……적합한 기법이 있으며, 특정한 시간에 일어난다"고 평했다.

조이스는 이러한 체계로 출판한 적이 없으며, 실제로 책에서 장별 제목도 빼버렸다. 이같은 체계는 독자보다 창작할 때 작가 조이스에게 더 유용했던 것 같다. 기법상의 장치가 너무 두드러진 경우가 있었는데 많은 찬사를 받은 〈황소 같은 태양〉(2권 11장)에서는 자궁 속의 태아의 성장을 상징하려고 앵글로색슨어에서 근대영어까지 영어 산문 발전단계에 해당되는 모든 단계별 언어가 사용된다.

이 경우 언어를 다루는 솜씨는 뛰어났으나 전개과정은 신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문사가 배경인 〈아이올로스〉(2권 4장) 같은 데서는 수사학을 '예술'로 다룸으로써 그 효과의 강도와 깊이를 더했다. 이 장에는 수백 개의 비유적인 표현과, 사건이 발생한다는 말 대신 무언가가 '불어댄다'(blows up)라든가, 사람들이 돈을 벌 때는 '바람을 일으킨다'(raise the wind)는 식으로 바람에 대한 표현을 썼다.

그결과 독자들은 산문에서 보기 드문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유명한 마지막 장에서는 침대에 누워 있는 몰리 블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갈 수 있는데, 마침표가 없는 8절에 걸친 긴 구절의 효과가 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최고의 강점은 깊이 있는 인물묘사와 폭넓은 유머라 할 수 있다.

한편 파리에서 쓴 〈피네건의 경야〉는 작품 제목이 비밀에 붙여져 1939년 5월 완본이 나올 때까지 '집필 중인 작품'으로만 통했다.

그는 고질적인 눈병에다 딸의 정신질환까지 겹쳐 늘 괴로워했다. 딸은 처음에는 약간의 비정상적인 기미만을 보였으나 점점 심한 정신병으로 악화되었고 조이스는 온갖 치료방법을 쓰다가 마침내 파리 근교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1931년 딸의 불평을 못이겨 아내와 함께 런던에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동안 〈피네건의 경야〉를 쓰고 또 수정했다.

만족할 때까지 한 구절을 12번 이상 고친 적이 많았다. 글자 하나하나를 면밀히 조사하고 곰곰이 생각해 썼다. 대개 단순한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더블린 근처 채플리저드에 사는 선술집 주인과 그의 아내와 세 자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험프리 침프든 이어위커 씨와 애나 리비아 플루러벨 부인, 셈, 숀, 이자벨은 모든 평범한 가족을 대변하며 모든 인간이 꿈꾸는 전형적인 가족을 나타낸다. 역사는 순환한다는 18세기 이탈리아의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의 이론에 기반을 두고, 이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마지막 페이지에 미완성으로 남은 문장의 끝단으로 작품이 시작된다.

수많은 꿈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언어는 혼합되어 애나 리비아의 머리(vlossyhair)에서 'włosy'는 머리라는 뜻의 폴란드어이고 '바람(a bad of wind)이 분다'에서 'bâd'는 바람을 뜻하는 터키어이다. 문학과 역사 속의 인물들이 '서로 오해하는 마음이 생겨 합작을 반대하는 것'처럼 나타났다가 합해지고 또 사라진다. 다른 차원에서 보면, 주인공은 더블린 시와 '즉흥적이고 수다스러운 할머니 애나 리비아의 협곡같이 미끄러운 활주로에 굽이쳐' 매혹적으로 흘러내리는 리피 강이다.

전편에 걸쳐 조이스 자신이 등장하여 농담을 하고 그의 비평가들을 조롱하며,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고, 아버지를 회고하며 스스로 즐거워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함락되자(1940) 가족들과 함께 취리히로 돌아와 그곳에서 죽었다. 끝까지 마지막 작품에 대한 비판으로 실망하고 있었다. 오늘날 그의 작품만을 취급하는 2개의 정기간행물 중 하나에서 전적으로 〈피네건의 경야〉만 다룬다는 사실을 그가 안다면 기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