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린드베리

스트린드베리

다른 표기 언어 (Johan) August Strindberg 동의어 요한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요약 테이블
출생 1849. 1. 22, 스톡홀름
사망 1912. 5. 14, 스톡홀름
국적 스웨덴

요약 스트린드베리는 심리학과 자연주의를 결합시킨 새로운 종류의 서구극을 만들어내어 후에 표현주의 극으로 발전되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첫 번째 대표작은 <올로프 선생>으로 스웨덴의 종교개혁을 다룬 사극으로 셰익스피어와 헨리크 입센의 <브란>의 영향을 받았으며, 후세에 스웨덴 최초의 현대극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첫 장편소설 <붉은 방>은 스톡홀름 사교계의 악습과 기만을 풍자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국내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대의 사회관습에 철저히 반기를 든 대담하고 농축된 작품들을 통해 그는 꾸밈없는 대화,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배경, 무대의 소도구를 상징물로 사용하는 등의 자연주의 극의 기법과 자신의 심리학적 개념을 결합시킴으로써 서구극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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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후기
  4. 평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August Strindberg)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August Strindberg)

개요

심리학과 자연주의를 결합시킨 새로운 종류의 서구극을 만들어냈으며, 이것은 후에 표현주의 극으로 발전했다.

대표작으로는 〈아버지 Fadren〉(1887)·〈줄리양 Countess Julie〉(1888)·〈채권자들 Fordringsägare〉(1888)·〈꿈의 연극 Drömspelet〉(1902)·〈유령 소나타 Spöksonaten〉(1907) 등이 있다.

초기생애

아버지 카를 오스카 스트린드베리는 파산한 귀족으로서 증기선 선원으로 일했으며 어머니는 술집 종업원 출신이었다.

뛰어난 자서전 〈하녀의 아들 Tjänstekvinnans son〉(1886~87)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어린시절은 정서불안, 가난, 할머니의 종교적 광기, 무관심 등에 상처를 받았다. 단속적으로 웁살라대학을 다녔고 처음에는 성직자, 나중에는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으나 끝내 학위를 받지 못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스톡홀름에서 자유기고가로 일하는 한편 다른 일도 했으나 곧 일자리를 잃어버리곤 했다. 그러는 동안 스웨덴의 종교개혁을 다룬 사극 〈올로프 선생 Mäster Olof〉(1872)을 완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 작품은 그의 첫번째 대표작으로서 셰익스피어와 헨리크 입센의 〈브란 Brand〉에서 영향을 받았다. 왕립극장에서 〈올로프 선생〉의 공연을 거부하자 그의 비관주의는 더욱 깊어졌다. 여러 해 동안 이 극의 개작에만 몰두한 결과 후세에 스웨덴 최초의 현대극으로 인정받았지만, 당대의 문제를 다루는 극작가로서의 발전은 그만큼 늦어졌다.

1874년 왕립도서관 사서(司書)가 되었으며, 1875년 친위대 장교의 아내로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핀란드계 스웨덴인 시리 폰 에센을 만났다.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
시리 폰 에센(Siri von Essen)
시리 폰 에센(Siri von Essen)

2년 뒤 두 사람은 결혼했고 강렬했으나 결국 불행했던 그들의 관계는 이혼으로 끝났으며(1891), 그는 네 아이의 양육권을 잃고 큰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초기에는 결혼이 작품을 쓰는 데 자극제가 되어 첫 장편소설 〈붉은 방 Röda rummet〉(1879)을 발표하게 되었다. 스톡홀름 사교계의 악습과 기만을 풍자적으로 그린 이 작품은 스웨덴 소설사상 새로운 것이었으며, 이 작품과 함께 그의 이름은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희곡도 계속 썼는데, 그 가운데 〈행운아 페터의 여행 Lycko-Pers resa〉(1881)은 가장 신랄한 사회비판을 담고 있다. 당대의 스웨덴을 빈틈없이 풍자한 〈새 왕국 Det nya riket〉(1882)을 발표하고 이듬해 가족과 함께 스톡홀름을 떠나 6년 동안 유럽 대륙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무렵 그는 이미 완전히 정신분열을 일으키기 직전의 상태였는데도 여러 편의 희곡·소설·단편을 썼다. 1884년 첫 단편집 〈결혼 Giftas〉의 출판으로 인해 신성모독죄로 기소당했으며,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나긴 했지만 이 사건으로 정신적인 타격을 입은 그는 아내인 시리까지도 자신을 박해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

새로 정신을 집중하고 희곡을 썼는데, 〈아버지〉·〈줄리 양〉·〈채권자들〉을 비롯해 이 시기에 씌어진 뛰어난 작품들은 남녀간의 성(性)의 갈등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모두 당대의 사회관습에 철저히 반기를 든 대담하고 농축된 작품들을 통해 그는 자연주의 극의 기법(꾸밈없는 대화,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배경, 무대의 소도구를 상징물로 사용하는 것 등)과 자신의 심리학적 개념을 결합시킴으로써 서구극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가 언제나 가장 즐겨 얻은 영감의 원천이었던 스톡홀름의 바위섬들에 관한 생동감 넘치는 소설 〈헴쇠의 사람들 Hemsöborna〉도 이 왕성한 창작기에 씌어졌다.

1889년 스웨덴으로 돌아온 뒤로는 외롭고 불행한 나날을 보냈다.

현대 스웨덴을 대변하는 이름난 작가로서 존경을 받으면서도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린 그는 안정된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1892년 다시 스웨덴을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그 이듬해 오스트리아 출신의 젊은 언론인 프리다 울과 재혼했으나, 1895년 파리에서 헤어졌다.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정서적·신체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매우 불안정한 정신상태로 지냈던 이 시기는 마침내 일종의 종교적 개종으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위기는 〈지옥 Inferno〉에 잘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그는 이 시기에는 연금술을 실험하고 신지학(神智學)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쳤다.

후기

신비주의 색채를 띤 새로운 신앙은 그를 작가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이 사실은 3부작 희곡 〈다마스쿠스로 Till Damascus〉를 통해 잘 알 수 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을 영혼의 평화를 찾아 헤매다가 시리와 프리다 양쪽을 다 닮은 인물인 '귀부인'과 함께 마침내 영혼의 평화를 발견하게 되는 '이방인'으로 묘사한다. 이무렵 다시 스웨덴에 돌아와 룬트에 처음 정착했다가 1899년 스톡홀름으로 거처를 옮긴 뒤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여름이면 가끔씩 그가 애정을 갖고 있던 바위섬에서 지내곤 했다.

가혹하기는 하나 정의로운 '힘'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는 그의 생각은 1889년에 쓰기 시작한 사극 시리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연작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인 〈구스타프 바사 Gustav Vasa〉는 빈틈 없는 구성 및 인물묘사와 생생한 대화로 뛰어났다. 1901년 노르웨이의 젊은 여배우 하리에트 보세와 결혼했으나 1904년 헤어졌으며, 이번에도 그녀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5번째 아이)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겨울 속의 봄'이라고 불렀던 이 마지막 결혼은 희곡 〈죽음의 춤 Dödsdansen〉·〈꿈의 연극〉을 비롯하여 매혹적인 자서전 〈고독 Ensam〉, 몇몇 서정시 등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하리에트 보세(Harriet Bosse)
하리에트 보세(Harriet Bosse)

마지막 아내와 헤어진 뒤 그는 다시 엄습해오는 슬픔으로 기이한 풍자소설 〈검은 깃발 Svarta Fanor〉(1907)을 썼는데, 이 작품은 스톡홀름 문학동인들의 사악함과 어리석음을 공격한 것이다. 한동안 젊은 연출자 아우구스트 팔크와 함께 운영했던 인티마 소극장의 공연을 위해 쓴 〈실내극 Kammarspel〉은 극작 기교가 더욱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유령 소나타〉는 가장 환상적인 작품으로, 이후 서구극에는 이와 비슷한 작품이 많이 등장했다.

그 자신의 삶을 상징화한 마지막 희곡 〈머나먼 길 Stora landsvägen〉은 1909년에 발표되었다.

평가

말년에 이르러서는 젊은시절의 급진적 견해로 되돌아가 논설들을 통해 당대의 사회 및 정치사상을 공격했으며, 경구적인 〈영혼의 지대 Zones of the Spirit〉(1907~12)에서 자신의 철학을 피력했다.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뒤에도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무시했지만, 스웨덴 국민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작가로서 애도했다. 스트린드베리는 스웨덴인의 삶과 문학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었으며 독창성, 탁월한 생명력, 강한 상상력으로 자전적인 소재를 매우 재치 있는 극중 대사로 변형시킨 작가로 칭송받고 있다.

초기 소설, 특히 단편소설 가운데서 풍부한 의미를 담은 구어체를 사용하여 오랫동안 침체되었던 스웨덴 산문체의 부활을 실현했다.

특히 〈하녀의 아들〉은 장자크 루소의 〈고백록 Confessions〉 이후 자신의 치부까지 숨김 없이 드러내는 자서전의 출판을 고무시킨 가장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줄리 양〉의 서문과 같은 비평문·희곡작품·연출기법 등을 통해 연극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줄리 양〉을 비롯해 1887~93년에 쓴 여러 희곡에서 나타나는 끊임없이 야만적인 행동과 극도로 사실적인 대화의 장면들은 자연주의 극의 최고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줄리양(Countess Julie)
줄리양(Countess Julie)

〈다마스쿠스로〉·〈꿈의 연극〉·〈유령 소나타〉 등 후기에 쓴 환상적 희곡을 통해 스트린드베리는 표현주의 극의 쟁점이 되었던 무대 사실주의에 대해 반란을 주도했다. 이 반란은 1912년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숀 오케이시, 엘머 라이스, 유진 오닐, 루이기 피란델로, 패르 라게르크비스트 같은 현대 극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