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주의

표현주의

다른 표기 언어 Expressionism , 表現主義

요약 넓은 의미에서의 표현주의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주요한 미술 사조 가운데 하나로, 거기에 나타난 매우 주관적, 개성적, 임의적인 자기표현의 특징들은 다양한 현대 미술운동 및 미술가의 전형적인 면모이기도 하다.
또한 표현주의는 적어도 중세 이후 독일과 북유럽의 미술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으로서 특히 사회적 변혁기나 정신적 위기의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별히 특정 양식으로서의 표현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기와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미술운동을 가리킨다. 문학에서의 표현주의는 물질주의,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중산층의 번창, 급속한 기계화 및 도시화 및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 사회에 만연했던 가족주의에 대한 반발로 발생했다. 표현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과 전쟁이 끝난 직후 독일의 지배적인 문학운동이 되었다.

이 때 왜곡이나 과장·원시주의·환상 등을 통해 생생하고 조화롭지 않으며 거칠게 또는 정력적으로 주제를 묘사함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한다.

넓은 의미에서의 표현주의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주요한 미술 사조 가운데 하나로, 거기에 나타난 매우 주관적·개성적·임의적인 자기 표현의 특징들은 다양한 현대 미술 운동 및 미술가의 전형적인 면모이기도 하다. 또한 표현주의는 적어도 중세 이후 독일과 북유럽의 미술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으로서 특히 사회적 변혁기나 정신적 위기의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의미에서 표현주의는 이탈리아 및 프랑스에서 나타난 합리주의적·고전주의적 경향과 정반대되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특별히 특정 양식으로서의 표현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기와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프랑스·러시아 등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미술운동을 가리킨다.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기원은 빈센트 반 고흐, 에드바르드 뭉크, J. 앙소르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들은 1885~1900년의 시기에 각자 매우 개성적인 회화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선과 색채 자체의 표현 가능성을 살려 느낌 또는 극적인 주제들을 표현하거나 두려움·공포·기괴함의 감정들을 전달하거나 또는 단순히 강렬한 인상의 자연을 찬양하고는 했다. 그들은 보다 주관적인 시각이나 정신 상태를 나타내기 위하여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거부했다.

표현주의의 2번째 주요한 흐름은 1905년경 독일에서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주도하에 브뤼케파가 결성되면서 시작되었다(→ 색인:브뤼케파). 이 그룹의 회원으로는 에리히 헤켈, 카를 슈미트 로틀루프, 프리츠 블레일 등이 있었다.

이 화가들은 자연을 피상적으로 묘사하는 전형화되어 버린 인상주의에 반감을 가졌다. 그들은 무기력해진 독일의 미술에 정신적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으며 근원적·원시적·개성적·자발적인 표현을 통하여 이것을 실현하려고 했다. 얼마 후 에밀 놀데와 막스 페히슈타인, 오토 뮐러도 이 그룹에 합류했다.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1890년대의 선배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아프리카의 목각 장식과 알브레히트 뒤러,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와 같은 중세 및 르네상스기의 북유럽 미술가들의 작품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또한 신인상주의와 야수파 등 당시의 새로운 미술 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곧 거칠고 대담하며 강렬한 시각적 효과가 두드러진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불규칙하고 비뚤어진 선과 거칠고 빠른 붓놀림 및 눈에 거슬리는 색채 등을 사용하여 불안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혼잡하고 격앙된 구도의 도시 풍경과 그밖에 동시대적 주제를 묘사했다. 그들의 작품은 대부분이 좌절·불안·혐오·불만·격정 등 보통 그들이 현대 생활에서 부딪히는 진부하고 불쾌한 여러 가지 모순들에 반응하여 생겨나는 일종의 광적인 강렬한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굵고 비뚤어진 선과 거친 색채 대비를 사용한 목판화는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가들이 즐겨 사용한 매체였다.

브뤼케파 화가들의 작품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주어 표현주의를 확산시켰다. 오스트리아의 오스카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는 그들의 거친 붓놀림과 각진 선을 받아들였으며, 프랑스의 조르주 루오와 샤임 수틴은 각각 강렬한 감정 표현과 심하게 왜곡된 인물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양식을 발전시켰다.

모두 독일 태생인 화가 막스 베크만, 판화가 케테 콜비츠, 조각가 에른스트 바를라흐와 빌헬름 렘브루크는 표현주의 양식의 작품들을 만들었다. 청기사파로 알려진 그룹에 속한 미술가들의 작품은 보통 브뤼케파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감정을 덜 드러내며 회화에서 형식 요소들간의 조화에도 좀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표현주의로 분류된다(→ 색인:청기사파). 표현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냉소주의·소외·환멸감이 팽배한 전후 분위기에 어울려 독일 미술의 지배적인 양식이 되었다.

이 운동의 후기 참가자들 중 게오르크 그로스나 오토 딕스 같은 미술가들은 표현주의와 사실주의를 혼합하여 좀더 날카로운 사회 비판 미술 양식을 개발해냈는데, 이러한 경향은 신즉물주의라고 알려졌다(→ 색인:신즉물주의). 추상표현주의·신표현주의 등의 용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뒤 20세기의 여러 미술운동들에서는 표현주의의 자발적·본능적·감정적 특징들이 계속 나타난다.

문학에서의 표현주의는 물질주의·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중산층의 번창, 급속한 기계화·도시화 및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 사회에 만연했던 가족주의에 대한 반발로 발생했다.

표현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과 전쟁이 끝난 직후 독일의 지배적인 문학운동이 되었다. 표현주의 작가들은 사회에 대한 저항을 나타내는 희곡을 구성할 때 새로운 양식을 통해 그들의 생각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들의 관심은 특별한 상황보다는 일반적 진리에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희곡에서 완전히 발달한 개성화된 성격보다는 전형적인 상징적 유형을 탐구했다.

외부 세계의 묘사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 단지 개괄적으로만 나타내고 공간적·시간적으로 겨우 암시만 해놓았을 뿐인 반면, 인간 내면의 정신 생활을 강조한 표현주의 희곡에서는 삶을 모방하기보다는 정신상태를 무아지경으로 환기시키는 것이 삶의 주제가 되었다. 표현주의 희곡에서 주인공은 종종 젊은이들의 정신적 불안과 구세대에 대한 반항 및 여러 가지 정치적·혁명적 치유방법들을 파헤치고 있는 집약적·생략적이며 거의 약어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긴 독백을 통해 자신의 비애를 쏟아놓는다.

주인공의 내면은 느슨하게 연결된 일련의 극적 장면들이나 역할을 통해 파헤쳐지며 그 과정에서 그는 전통적인 가치관에 반발해 좀더 높은 정신적 생활관을 추구한다.

아우귀스트 스트린드베리, 프랑크 베데킨트는 주목할 만한 선구적인 표현주의 극작가들이었지만 최초의 본격적인 표현주의 희곡은 라인하르트 요하네스 조르게의 〈걸인 Der Bettler〉으로, 이 작품은 1912년에 썼으나 1917년에야 비로소 공연되었다.

그밖의 주요 표현주의 극작가로는 게오르크 카이저, 에른스트 톨러, 파울 코른펠트, 프리츠 폰 운루, 발터 하센클레버, 라인하르트 괴링 등으로 모두 독일인이었다.

표현주의 희곡과 동시에 부상한 표현주의 도 기존의 흐름에서 벗어나 황홀하고 상당한 연상력을 지닌 찬송가 같은 서정성을 추구했다. 농축되고 노골적인 시들은 명사와 약간의 형용사 및 부정사 용법의 동사들만을 사용하면서 본질적인 느낌에 이르기 위해 이야기와 설명을 제거했다.

주요 표현주의 시인으로는 독일의 게오르크 하임, 에른스트 슈타들러, 아우구스트 슈트람, 고트프리트 벤, 게오르크 트라클, 엘제 라스커 쉴러 및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란츠 베르펠 등이 있다. 표현주의 시의 주요주제는 도시 생활에 대한 공포와 문명의 붕괴에 대한 계시적인 예언이었다. 몇몇 시인들은 염세적이었으며 중산층의 가치관을 풍자하는 데 그쳤지만, 또다른 시인들은 정치적·사회적 개혁에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다가올 혁명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다.

독일 밖에서 표현주의 희곡의 기법을 사용한 극작가로는 미국의 유진 오닐, 엘머 라이스 등이 있었다. 표현주의 극작법에 크게 영향을 받은 초기 표현주의 영화는 무대장치를 통해 주인공의 주관적인 정신상태를 표현하려고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캐비닛 The Cabinet of Dr. Caligari〉(1919)인데, 여기에서는 한 미친 남자가 미친 여자에게 자기가 어떻게 정신병원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무대배경에 나오는 왜곡된 거리와 건물들은 그의 광기를 투사하는 것이며 다른 등장인물들은 분장과 의상을 통해 시각적인 상징물로 추상화되어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공포·위협·불안 등을 불러일으키는 소름끼치는 분위기와 극적이고 음산한 조명 및 기괴한 배경은 몇몇 중요한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었다. 그중에서 특히 파울 베게너가 다시 제작한 〈골램 The Golem〉(1920)과 F.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 Nosferatu〉(1922),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1927) 등은 사회적 붕괴에 대한 비관적인 예견을 나타내거나 인간 본성의 불길한 이중성과 소름 끼치도록 사악한 특성을 파헤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작곡가인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청기사파 연감에 기고했다고 해서 그를 표현주의자로 분류하지만, 음악에서의 표현주의는 오페라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표현주의 음악의 초기 작품으로는 코코슈카의 초기 표현주의 희곡인 〈살인자, 여인들의 소망 Mörder, Hoffnung der Frauen〉(1919)과 아우구스트 슈트람의 〈성녀 수산나 Sancta Susanna〉(1922)를 위해 파울 힌데미트가 작곡한 오페라 곡들이 있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표현주의 오페라는 알반 베르크가 작곡한 두 작품인 〈보체크 Wozzeck〉(1925 공연)와 1979년에야 비로소 작품 전체가 상연된 〈룰루 Lulu〉이다.

표현주의는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지나치게 시적인 언어의 사용 및 대체로 매우 개성적이고 난해한 성격의 표현방식 등으로 인해 곧 쇠퇴했다. 1924년 이후 독일에서 부분적으로 안정이 회복되고 보다 공공연한 정치적 형태의 사회비판적 사실주의가 전개되면서 1920년대 후반에는 표현주의의 쇠퇴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표현주의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나치는 거의 모든 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작품의 전시 및 발표를 금했고 결국은 창작 자체를 금지했다.

수많은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미국 등 외국으로 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