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당

나치당

다른 표기 언어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동의어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 독일 노동자당

요약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1945년까지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 운영한 당이다. 나치당은 바이에른에서 꾸준히 세력을 키워나갔고 나치 돌격대(SA)라는 폭력단체를 결성하여 당을 보호했다.
나치당이 전국적인 정치세력이 된 것은 대공황의 여파 때문이었다. 1932년 11월 선거에서 전체투표의 33%의 득표에 머물렀으나 히틀러의 막후공작으로 총리로 지명된 후 히틀러는 나치당 당수로서 총통과 제국총리 그리고 독일군 총사령관직을 독점하고 독일의 모든 정치·사회·문화 활동을 통제했다.
1945년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자 나치당은 불법화되고, 당 최고지도자들은 평화와 인간성을 짓밟는 국제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1945년 이후 대중운동으로서의 나치즘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나치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나치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아돌프 히틀러의 주도하에 1933년 정권을 장악하고 1945년까지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히틀러). 1919년 뮌헨의 자물쇠제조공인 안톤 드렉슬러에 의해 '독일노동자당'으로 창설되었으며 바로 그해 당집회에 참석한 히틀러가 특유의 정열과 웅변술로 당을 장악했다.

나치당은 본거지인 바이에른에서 꾸준히 세력을 키워나갔고 당대회와 집회를 보호하기 위해 제대군인과 준군사 조직으로부터 나치 돌격대(SA)라는 폭력단체를 결성했다. 1923년 히틀러와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충분히 강화되었다고 믿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반대하는 내란상태를 유도할 목적으로 바이에른 주정부 전복 기도인 비어 홀 폭동을 획책했으나 무위에 그쳤다(→ 비어 홀 폭동).

나치당이 처음으로 전국적인 정치세력이 된 것은 대공황의 여파 때문이었다. 1929~30년 실업이 급증하면서 공화국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가자 나치당은 교묘하게 이를 이용했다. 그러나 1932년 후반 실업률이 떨어지면서 나치당의 득표도 감소되어 1932년 11월 선거에서는 득표수가 약 1,200만 정도에 머물렀다(전체투표의 33%). 하지만 히틀러의 기민한 막후공작으로 공화국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했다. 히틀러는 취임 후 몇 달 동안 정부 내에 나치당 세력을 확립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나치당은 1933년 3월 5일의 선거에서 44%의 득표율을 보였으며 거리낌없는 술책으로 공화국 의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3월 23일 제국의회에서 통과된 '수권법'은 나치당 정권으로 하여금 의회와 대통령에 구애되지 않는 독자적인 법령선포를 가능하게 했고, 이로써 히틀러는 사실상 독재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1933년 7월 14일 제3제국 정부는 나치당을 독일내 유일정당으로 선포했다. 이듬해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나치당 당수로서 총통과 제국총리 그리고 독일군 총사령관직을 독점했다. 모든 고위관리들은 반드시 나치 당적을 가져야 했고 가울라이터는 주정부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1934년 히틀러는 당내 좌파 또는 사회주의 세력을 진압하면서 에른스트 과 반항적인 SA 지도자들을 처형했다. 히틀러의 말은 조금도 이의가 있을 수 없는 지상명령이 되었으며 나치당은 독일의 모든 정치·사회·문화 활동을 통제했다. 1945년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자 나치당은 불법화되고, 당 최고지도자들은 평화와 인간성을 짓밟는 국제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국가사회주의를 추종하는 군소정당들이 지금도 남아 있기는 하지만 1945년 이후 대중운동으로서의 나치즘은 사실상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