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덴부르크

힌덴부르크

다른 표기 언어 Paul von Hindenburg
요약 테이블
출생 1847. 10. 2, 프로이센 포젠(지금의 폴란드 포즈나인)
사망 1934. 8. 2, 독일 노이데크(지금은 폴란드 영토임)
국적 독일

요약 힌덴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원수로 참전했으며, 1925~34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공화국 제2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11세에 사관후보생이 되어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과 1870~71년 프랑스-독일전쟁에 참전했다. 1911년에 예편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소집되었다. 독일군의 최상급 전략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찬사를 받았던 루덴도르프 소장의 형식상의 상관으로 임명된 그는 동프로이센에서 러시아를 물리치고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그는 국민적 찬사를 받게 되었다. 그는 공공연한 군주제 옹호론자였으나 공화국의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불황 그리고 그가 1933년에 총리로 임명한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부상으로 혼란스러운 대통령 재임시절을 보냈다.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원수로 참전했으며, 1925~34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공화국 제2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대통령 재임시절은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불황 그리고 그가 1933년에 총리로 임명한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부상으로 엉망이 되었다. 그는 구(舊) 융커 가문 출신의 프로이센 장교였던 아버지와 중산 계층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가 중산계층 출신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편이었으나 그 사실이 그의 주의 깊고 융통성 있는 성향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11세의 어린나이에 사관후보생이 된 그는 1866년 7주전쟁이라고도 부르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으며, 1870~71년에는 프랑스-독일전쟁에 참전했다.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제때에 장군까지 승진한 그는 1911년 명예로운 예편을 했으나 이렇다 할 탁월한 경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힌덴부르크는 1914년 8월 명목상 에리히 루덴도르프 소장(少將)의 명목상의 상관으로 군대에 재소집되었다.

독일군의 최상급 전략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찬사를 받았던 루덴도르프는 동프로이센에서 러시아 침략군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작전의 성공으로 국민적 찬사를 받게 된 것은 루덴도르프보다 오히려 힌덴부르크였다. 곧 힌덴부르크의 명성이 황제 빌헬름 2세의 명성을 압도했다. 그는 총원수로 진급하게 되었으며, 1916년 황제는 그와 그의 최고부관인 루덴도르프에게 전(全)독일지상군에 대한 명령권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상전에서 이길 수 없었던 그들은 무제한적인 잠수함전을 전개함으로써 굶주린 영국이 항복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무제한적인 잠수함전을 전개하여 그들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였으며 또 궁극적으로 독일의 패배를 초래했다. 그들의 패배를 인정하게 되었을 때 힌덴부르크는 패배에 대한 비난을 루덴도르프에게 전가했다.

빌헬름 2세의 퇴위 후 힌덴부르크는 잠시 동안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와 협력했다.

그는 프랑스와 벨기에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의 철수를 지휘했으며, 그의 참모들에게 당시 독일에 등장하고 있던 좌파급진주의 단체들을 조직적으로 진압하라고 지시했다. 그에게 주어진 2가지 임무가 성취되자 그는 1919년 6월 다시 한 번 더 예편을 했다. 그러나 그의 2가지 임무수행 과정 속에서 독일의 구(舊)장교단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하노버에서 조용히 살면서 그는 가끔 반(反)공화국적 견해를 피력했으나 전반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비당파적인 국민적 인물로 부각시켰다.

1925년 4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죽자 그의 공공연한 군주제 옹호론에도 불구하고 그를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는 공화체제의 내용이나 형식을 거의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막역한 친구들, 특히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새로운 권위주의적 체제를 열망했으며, 그가 그의 특권을 이용하여 의회의 제반 통제들로부터 보다 많은 자율권을 정부에 제공해줄 것을 주장했다. 그는 빈번한 내각 위기에 따른 피곤함과 비헌법적인 행동 및 부가된 책임감에서 오는 공포에 시달리면서 간신히 정부를 끌고 나갔다.

불황이 시작되고 정부가 다시 해산되자 그는 의회의 신임이 아닌 자신의 신임에 기초하여 내각을 구성했다. 그는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에게 의회의 비협조성이 증명되면 의회를 해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동시에 의회에서 제정된 법을 대신하여 긴급포고령을 발할 것을 약속했다. 의회가 1930년 7월에 해체되고 새로운 선거의 결과에 따라 의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의회도 역시 정부에 비협조적이었다. 이 의회에서는 반의회적인 국가사회주의당이 제2의 거대 정당으로 등장했다. 브뤼닝은 포고령에 따라 거의 독단적으로 국가를 통치했다. 그러나 각 포고령에 대통령의 서명 날인이 필요했으므로 힌덴부르크는 정부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점차 허약해지고 변덕스러워지기 시작했으며, 친구들의 영향을 받게 된 그는 육군과 해군에 막대한 양의 자금을 투입할 것을 정부에 강요했고 실업 구제와 다른 절박한 사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대안도 없이 경제적 부채를 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브뤼닝의 통화수축정책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무엇보다도 나치에 의해서 발화된 불안정은 계속해서 심화되었다(나치당).

힌덴부르크의 대통령 임기가 1932년 4월로 만료되자 그는 히틀러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후보로서 다시 대통령 경선에 나섰다. 그는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나 보수적인 민족주의자 단체들의 지지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브뤼닝의 가톨릭 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의 지지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가장 친밀하게 느꼈던 보수적 민족주의 단체들은 이제 힌덴부르크가 아닌 히틀러를 지지했다. 힌덴부르크에게 투표했던 사람들은 나치의 무법성과 잔인성에 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보루로서 그를 따랐다. 하지만 대통령의 측근들은 불쾌하기는 하지만 나치를 그들이 주장하는 조건들을 확실히 실천해줄 수 있는 유용한 운동단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브뤼닝을 나치와 화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걸림돌로 보고 대통령을 재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브뤼닝 총리를 해임시키도록 대통령을 설득했다.

전(前) 기병장교 프란츠 폰 파펜이 주도하던 정부와 슐라이허가 이끌던 정부는 둘 다 나치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히틀러가 그의 당이 참여한 정부에서 총리가 되기를 희망하고 또 그와 같은 내용을 담은 탄원서와 편지들이 쇄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의 소란스런 공격성을 불신했다. 따라서 그는 히틀러에게 총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1932년 11월 새 의회선거에서 나치가 그들의 기존 득표 수의 10%를 상실하자 파펜과 히틀러는, 히틀러를 총리로 파펜을 부총리로 하며, 대부분의 다른 장관직을 비나치계 인물로 충원하는 정부 구성에 합의했다.

파펜은 히틀러를 쉽게 통제할 수 있다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보증했다. 슐라이허가 그의 정부에 대한 의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자 지치고 좌절한 힌덴부르크는 그의 사임을 요구했다.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새로운 내각의 총리로 임명했는데, 그 내각 각료 중 프리크와 괴링만이 나치 당원이었다.

파펜의 호위대는 비효율성을 드러냈다. 히틀러는 테러와 조작 그리고 허위 약속을 이용하여 재빠르게 거의 무제한적인 정치권력을 확보했다. 힌덴부르크는 때로 자신이 히틀러와 나치당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무해한 시늉을 했지만 그는 자기 쪽에서 먼저 새로운 상황에 맞게 자신을 적응시켰으며, 마침내 그는 히틀러의 따뜻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그의 임종시에 이미 민족적인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여전히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