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펜

파펜

다른 표기 언어 Franz von Papen
요약 테이블
출생 1879. 10. 29, 독일 베를
사망 1969. 5. 2, 서독 오버자스바흐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정치가·외교관.

파펜(Franz von Papen)
파펜(Franz von Papen)

바이마르 공화국을 해체하고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가 되도록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부유한 가톨릭 지주 가문의 자손이었던 그는 직업군인으로 출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워싱턴 주재 독일 육군 무관으로 있었다. 그러나 1915년 간첩사건과 태업에 연루되어 본국으로 소환당했다. 그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팔레스타인에 주둔한 터키 제4군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전후 독일로 돌아온 왕정주의자 파펜은 정계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다. 1921~32년 연방 하원의원을 지낸 그는 가톨릭 중앙당의 극우파에 속해 있었다.

그는 독일 왕정주의자, 이전의 귀족, 대실업가 단체, 독일군 등과 확실한 연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추종자는 1명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고문관이었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이 만들어낸 각본에 따라 1932년 6월 1일 파펜이 총리직에 취임하자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그는 의회에서 정치적 토대나 다수 세력의 확보 없이 우파적인 권위주의 정부를 수립했다.

의회 내의 제2당을 형성하고 있던 나치당을 달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6월 15일 나치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Sturmabteilung/SA)에 대해 취해졌던 금지령을 해제했으며, 7월 20일 프로이센의 사회민주당 정부를 해산시켰다. 외교문제에 있어서 그는 베르사유 조약에 입각한 독일의 배상 의무를 사실상 말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독일을 통치하고자 했던 히틀러는 여전히 야당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의 바이마르 정치체제를 권위주의적인 지배체제로 바꾸려 한 파펜의 반동적인 정책들과 노력들은 진정 대중의 뜻에 따라 범국민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던 슐라이허를 소외시켰다. 그에 따라 슐라이허는 파펜의 정책들을 거부하도록 대다수의 정부관료들을 설득했다. 결국 파펜은 사임하게 되었고 12월 4일 그의 뒤를 이어 슐라이허가 총리로 취임했다.

파펜은 자신이 축출되었음에 격앙하여 슐라이허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1933년 1월 4일 히틀러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또한 그는 나치 지도자를 총리직에 앉히도록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했다. 부총리가 된 파펜은 그의 동료인 비(非)나치계 민족주의자들이 장관직의 다수를 차지하자, 순진하게도 자신이 나치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히틀러를 보좌했다. 히틀러가 돌격대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던 1934년 6월 30일 파펜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숙청일로부터 3일 후 부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뒤 그는 1934~38년 오스트리아 주재 독일 대사로 파견되었고, 그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병합시키기 위해 힘썼다. 1939~44년에는 터키 주재 대사로서 터키가 연합국들과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노력했다(나치당).

1945년 4월 연합군에게 체포된 그는 전범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뉘른베르크 국제사법재판소는 그가 침략전쟁을 준비하는 데 공모한 사실이 없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그후에 열린 독일 재판소에서의 재판에서는 중요한 나치 당원이었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그는 1949년 법원에 상소하여 벌금형으로 감형된 후 석방되었다. 1952년 그의 회고록인 〈진실의 길목에서 Der Wahrheit eine Gasse〉가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