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덴도르프

루덴도르프

다른 표기 언어 Erich Ludendorff
요약 테이블
출생 1865. 4. 9, 프로이센 폴란드 포즈나인 근처 크루셰브니아
사망 1937. 12. 20, 뮌헨
국적 독일

요약 제1차 세계대전 후 반동 정치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나치당에 가입한 독일 제국 육군 장교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벨기에 리에주 요새 기습전과 파울 폰 힌덴부르크 장군과 함께 동프로이센 타넨베르크에서 벌어진 러시아군과의 전투(1914)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17년 영국에 대한 무제한의 잠수함전을 허가했으나 미국의 참전을 유발했을 뿐 영국의 붕괴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1918년 휴전협상을 요구했다가 휴전조건이 가혹하다는 것을 알고 전쟁을 계속하자는 주장으로 입장을 바꿨다. 하지만 정치지도자들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자 사의를 표했다. 그후 20년 동안 히틀러의 실패한 쿠데타에 가담하는 등 이해받지 못하는 행보를 보였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제1차 세계대전중의 활동
  4. 전후의 정치활동

개요

전후에는 반동 정치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나치당에 가입했다.

초기생애

아버지는 영락한 지주로 기병대장이었고 어머니는 귀족군인 가문 출신이었다.

학도군사훈련단의 교육을 받고 보병사관이 되었으며, 군인으로서의 자질이 탁월해 곧 일반참모부에 발탁되었다.

1908년 그는 일반적으로 '대(大)일반참모부'로 알려진 육군참모부에서 군대의 긴급배치 및 동원준비를 담당하는 제2(독일)부 책임자가 되었다. 루덴도르프는 총참모장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의 지휘하에 슐리펜 계획을 수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계획은 프랑스를 일거에 분쇄할 목적으로 중립국 벨기에의 침공을 포함하여 대대적인 측면돌파를 감행하려는 계획이었다. 몰트케와 루덴도르프는 스위스와 로렌 사이의 남쪽 측면 돌출부를 보다 확고히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네덜란드 남부를 뚫고 나간다는 방침을 버리고, 벨기에 동부의 가장 중요한 요새로 흔히 '난공불락'으로 불리는 리에주를 기습 점령할 준비를 했다.

독일에서는 전통적으로 정치·군사면의 최고 권한을 총사령관과 황제가 행사해 왔으며, 일반 참모장교들은 정치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루덴도르프는 이를 무시하고 일반 참모부가 유럽의 전반적인 군비 경쟁에 비추어 필수불가결하다고 판단하는 인원과 장비의 증강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군비증강을 지지하는 국수주의적 정치인 집단과 접촉하면서, 그는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군정책에 간여하면 강력한 전쟁수행이 보장된다는 확신을 얻었다. 지나치게 의욕적이었던 그는 군당국의 노여움을 사, 1913년 보병연대장으로 전보되었다.

1914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서부전선 제2군의 병참부대장(보급과 정비 담당)으로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의 활동

동프로이센 주둔의 독일 제8군이 러시아의 2개군에 의해 유린될 위기에 처했을 때 루덴도르프는 제8군 참모장으로 발탁되었다.

정력적이지만 간혹 거칠기도 하고 위기에 처해서는 종종 소심해지기도 했던 그는 강심장으로 유명한 노령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장군에게 배속되었고 자기와 힌덴브르크 총사령관이 부딪친 문제는 어렵기는 하지만 해결 못할 것은 결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14년 8월 동프로이센의 타넨베르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전투로 힌덴부르크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타넨베르크 전투). 그러나 뒤이어 서부의 마른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패하여 루덴도르프가 수정한 슐리펜 계획이 실패작이었음이 드러났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동부전선에서 2년 동안 러시아군과 싸웠다. 루덴도르프는 1915년 여름 서부전선에 주둔한 독일군의 일부를 잠시 빼돌려 러시아에 대한 총공세를 가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군 최고 사령부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베르됭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실패로 끝난 후 1916년 8월 동서 양쪽에서 연합군이 맹공격을 가해올 것을 예상한 독일 황제는 두 장군에게 군의 최고 지휘권을 맡겼다.

두 사람은 영국의 해상봉쇄로 이미 곤경을 겪고 있는 국내전선의 병력을 동원하여 총력전을 벌이려고 계획했다. 루덴도르프는 동서 양쪽의 독일군 점령지를 확보하여 '승리의 평화'를 관철한다는 단 하나의 방침에 모든 것을 걸었다. 1917년 그는 영국에 대한 무제한의 잠수함전을 허가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참전을 유발했을 뿐 영국의 붕괴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1917년 3월 러시아 황제가 폐위된 후, 루덴도르프는 러시아의 볼셰비키파 이민자들(그 가운데는 무명의 레닌도 끼어 있었음)이 러시아로 돌아가는 것을 허가했다.

러시아인들을 설득하여 강화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일종의 군사독재권을 행사하게 된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강자'만이 '제국'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환상에서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총리를 면직시키기도 했다.

1918년 3월 21일 루덴도르프는 미군이 상륙하기 전 영국군·프랑스군을 분쇄하여 유럽의 판도를 결정할 목적으로 서부전선에서 총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군의 병력을 과대평가했다. 공격은 실패했으며, 1918년 가을 독일의 동맹국들인 오스트리아·헝가리·불가리아·투르크의 붕괴가 임박하자 루덴도르프는 즉각적인 휴전협상을 요구했다. 그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과로로 인하여 한동안 신경 이상이 생겨 정신과 의사를 최고 사령부로 불러 치료를 받기도 했다. 루덴도르프는 상대국의 휴전조건이 가혹하다는 것을 알고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들이 그의 주장에 따를 의사가 없음을 알자 사표를 제출했으며, 빌헬름 2세는 1918년 10월 26일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러나 황제가 힌덴부르크에게는 유임을 명하자 기분이 크게 상했다. 불가능에 도전했던 의지력과 정력이 출중한 이 거인은 그 활동영역을 졸지에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1918년 11월의 혁명을 완전한 체념으로 맞이했으며 스웨덴으로 망명하여 몇 개월을 보냈다.

프로이센의 관례에 따라 일반 참모장교들은 모든 결정에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한편 익명의 원칙을 엄격히 지켜야 했다.

그러나 전략적 재능 못지않게 야심도 대단했던 루덴도르프는 전쟁이 패전으로 종결되자, 자기가 제1차 세계대전의 유일한 진짜 '사령관'이었으며 배후에서 움직이는 사악한 세력이 자신의 승리를 박탈했다고 주장했다. 즉 자기는 게르만족 영웅설화의 주인공인 지크프리트처럼 등뒤에서 찌르는 자객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독일군은 싸움터에서는 패한 적이 없는데 '국내전선'에 의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림으로써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민생활에 많은 해독을 끼쳤다.

전후의 정치활동

그후 20년 동안 루덴도르프는 기괴한 생활을 했다.

배신과 오해를 받은 사령관으로 자처하면서 1920년 볼프강 카프와 1923년 히틀러의 실패로 끝난 쿠데타에 가담했으며, 1925년에는 철천지 원수로까지 여기게 된 과거의 상관 힌덴부르크에 맞서 대통령에 출마했다(카프 폭동, 비어 홀 폭동). 1924~28년에는 국가사회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지냈다. 군대식 사고방식만을 한결같이 추구하면서 '총력전' 이론을 개발하고 1935년에는 그것을 제목으로 한 책을 발표했다.

19세기 전반의 위대한 군사이론가인 프로이센의 일반 참모 C.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수단을 달리한 정치의 연장'이라는 전쟁론을 개진했다. 루덴도르프는 그와 정반대의 견해를 제시해 정치는 전쟁의 한 수단이어야 하며 국가의 모든 물리적·정신적 힘은 전쟁을 위해 동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평화란 전쟁과 전쟁 사이의 막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루덴도르프는 여성에게 항상 약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굉장한 미인인 그의 첫번째 부인은 루덴도르프와 결혼하기 위해 당시 남편과 이혼한 여자였다. 그러나 1926년 그는 첫 부인과의 이혼을 고집하여 이를 관철시키고 신경과 전문의이며 통속철학자인 마틸데 폰 켐니츠와 재혼했다. 루덴도르프는 자기를 독일군의 진짜 '총사령관'으로 대하고, 그를 만나기 이전에 유대인, 그리스도교, 프리메이슨주의 등 '초국가적 세력들'이 준동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 엉뚱한 여자에게 완전히 빠졌다. 그때부터 그는 2번째 아내와 함께 이 가상의 적들과의 싸움에 뛰어들었다.

그들이 루덴도르프 자신과 독일로부터 승리를 빼앗아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독일의 '거룩한 신앙'을 설교했다. 이 신앙을 놓고 그는 옛날의 장교단들과 언쟁을 벌였고, 히틀러와 그의 국가 사회당원들과도 다투었다. 과거에 황제가 자기를 백작에 봉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던 것과 똑같이 이제 그는 히틀러가 자기를 육군원수로 승진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일단의 광신적인 추종자 외에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 1930년대 그가 히틀러의 독재에 대하여 경고하기 시작했을 때 아무도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1937년 그가 죽었을 때 많은 노병들이 그를 애도했지만, 대부분은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