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제비츠

클라우제비츠

다른 표기 언어 Carl (Philipp Gottlieb) von Clausewitz 동의어 카를 필리프 고틀리프 폰 클라우제비츠, Carl Phillip Gottlieb von Clausewitz
요약 테이블
출생 1780. 6. 1, 프로이센 마크데부르크 근처 부르크
사망 1831. 11. 16, 슐레지엔 브레슬라우
국적 프로이센

요약 주요 저서 <전쟁론>을 통해 군사문제에 정치적 방향성 이론을 제시했다. 적의 모든 영토·재산·주민을 공격 대상으로 하는 전면전 개념을 주창했으며, 군사 지도자가 직면할 수 있는 상황을 자세히 논함으로써 독자들이 이론에 입각한 군사적 판단력을 갖도록 했다. 1792년 프로이센군에 입대하고 1793~94년 프랑스 혁명군과 벌인 라인 전투 때 임관되어 수비대에 근무했다. 베를린의 육군대학에서 군사학과 철학, 문학을 공부했으며, 독자적인 기본 전략개념을 발전시켰다. 1806년 예나 전투에 참전해 프랑스군에 사로잡혔다가 1808년 프로이센으로 돌아왔다. 1812년 원정에서는 러시아군 참모장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818년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육군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역사연구서와 전략문제를 다룬 <전쟁론>을 집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1831년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

클라우제비츠(Carl Phillip Gottlieb von Clausewitz)
클라우제비츠(Carl Phillip Gottlieb von Clausewitz)

〈전쟁론 Vom Kriege〉 등의 저서를 통해 적의 모든 영토·재산·주민을 공격 대상으로 하는 전면전(全面戰) 개념을 주창했다.

가난하지만 전문직업을 가진 중산층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792년 프로이센군에 입대했다. 1793~94년에 프랑스 혁명군과 벌인 라인 전투 때 임관되어 이후 수년 간 수비대에 근무했으며, 그곳의 여건을 이용해 상당한 시간을 공부에 쏟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1801년 베를린에 있는 육군대학 입학허가를 받았다.

베를린의 육군대학에서 스승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의 지도로 군사학을 배웠고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으며, 독자적인 기본 전략개념을 발전시켰다. 샤른호르스트의 소개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장래에 아내가 될 마리 폰 브륄 여백작과 만났고 샤른호르스트의 주선으로 아우구스트 대공의 부관에 임명되었다. 대공의 부관으로 예나 전투(1806)에 참전했다가 프렌츨라우에서 프랑스군에게 사로잡혔으며, 1808년 프로이센으로 돌아왔다. 그는 샤른호르스트가 주도한 프로이센 군대개혁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직전에 사임하고 다른 독일 애국자들처럼 러시아군에 들어갔다.

1812년 원정에서 그는 러시아군 참모장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러시아의 성공적인 퇴각 전략에 일부 책임을 맡았고 타우로겐 회의 개최를 위한 협상에 참여했다. 이 회의를 전환점으로 프로이센은 프랑스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1813~14년의 전쟁에서 여러 직책을 거친 뒤 프로이센군으로 돌아왔으며, 워털루 전투 때는 군단 참모장으로 일했다. 1818년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육군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2년 동안 클라우제비츠는 한직인 이 자리에 있으면서 역사연구서와 전략문제를 다룬 주요저서 〈전쟁론〉을 집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큰 명성을 얻은 이 책에서 그는 프리드리히 대제와 나폴레옹의 전투 경험을 기초로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들을 밝혀냄으로써 군사적 천재성의 역할을 분석했다. 그의 결론들은 오늘날에도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기술적 논의는 가급적 생략했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읽혔다.

그는 어떠한 전략적 체계도 만들지 않았으므로 그때까지의 틀에 박힌 기계적인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신 심리적 요소와 치밀한 계산을 할 수 없는 우발적인 요소의 중요성과 전략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군사 지도자가 직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자세히 논의함으로써 독자들이 이론에 입각한 군사적 판단력을 갖도록 하고 주어진 여건에서 모든 적절한 요소들을 검토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략 수립의 3대 목표는 적의 세력·자원·사기이며, 방어전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강점이 많다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을 완성하기 전에 브레슬라우로 전속되었고 1830년의 폴란드 혁명을 감시하기 위해 배치된 프로이센군을 맡았다. 그러나 브레슬라우에서 돌아온 직후인 1831년 11월 16일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

그의 원고는 헌신적인 미망인에 의해 편집·출간되었다.

그의 성격은 그가 비교적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과 당대 독일의 문학과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천성적으로 부끄럼을 잘 타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종종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투에서는 결코 독자적인 지휘권을 맡지 않고 주로 참모로서 활약하며 확실한 조언과 전장에서의 용기로 두각을 나타냈다.

배경과 경력으로 판단한다면 그는 귀족적인 프로이센 군대의 전통보다는 독일 민족 부흥운동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가 저술한 방대한 나폴레옹 전쟁사는 단지 기술적인 관심만을 끄는 반면 〈전쟁론〉은 현대의 전략개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가장 중요한 업적은 군사문제에 정치적 방향성 이론을 제시한 점이다. 그는 "전쟁은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적 교섭에 불과하다"라고 하면서 전쟁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지적했다.

그의 이론은 독일인들에 의해 면밀히 연구되었고 독일 군사 사상에 발자취를 남겼지만, 독일의 실제 전술에 미친 영향력은 과대 평가되어왔다. 〈전쟁론〉의 1853년판부터는 내각이 전략을 주도해야 한다는 중요한 대목이 정반대로 기술되었고, 이때문에 독일의 군사전략은 점차 정치적 목적을 잃었다. 그러나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에 그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되살아났다. 그의 저서는 외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스웨덴·네덜란드·스위스·오스트리아의 군장교들은 일찍부터 그의 이론에 관심을 가졌고, 대부분의 저서들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전쟁론〉의 영어판이 1873년에 나왔고, 러시아어·이탈리아어·히브리어·헝가리어·스페인어로도 번역되었다. 1900년경에는 미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이론이 알려졌다.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처음 번역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그의 저서에 관해 논의했고, 레닌은 스위스 망명 기간에 그의 정치이론을 연구했다. '제국주의 전쟁'과 같은 전쟁의 본질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은 주로 그에게서 도출된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전략개념은 육상전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20세기 중반경 장거리 무기체제가 새로이 등장하면서부터는 그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의 기본개념 중 많은 부분이 여전히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