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케

몰트케

다른 표기 언어 Helmuth von Moltke
요약 테이블
출생 1800. 10. 26, 프로이센 메클렌부르크 파르힘
사망 1891. 4. 24, 독일 베를린
국적 독일

요약 1858~88년 프로이센(후에는 독일)의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임하면서 덴마크(1864)·오스트리아(1866)·프랑스(1871)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821년 몰트케는 프로이센 군대를 위해 봉사하기로 마음먹고 1822년 근위기병연대 소위로 임관하여 이후 소설 창작과 병영 생활을 병행했다. 몰트케는 자연국경이 없이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프로이센의 안전보장과 독일 국가의 통일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오직 강력한 군대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857년 몰트케는 프로이센 참모부의 총지휘관으로 지명되었는데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 몰트케, 육군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의 위대한 삼두정치 시대가 개막되었다. 몰트케는 대규모의 병력 배치, 이동, 그리고 군사물자의 보급에 기여하게 될 철도수송의 중요성을 깨달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경직된 작전명령 대신에 '일반훈령체계'를 고안해냈고, 프로이센군 참모부를 새로운 조직체계로 재편성했는데 이 조직편성은 각국 군대의 현대화에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1870년 7월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근대화된 프로이센군의 효율성에 밀려 패전했다. 전투가 끝난 뒤 백작작위를 서임받은 헬무트 몰트케는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프로이센의 육군원수로 임명되었다. 퇴역한 몰트케는 크라이자우의 영지로 돌아갔고 1891년 4월 24일 베를린을 방문하던 도중 사망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 경력
  3. 육군 참모총장 시절
  4. 말년
몰트케(Helmuth von Moltke)
몰트케(Helmuth von Moltke)

개요

1858~88년 프로이센(후에는 독일)의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임하면서 덴마크(1864)·오스트리아(1866)·프랑스(1871)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초기 경력

정서가 불안했던 아버지는 메클렌부르크의 귀족이었고 뤼베크 자유시 출신이었던 어머니는 유서깊은 가문의 딸이었다.

갈수록 살림이 어려워져가는 가운데 건강한 편도 아니었던 몰트케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1805년 아버지가 홀슈타인으로 이주, 덴마크 국적을 취득함에 따라 몰트케는 코펜하겐 소재 왕립군사훈련단에 입학하게 되었고 졸업과 함께 덴마크군 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1821년 베를린을 돌아본 청년 몰트케는 프로이센 군대를 위해 봉사하기로 마음을 바꾸었고 1822년 근위기병연대 소위로 임관하여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에 배치되었다.

1823년 10월 몰트케는 3년 과정의 일반군사대학에 들어갔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1825년 여름 요양을 위해 바트잘츠브룬으로 옮겨갔다. 몰트케는 이 기간을 활용하여 근대 언어들을 습득했다. 이듬해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온 몰트케는 생활의 방편으로 창작활동에 착수했으며 1827년 소설 〈두 친구 Die beiden Freunde〉를 첫 결실로서 내놓았다. 1828년 5월 헬무트 몰트케는 베를린의 참모부 지형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1885년 〈폴란드 : 그 역사적 고찰 Darstellung der innern Verhaltnisse und des gesellschaftlichen Zustandes in Polen〉을 발표한 헬무트는 기번의 〈로마 제국 흥망사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번역해 달라는 출판업자의 청탁을 받아 거의 작업을 끝마쳤지만 완역본의 출간은 보지 못했다.

1832년 3월 몰트케는 참모부에 몸담게 되었고 이듬해 중위로 진급했다. 1835년이 저물어갈 무렵 술탄 마흐무드 2세를 도와 오스만투르크 군대의 현대화를 추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몰트케는 1836년 참모부의 지시에 따라 투르크군 장교로 복무하게 되었다(오스만 제국). 그는 이스탄불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발칸 반도 여러 곳을 두루 시찰한 뒤, 이집트의 시리아 침공에 대한 보복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투르크군에 합류하기 위해 1838년 아르메니아로 출발했다.

1839년 대(對) 이집트 공세의 실패는 몰트케의 조언을 무시한 투르크군 사령관의 실책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39년말 베를린으로 귀환한 몰트케는 투르크 체류 시절 씌어진 편지들을 모아 1841년 〈투르크 보고서 Briefe über Zustände und Begebenheiten in der Türkei〉를 출간하고 이듬해 4월 누이의 양녀였던 영국 소녀 메리 버트(1825~68)와 결혼했다.

그가 1843년에 철도의 진로결정에 대하여 발표한 소논문은, 그의 미래상에 비추어 〈러시아-투르크 전쟁 1818~1829 Der russisch-turkische Feldzug in der #128päischen Türkei 1818~1829〉(1845) 이상의 중요성을 함축하고 있었다. 1845년말 헬무트 몰트케는 병약한 왕자 하인리히의 전속부관으로 임명되어 로마로 향했으나 이듬해 왕자가 급사하자 로마 및 그 외곽지역에 대한 지형도 제작(1852 간행)과 〈로마 기행 Wanderungen um Rom〉(1879년 출간된 〈여행기 Wanderbuch〉 속에 수록)의 집필에 몰두했다.

하인리히의 시신을 싣고 프로이센으로 귀향하는 전함이 지브롤터에 도달했을 때 몰트케는 배를 떠나 육상으로 대륙종단을 시도했으며 〈스페인 일지 Tagebuchblätter aus Spanien〉(〈여행기〉에 수록) 속에 여행에서 얻은 경험과 감흥들을 옮겨놓았다. 다시 참모부에서 근무하게 된 몰트케는 자연국경이 없이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프로이센의 안전보장과 독일 국가의 통일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직 강력한 군대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고 독일 혁명(1848~49)이 진압되자 "최대의 적인 민주주의가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라는 환희에 넘친 서한을 동생에게 띄워 보냈다.(프리드리히 3세)1885년 당시 대령이었던 몰트케는 후일 프로이센의 왕이자 독일제국의 황제에 오르게 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의 전속부관으로 임명되었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러시아(1877년 〈러시아 일지 Briefe aus Russland〉 간행) 등지로 왕자의 여행을 수행했다.

1856년까지 그의 생활은 군사적인 성격과는 판이한 단조로운 일과와 황실내 행사준비로 일관되어 있었다. 몰트케의 실질적인 군복무 경력은 투르크에서의 체류기간이 전부였다.

육군 참모총장 시절

1857년 몰트케는 프로이센 참모부의 총지휘관으로 지명되었고 이듬해 임명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 몰트케, 육군장관 알브레히트 폰 의 위대한 삼두정치(三頭政治) 시대가 개막되었으며 장차 13년 이내에 유럽의 판도는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론). 몰트케가 참모총장으로 취임할 무렵 일련의 기술혁신은 전쟁의 개념을 새로운 차원으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독일). 1848년 이래 보병에 대한 후장식(後裝式) 격발 소총의 지급이 이루어져 거의 완료단계에 접어들었고 1861년부터는 후장식 대포의 보급이 시작되기도 했다.

신식병기 이상의 의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철도산업의 급속한 발전이었다. 몰트케는 대규모의 병력 배치, 이동, 그리고 군사물자의 보급에 기여하게 될 철도수송의 중요성을 깨달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때까지의 군대이동은 부족할 뿐 아니라 계절에 따른 여건 변화가 극심한 도로운송에 의존하여 왔었다.

따라서 각 군사령관의 주요 전략목표는 강력한 병력을 직접통제가 가능한 협소한 전장으로 집결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몰트케는 철도의 출현이 기존의 전쟁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많은 병력과 장비들에 대한 보다 신속한 배치가 가능해짐에 따라 협소했던 전장은 수백 마일에 달하는 기나긴 전선으로 바뀌게 되었고 소수부대에 의한 측면공격은 대규모 우회작전으로 대체되었다. 철도를 이용한 군수품의 보급으로 병사들은 일기에 상관 없이 전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신임 참모총장은 자신의 새로운 전쟁개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군사기술과 고도로 훈련된 참모장교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예컨대 기마장교의 좁은 시야는 병력·장비·군수품 등의 단위 운송물량을 산출해낼 수 있는 폭넓은 안목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또한 엄격한 규율하에 짧고 명확한 명령이 가능했던 종래의 군사조직이, 수백 마일에 걸쳐 수백만의 병력이 집결되어 있는 대규모 전선에서는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므로 군사통제의 면에서도 대단한 변화가 요청되었다.

몰트케는 경직된 작전명령 대신에 '일반훈령체계'를 고안해냈다. 총체적인 장기과업 훈령을 수령하게 된 군 지휘관들은 자신의 임무수행에 판단력과 이니셔티브를 발휘할 수 있는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받았다. 그가 처음 참모부에 배속되었을 당시만 해도 일선근무자들은 책상에 앉아서 쓸모없는 공상만을 일삼는 지휘 참모들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 그는 프로이센군 참모부를 새로운 조직체계로 재편성했고 이 조직편성은 각국 군대의 현대화에 본보기가 되었다.

몰트케의 전쟁이론과 그 방법론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를 둘러싼 덴마크와의 전쟁(1864)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적용되었으나 보다 본격적인 실험이 이루어진 것은 오스트리아 및 기타 연방들과 교전했던 1866년의 '7주전쟁'에서였다. 총 25만 6,000명의 프로이센 병력이 3군으로 나뉘어 거의 420㎞에 달하는 전선을 형성한 7주전쟁은 쾨니히그레츠(지금의 사도바)의 대승으로 끝을 맺었고 공로를 인정받은 헬무트 몰트케는 슐레지엔 소재 크라이자우에 자신의 개인영지를 사들일 수 있었다(쾨니히그레츠 전투). 7주전쟁의 승리는 새로운 전쟁방식에 대한 원로 장성들의 의구심을 가라앉혔다.

1866년 전쟁은 지휘참모들의 훈련부족, 정보활동의 부실과 같은 몇 가지 문제점들을 노출시키기도 했다. 참모총장은 부하동료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탕으로 결함의 시정에 힘을 쏟았고 마침내 1870~71년 새로운 전쟁이론의 정당성에 대한 최후의 검증을 얻어내게 된다. 7주전쟁의 실록의 집필을 위촉받은 몰트케는 1867년 〈1866년 전쟁 Der Feldzug von 1866 in Deutschland〉의 편찬을 완료했다.

1866년의 승리는 인접 강국 프랑스의 질시를 사기에 충분했고 나폴레옹 3세는 독일 문제에 관여하여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헛된 야망을 꿈꾸고 있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비스마르크 총리는 프랑스와의 일대 격돌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1869년말 몰트케와 육군장관 론은 "프로이센 군대는 일단 유사시에 프랑스군을 궤멸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자신감에 넘친 소견을 피력했다. 비스마르크는 특유의 외교적 수완으로 수개월 내에 나폴레옹 3세의 선전포고를 촉발시켰고 1870년 7월 마침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개시되었다. 참모총장 몰트케는 38만 4,000명의 막강한 병력을 3군으로 편성하여 전선에 배치했다.

프랑스군은 근대화된 프로이센군의 효율성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1870년 9월 2일 세당에서의 참패로 프랑스의 제2제정은 붕괴되었고 이듬해 1월 8일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독일제국의 출범이 만방에 선포되었다. 2월에 강화조약을 제의해온 프랑스는 1871년 5월 별다른 저항 없이 비스마르크의 조건들을 받아들였다. 세당 전투가 끝난 뒤 백작작위를 서임받은 헬무트 몰트케는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프로이센의 육군원수로 임명되었다.

말년

1871년 이후로도 몰트케는 17년 동안 참모총장직을 수행했으며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의 얼마 동안은 러시아 및 프랑스와 전쟁을 재개해야 할지도 모르는 예측불허의 상황을 맞아 가상공격에 대비한 방어계획의 수립에 몰두했다.

그러나 1888년 8월 고령의 몰트케는 참모총장직에서 사퇴하게 되는데, 새로 등극한 빌헬름 2세의 이념이나 통치방식에 공감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이미 오래 전에 알프레트 폰 발더제 장군을 후임자로 내정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역한 몰트케는 크라이자우의 영지로 돌아갔고 1891년 4월 24일 베를린을 방문하던 도중 사망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그을린 얼굴의 몰트케는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을 언제나 잃지 않았다. 그의 탁월한 지성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예리함이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수개 국어(적어도 독일어·덴마크어·프랑스어·영어·이탈리아어·투르크어를 구사했으며 슬라브어와 이베리아어 가운데 1가지를 이해할 수 있었음)에 능통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던 까닭에 "7개 국어로 침묵하는 사나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대화 속에서 경솔함이나 무례함을 찾아볼 수 없었던 그는 "주변에 적들을 만들지 않는 진정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동료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애정 넘치는 결혼생활이었지만 불운하게도 자녀가 없었다. 몰트케는 19세기 독일 산문의 대가로 거론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