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기번

에드워드 기번

다른 표기 언어 Edward Gib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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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37. 5. 8(구력 4. 27), 영국 서리 퍼트니
사망 1794. 1. 16, 런던
국적 영국

요약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로마 제국 쇠망사》의 저자로 유명하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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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생애
    1. 어린 시절
    2. 대학 진학
    3. 프로테스탄트로의 복귀
    4. 로마 제국에 대한 관심의 시작
  3. 평가
  4. 로마 제국 쇠망사
    1. 출간 과정
    2. 구성과 평가

개요

2세기부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멸망까지의 로마 역사를 다룬 〈로마 제국 쇠망사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6권, 1776~88)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기번(Edward Gibbon)
기번(Edward Gibbon)

생애

어린 시절

할아버지인 에드워드는 재산을 상당히 모았고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의 아버지도 별 어려움 없이 사회생활과 의정(議政) 활동을 했으며 독일계 가문 제임스 포르텐의 딸 유디스를 아내로 맞았다. 에드워드 기번 역시 일생을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지낼 만한 재산이 있었다. 그는 7명의 자녀들 가운데 맏아들이자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이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어릴 때 죽었다.

어린시절은 투병생활의 연속이었으며 생명이 위태로운 적도 몇 번 있었다.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이모 캐서린의 양육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기번은 그녀를 '내 마음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1747년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거의 전적으로 이모의 보살핌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독서광이었으며 학교교육을 아주 불규칙하게 받은 까닭에 독서 취미에 더욱 깊이 빠질 수 있었다. 퍼트니에 있는 주간(晝間)학교를 다닌 뒤 1746년 킹스턴 그래머 스쿨에 다녔으며 거기에서 "많이 울고 피땀도 좀 흘린 대가로 라틴어 구문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고 〈회고록 Memoirs〉에서 말했다. 1749년 웨스트민스터학교에 입학했으나 1750년 건강을 위해 바스와 윈체스터로 갔다. 학교로 돌아가려던 일이 안되어 다음 2년 동안은 가정교사들과 함께 지냈으나 그들에게서 배운 것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 시골의 여러 집을 방문했으며 오래된 책들로 가득찬 도서관들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기번은 12세 때 지식이 가장 많이 성장했다고 하며 이때 이미 자기에게 '꼭 맞는 음식', 즉 역사를 발견했다고 〈회고록〉에 쓰고 있다. 일찍이 14세 때 나중에 걸작을 남기게 될 주된 분야들을 섭렵하는 한편, 연대기의 어려운 문제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어린 시절 학습의 기본 방침은 스스로 해나가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모의 지도를 받은 것을 제외하면 기번은 자신의 지적인 성향대로 혼자서 고독하게 공부했으며 이런 특징은 일생을 통해 계속되었다. 기번의 위대한 작품은 다른 학자들의 자문을 전혀 받지 않고 쓴 것이어서 그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대학 진학

기번은 〈회고록〉에서,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갑자기 건강이 좋아졌고 그뒤로 일생동안 건강했다고 말한다. 그는 힘이 세거나 활동적이지는 못했고 작은 키에 마른 체격이었으며 나이가 들어서는 뚱뚱해졌다. 건강이 좋아지자 아버지는 그가 옥스퍼드의 모들린 칼리지에 들어가도록 갑작스럽게 결정했다. 그는 15세 생일 3주 전인 1752년 4월 3일 학교에 들어갔다. 이제 그는 법적으로 독립된 성인이 되었다.

그러나 대학은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심지어는 출석하는지 여부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옥스퍼드에 걸었던 면학의 기대는 모두 어긋났다. 외로운 기번은 신학에 관심을 돌렸고 독서를 통해 로마 가톨릭 신앙에 빠지게 되었다. 단지 지적인 욕구를 위한 개종이었으나 가톨릭 신자로 행동했다. 그는 1753년 6월 8일 런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성체성사를 받았다.

가톨릭교도가 됨으로써 기존의 법률로는 모든 공직과 관직을 얻을 자격을 스스로 포기해버린 아들의 처사에 격노한 아버지는 그를 급히 로잔으로 보내 칼뱅주의 목사 다니엘 파비야르의 집에서 지내도록 했다. 환경이 완전히 변했고, 엄격한 감시 아래 자유로운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 채 매우 불쾌한 마음으로 지냈지만, 기번은 나중에 이 시기에 대해 고마운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그는 파비야르에게서 친절하고 훌륭한 지도를 받아 규칙적으로 공부하는 습관을 키울 수 있었으며 방대한 분량의 라틴 고전 문학을 완벽하게 익히고 수학과 논리학을 공부했다. 또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에 정통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런 공부를 통해 기번은 상당한 학식을 갖춘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명문장가가 되었다. 그는 첫 작품 〈문학연구론 Essai sur l'étude de la littérature〉(1761)을 프랑스어로 썼다.

프로테스탄트로의 복귀

부모의 엄격한 감시가 계속되었으므로 생각 끝에 결국 가톨릭 신앙을 버렸다. 이후 그는 1754년의 성탄절 프로테스탄트 성찬식 참여를 공식적으로 허락받았다. "바로 그때 나는 종교 탐구를 중단하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공통으로 채택하고 있는 교리와 의식을 따랐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로잔에서의 생활 후기에는 볼테르의 파티에도 참석하고 젊은 스위스인 조르주 데베르댕과 지속적인 우정을 맺는 등 로잔의 사교계를 자유롭게 드나들었으며 대단히 매력있고 지적인 목사의 딸 수잔 퀴르쇼와 사랑에 빠져 약혼도 했다.

기번이 21세 생일을 맞기 바로 전인 1758년 아버지는 그를 고향으로 불러 300파운드의 연금(年金)을 떼어주었다. 아버지와 계모가 그의 약혼을 끈질기게 반대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파혼하고 난 뒤 그는 끝까지 독신으로 지냈다("나는 연인으로서는 탄식했고 아들로서는 복종했다"). 헤어진 뒤 얼마 동안 기번과 퀴르쇼의 관계는 서먹서먹했지만 그들은 일생 동안 친구로 지냈다.

그녀는 루이 16세 때 프랑스 재무장관을 지낸 자크 네케르와 결혼했다. 다음 5년 동안 기번은 폭넓게 독서를 했고 역사책에서 다룰 수 있는 많은 주제들을 생각했다. 1760~62년에는 햄프셔 주의 시민군으로 향토 방위 의무를 이행해야 했기 때문에 연구 활동에 상당히 지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대위로서 양심적으로 자기 의무를 다했고 사람들과 병영 생활을 한 경험은 뒷날 역사가로서 자신에게 유익했다고 말했다.

1763년 1월 25일 기번은 영국을 떠나 파리에서 얼마 동안 지내면서 드니 디드로, 장 르 롱 달랑베르 등 몇몇 철학자들과 사귀었다. 그해 가을과 겨울에는 로잔에서 연구도 하고 즐기기도 하면서 나중에 셰필드 경(卿)이 된 존 베이커 홀로이드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뒤에 기번의 유저(遺著) 관리자가 되었다.

로마 제국에 대한 관심의 시작

1764년에 기번은 로마로 가서 고대의 제도와 풍습을 철저히 연구했다. 1764년 10월 15일, 로마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폐허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로마의 쇠퇴와 멸망에 관해 글을 써야겠다는 영감이 떠올랐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역사를 쓰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했다.

영국에 돌아와 지낸 그 다음 5년은 기번의 생애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기간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의존해 있었고, 나이가 30세가 다 되었는데도 이루어놓은 것이 거의 없었다. 역사 서술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지만 명확하게 주제를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 프랑스 문명이 유럽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 프랑스어로 스위스 자유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지만 중도에서 그만두었다.

1768~69년 기번과 데베르댕은 2권으로 된 〈대영제국의 문학에 관한 연구 Mémoires littéraires de la Grande Bretagne〉를 출판했다. 1770년에 기번은 〈아이네아스 제6권에 대한 비판적 고찰 Critical Observations on the Sixth Book of the Aeneid〉을 간행해 어느 정도 주목을 끌었다.

1770년 아버지가 유언을 남기지 않은 채 죽은 뒤 2년간의 지루한 사후 처리를 마친 기번은 런던의 벤팅크 가(街)에 정착해 로마사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상류사회 여러 클럽에 가입했고 문인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알려졌다. 1775년 '문인 클럽'의 회원으로 뽑혔는데, 이 클럽은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가 작가이자 사전 편찬자인 새뮤얼 존슨 박사를 중심으로 조직한 화려한 단체였다.

그는 클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레이놀즈와 연극배우 데이비드 개릭과 친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뮤얼 존슨은 그를 싫어한 듯하며, 존슨의 전기를 쓴 제임스 보즈웰도 드러내놓고 기번을 미워했다. 한편 기번은 의회에도 진출해(1774) 총리인 노스 경을 조용하고 꾸준하게 지지했다.

평가

최근의 역사 지식은 기번이 다루었던 분야만 해도 두드러지게 늘어났다. 경제사·사회사·헌정사 연구도 발전했고 동전·비문 연구를 비롯해 고고학 전반에도 커다란 수확이 있었다. 또 무엇보다 문헌사료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기번은 이런 과학적인 조사 방법은 알지 못했지만 종종 체계적인 연구를 앞지르는 듯한 번뜩임과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는 대단한 천재였지만 끊임없이 성실하고 정확하게 사료를 참고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공감하지 않았지만, 성품이 공정하고 결백했기 때문에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라하더라도 정직한 의견과 진실성은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자질들은 역사를 보는 뛰어난 안목과 훌륭한 문체로 인해 더 두드러졌다. "독서를 한다면 반드시 기번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어떤 근대 역사가의 말이나 케임브리지대학의 위대한 역사가 J. B. 베리의 다음과 같은 결론은 기번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 할 수 있다. "기번이 여러 부분의 세부적인 내용과 몇몇 중요한 분야에서 시대에 뒤져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와 우리 선조들이 전적으로 무능한 세계에서 살아오지는 않았음을 뜻할 뿐이다. 전반적인 면에서 그는 여전히 '시대'를 초월해 있는 우리의 스승이다."

로마 제국 쇠망사

출간 과정

4절판으로 된 이 책의 첫권은 1776년 2월 17일 간행되었으며 그리스도교의 흥기(興起)를 심하게 비꼬면서 다룬 마지막 두 장(章) 때문에 약간의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곧바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기번의 논법은 여러 면에서 반박을 받았는데 그가 살아 있을 때와 또 죽은 뒤에도 그의 회의론(懷疑論)이 기존의 제도를 위협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사람들은 그를 공격하고 인격적으로 비난했다.

19세기에 기번은 호전적인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에게 투사로 환영받았지만, 그 자신은 호전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볼테르처럼 "파렴치한 것은 쳐부셔라!"(Écrasez l'Infâme!)고 외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영국과 스위스의 교회체제에서 아무런 위험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과거의 역사였다. 어떤 이는 그가 신의 계시를 믿지 않았으며, 또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공감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지도 모른다. 기번이 초자연적인 것을 비꼬기는 했지만 그것은 종교를 인간의 경험이라는 현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기번의 계승자들은 그의 주장에 동의했으며, 또한 그리스도교가 성장하게 된 여러 이유로 기번이 지나쳐 버렸거나 알지 못했던 것들, 예를 들어 로마 제국의 다양한 신비종교(특히 미트라교)를 덧붙여 들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기번의 생각은 주로 15장과 16장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제국의 붕괴와 관련해 그리스도교 신학과 교회주의의 발전을 추적한 나머지 장들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음 책들을 준비하는 동안 그는 먼저 나온 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고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용모가 볼품없었으면서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탓에 더욱 공격의 표적이 되었지만 기번은 대체로 그들의 비판을 묵살했다. 그러나 자신이 들었던 역사적 증거가 왜곡되어 있다고 비난한 사람들에게만은 〈로마 제국 쇠망사의 제 15·16장에 있는 몇몇 구절을 옹호함 A Vindication of Some Passages in the Fifteenth and Sixteenth Chapters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1779)에서 신랄하게 응수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흄과 윌리엄 로버트슨은 기번을 자신들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자신들과 같은 수준의 역사가로 인정했다. 같은 해에 기번은 무역과 열대농업 감독관이라는 수입이 좋은 한직(閑職)을 얻었다. 그뒤 얼마되지 않아 영국 정부의 아메리카 정책에 대한 유럽 여러 나라의 비판에 답하여 정부 입장에서 쓴 명문(名文) 〈증거문서 Mémoire justificatif〉(1779, 영역 1780)를 썼다.

1781년에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다룬 〈로마 제국 쇠망사〉 제2권과 제3권을 간행했다. 당시 기번은 잠시 저술을 멈추고 로마사 연구를 계속할 것인지 여부를 깊이 생각했다. 그러나 1782년에 노스 경의 내각이 해산되고 그의 감독관직도 곧 폐지되어 수입이 상당히 줄어들자 절약하기 위해 영국을 떠나 로잔에 있는 한 집에서 데베르댕과 함께 살게 되었다. 기번은 그곳에서 〈로마 제국 쇠망사〉를 3권 더 저술해 1787년 6월 27일에 완결지었다. 그는 곧 원고를 들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 3권은 1788년 5월 8일 기번의 51세의 생일에 출판되었으며 이 대작(大作)의 완성은 모든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다.

로잔으로 돌아온 뒤 기번은 주로 〈회고록〉을 쓰는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1789년에 데베르댕이 죽고 곧 이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으며 그에 따라 스위스가 침공을 받으리라는 우려가 일어나 그의 행복한 생활은 깨졌다. 게다가 그는 매우 살이 쪘고 건강도 나빠지고 있었다. 1793년 셰필드 부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기번은 곧바로 영국으로 돌아갔고 이 여행으로 병이 악화되어 런던의 성 제임스가(街)에 있는 어떤 집에서 죽었다. 유해는 서섹스 주 플레칭 교회에 있는 셰필드 경의 가문 납골당(納骨堂)에 안치되었다.

구성과 평가

〈로마 제국 쇠망사〉는 분량은 같지만 논법에서 불가피하게 서로 다른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3권은 480년경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약 300년간을 다루고 있고 다음 3권에는 거의 1,000년이 압축되어 있다. 그렇지만 로마 제국이 길고 다양한 진로를 거치면서도 단일 국가로 남아 있었다는 개념 덕분에 이 책은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기번은 로마의 멸망을 그가 고전문학에서 발견했던 정치적, 심지어는 지성적인 자유의 이념으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지는 과정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신의 서술에 더한층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예전에 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로마의 물질적 쇠퇴는 도덕적 퇴락의 결과이자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책의 전반부를 이루는 서로마 역사에는 아주 잘 들어맞지만, 이를 후반부에까지 적용한 탓으로 심각한 결함이 생겼고 명백한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동로마 제국의 긴 역사가 끊임없는 쇠퇴의 과정이라고 주장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1,000년 동안 동부 유럽의 방파제로서 서 있었다. 사실 기번은 비잔틴 문명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며 라틴어 사료(史料)만큼 그리스어 사료에 능숙하지 못했고 후대의 학자들이 모은 여러 언어로 된 막대한 양의 자료들을 읽지도 못했다. 그결과 요약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도 있고 빠진 부분도 많았다.

그러나 책의 후반부는 기번의 뛰어난 재능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기번의 아주 유명한 장(章)들이 들어 있는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삼위일체 논쟁, 이슬람교의 흥기, 로마법의 역사에 관한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고 콘스탄티노플의 마지막 포위와 함락에 관한 생생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도 책의 후반부에 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여러 세력들을 명료하면서도 능숙하게 다루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로마에 대한 글인 맺음말에서 기번은 오랜 쇠퇴의 과정은 끝났고 인류는 지적(知的) 자유를 회복할 전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지적 자유의 옹호는 역사가로서 기번이 지닌 목표 가운데 큰 부분을 차지한다. 책의 끝부분에 "나는 야만주의와 종교의 승리를 서술했다"라고 쓴 것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쇠퇴 원인들에 대한 그의 견해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로마 세계의 쇠망은 도덕적 타락에 그 원인이 있다는 그의 지적은 논박할 여지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리스·로마의 멸망을 진보라고 보아야 하는가 혹은 퇴보라고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기번은 18세기 중반의 '철학자'로서 글을 썼기 때문에 이를 퇴보라고 보았고, 그의 이런 평가는 계속 관심을 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