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존슨

새뮤얼 존슨

다른 표기 언어 Samuel Johnson
요약 테이블
출생 1709. 9. 18(구력 9. 7), 잉글랜드 스태퍼드셔 리치필드
사망 1784. 12. 13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시인·비평가·수필가·사전편찬자.

목차

접기
  1. 존슨의 초기생애
  2. 존슨의 전성기
  3. 라셀라스
  4.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과의 만남
  5. 존슨의 스코틀랜드 여행
  6. 존슨의 말년
  7. 존슨에 대한 평가
존슨(Samuel Johnson)
존슨(Samuel Johnson)

가난하지만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새뮤얼 존슨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지만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옥스퍼드대학교 펨브로크 칼리지를 중퇴해야 했다. 이후 작은 기숙학교를 세웠다가 실패하고, 런던에서 잡지사의 기고자·편집위원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런 가운데 존슨은 시집을 내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새뮤얼 존슨이 쓴 〈영어사전〉은 8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업한 것으로 사전 역사상 최고의 전형과 편집기술을 갖춘 작품이었다. 생활이 궁핍해 글을 쓰기도 했던 존슨은 일주일 만에 쓴 작품 〈라셀라스〉가 세계적으로 번역될 만큼 유명해졌다. 존슨은 1762년부터 국왕의 연금을 받게 되어 더 이상 생계를 위한 글은 쓰지 않아도 되었다.

생애 후기에는 〈셰익스피어 작품집〉 전8권과 비평적 전기 〈영국 시인들의 생애〉 전10권을 완간했다. 새뮤얼 존슨은 셰익스피어 이후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저술가였을 뿐 아니라 당대의 뛰어난 '재담가'이자 사상가였다.

존슨의 초기생애

아버지 마이클 존슨은 리치필드의 명망 있는 시민으로 그가 태어날 무렵 그 도시의 치안판사였다.

서점 주인이었던 아버지는 중요하긴 해도 그다지 돈벌이가 되지 못하는 일을 했다. 새뮤얼은 건강한 아이는 아니었다. 시력이 약했고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결핵을 앓기도 했다.

아버지는 프랑스에 망명해 있는 제임스 왕에게 동조하는 고교회파(高敎會派)였고, 어머니 새라 포드는 칼뱅주의에 경도된 경건한 여성이었다. 어머니는 존슨에게 축일 집도문(集禱文)을 외우도록 가르쳤고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설명했다. 1717년 존슨은 리치필드 그래머 스쿨에 입학해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동창생 가운데 에드먼드 헥터는 존슨과 평생 우정을 나누게 되는데 나중에 존슨의 '보기 드문 학습능력'을 회상하며, "책에 대한 열의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남보다 돋보이고자 하는 야심이 대단했고, 계산을 몹시 싫어해서 마지막까지 연습문제를 미루곤 했다"고 썼다. 이러한 성향은 존슨의 오랜 문필활동에서도 계속 남아 있던 것이었다.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존슨은 교장의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학자였지만 '교수대에서 구해내기 위해' 아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폭군이었다.

존슨은 나중에 "교장은 나를 아주 잘 때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잠시 스타워브리지에 있는 그래머 스쿨의 학생으로 저학년 학생의 교육에 관여했다가 서점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예비 학자로서의 본능을 가진 그는 아버지의 서가를 돌아다니면서 광범위한 독서를 했다. 1728년 옥스퍼드대학교의 펨브로크 칼리지에 입학할 무렵에는 대학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작품들에 익숙해 있었다.

그가 처음 지도교수인 윌리엄 조던을 만났을 때 그는 라틴어 문법학자이며 철학자인 마크로비우스를 인용하면서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존슨은 조던의 학식을 별로 칭찬하지 않았으나 선량한 마음씨를 높이 샀다. 존슨에게 더 중요했던 인물은 펨브로크의 특별연구원이었고 나중에 학장이 된 윌리엄 애덤스로서 그와는 여러 해 동안 친구로 지냈다.

같은 세대의 학부생 가운데도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오랜 교우로 크라이스트처치 애슈번의 존 테일러와 가까웠고, 펨브로크 친구들 가운데 명랑하고 유쾌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로 꾸며낸 명랑함이었다. 가난 때문에 좌절하고 고통스러웠던 그는 권위를 무시하고 '문학과 재치로 싸워나가리라 생각'했다. 학부시절의 학자적 재능이 보이는 예로서 알렉산더 포프의 〈메시아 Messiah〉를 라틴어로 번역했으며, 이것은 1731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출판된 〈잡록 Miscellany〉에 수록되어 있다.

가난한 마이클 존슨이 어떻게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아마 존슨 부인이 받게 된 적은 유산이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존슨은 13개월 후인 1729년 12월 옥스퍼드대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그의 미래는 불안했다. 그는 학위도 없었고 다른 자격증도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기울어갔고 스타워브리지에 지망한 보조교사직도 얻지 못했다. 1731년말 아버지가 죽었고 이듬해 그는 마켓 보스워스에 있는 그래머 스쿨의 하급교사 자리를 수락했다. 이 직책으로 인해 그는 건강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했으며, 집주인 울프스탠 딕시 경의 거만한 태도로 인해 몹시 분개했다.

버밍엄에서 외과의사가 된 오랜 친구 에드먼드 헥터의 도움을 받아 제롬 로보 신부의 〈에티오피아 여행 A Voyage to Abyssinia〉 프랑스어판을 영역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침략당한 나라의 원주민에게 본능적인 공감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에티오피아의 침략자들은 손에 칼을 들고 복음을 설교했던 선교사들이었다. 또한 이미 이 서문에서 존슨 특유의 산문체를 맛볼 수 있다.

존슨은 버밍엄에 체류하면서 그의 첫번째 저서로 5기니 남짓의 돈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포목상 해리 포터의 미망인 엘리자베스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그녀는 존슨보다 20세 연상이었으므로 상호간의 애정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나중에 존슨은 아내의 아름다운 금발머리에 대해 말하곤 했다. 아내는 존슨의 외모에 대해 다소 불만이 있었으나 최소한 그의 화술을 높이 샀다. 1735년 더비에서 결혼식을 했으며 신부는 700파운드 상당의 지참금을 가져왔다. 리치필드 교회법정의 힘을 얻은 존슨은 리치필드 교회법정 서기였던 친구의 격려로 리치필드 근처 에디알에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기숙학교를 설립했다.

세심한 교과과정을 준비했으나 데이비드 개릭을 포함한 몇 명만이 입학했을 뿐, 2년이 지난 후에는 실패를 인정해야만 했다. 나쁜 건강과 우울증, 학위도 없고 학교도 망했지만 학자와 작가로서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구는 항상 남아 있었다. 결혼 전 〈젠틀맨스 매거진 Gentleman's Magazine〉의 발행인에게 적당한 시와 논문, 고대 및 현대 작가들에 대한 평론 등을 게재할 용의가 있다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을 뿐더러, 더욱이 에디알에서 시간이 많아 친구들의 격려로 다시 비극을 쓰기 시작했는데, 〈터키의 역사 General History of the Turks〉는 리처드 놀스가 전해주었던 술탄 메메드 2세와 아름다운 그리스 처녀 아이린의 이야기에 근거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끝내 완성하지 못했고, 존슨은 편집자나 서적상이 돈을 지불할 만한 글을 써야 했기에 런던에서 일거리를 찾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737년 3월 데이비드 개릭과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

〈젠틀맨스 매거진〉이 처음으로 그에게 사소한 일거리를 맡겼다. 발행인 에드워드 케이브는 재빨리 존슨이 지닌 언론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했고, 존슨은 산문과 운문으로 된 일련의 간단한 전기뿐 아니라 송시·경구시·서평 등의 많은 글을 기고했다.

1737년말 다시 리치필드로 돌아와 비극 〈아이린 Irene〉을 끝내고 아내를 런던으로 데려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일시적인 잡지 기고물 이상의 가치 있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야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1738년 최초의 중요한 시 〈런던 London〉이 출판되었다. 이 시는 유베날리우스의 3번째 작품 〈풍자집 Satire〉을 모방하여 씌어진 것으로, 정치적 부패와 런던 거리의 위험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고 좀더 예리한 개인적 감정을 담아 가난한 무명작가의 불행을 그리고 있다.

익명으로 출판된 〈런던〉은 즉각 성공을 거두어 곧 3판을 찍었고 알렉산더 포프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존슨의 배당금은 10기니뿐이어서 그는 또 '서적상들을 위해 번역하느라 굶어 죽는' 대신에 교사가 되어볼까 생각했다. 레스터셔의 애플비 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딴다는 조건하에 교장직을 제의했으나, 옥스퍼드에서나 더블린에서는 학위수여를 거부했다. 또한 법학 학위가 없었으므로 변호사 개업도 할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좌절기에 월폴 정부에 대한 가장 격렬하고 풍자적인 2편의 비평이 나왔다.

첫 작품은 〈노퍽의 대리석 Marmor Norfolciense〉(1739)인데, 이것은 월폴의 고향 노퍽에서 발견되었다고 여겨졌던 라틴 운율시를 다룬 평론이고, 2번째는 〈무대 감찰의 옹호 A Compleat Vindica- tion of the Licensers of the Stage〉(1739)로, 헨리 브룩의 희곡 〈구스타프 바사 Gustavus Vasa〉에 대한 탄압을 비꼬아 옹호하는 글이었다.

2편의 풍자는 권위에 도전하고, 그가 옥스퍼드에서 분투했듯이 노력하는 성난 젊은이의 저항이었다. 존슨은 결코 감상적인 재커바이트는 아니었으나 하노버 왕가에 대한 경멸을 〈노퍽의 대리석〉보다 더 통렬하게 묘사한 작품은 없다.

존슨 체포령이 내렸다는 이야기는 결코 확인된 적이 없으나, 케이브의 편집위원으로서 당시의 정치를 다룰 때는 좀더 온건한 문체를 사용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젠틀맨스 매거진〉은 1732년부터 의회의 논쟁을 특집기사로 다루어왔지만, 존슨이 런던에 도착한 직후 하원에서 그 잡지의 발간을 금지했다.

그러나 케이브는 〈릴리푸트 대국(大國) 상원의 논쟁 Debates in the Senate of Magna Lilliputia〉으로 출판을 계속하려고 생각했다. 처음에 존슨은 잡지를 편집하고 확충하는 일을 돕기 위해 고용되었으나, 1740~43년 〈논쟁〉은 완전히 존슨의 작품이었다. 그는 현대적 의미의 보도 기자가 아니었고 하원에 가본 것도 단 한번 뿐이었다. 때때로 그는 다른 보도기자들이 보내준 기록을 사용했고 때로는 논쟁의 주제와 연설가의 이름만 알았다. 또한 그는 〈논쟁〉이 단지 자기 자신이 꾸며낸 것이라고 고백했고, 나중에는 마음대로 지어낸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신문기사용 작품으로 그것들은 대단한 걸작들이었다. 그는 세인트 존스 게이트에 있는 케이브의 사무실에 들어앉아 한 시간에 3편의 글을 써서 〈매거진〉에 보냈다. 그는 토리당에 반대하는 휘그당의 앞잡이들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면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함으로써 그의 활동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보고서는 치고받는 논쟁의 기록이라기보다는 문제의 양면에 대한 주요한 기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논쟁의 마지막에 자리에서 물러나는 월폴의 입에서 나온 짤막한 연설은 품위와 절도를 가지고 자신을 방어하는 수상에 대한 훌륭한 객관적 기록이다.

런던에서 존슨의 가장 친한 친구는 리처드 새비지였다.

새비지는 배우·극작가·시인이었다. 그는 귀족 출신이라고 주장했으며 신분 높은 친구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환대를 끊임없이 경멸했다. 두 사람이 공유하던 최소한 2가지 성질은 가난과 월폴 행정부에 대한 애국적인 분노였다. 그들의 형편이 최악일 때 그들은 '두 사람이 벌었던 돈을 모두 합해도 다락방의 더러운 휴식도 구할 수 없을 때는 웨스트민스터 광장을 배회'하면서 밤을 보냈다. 새비지가 죽었을 때 존슨은 즉시 친구를 애도하는 작품을 썼다.

애정과 열광으로 씌어진 〈리처드 새비지의 일생 An Account of the Life of Mr. Richard Savage, Son of the Earl Rivers〉은 1744년 익명으로 출판되었고 존슨의 산문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대중을 매료시켰다. 5년 후 〈톰 존스 Tom Jones〉를 발표했던 소설가 헨리 필딩은 그 작품을 인간성의 우수성과 결점에 대해 언어로 씌어진 최고의 글이라고 격찬했다. 영국 최고의 화가인 조슈아 레이놀즈는 당시 21세였는데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존슨의 전성기

다양한 잡문에 덧붙여 존슨은 셰익스피어로 관심을 돌렸다.

1745년 그는 자신이 편집할 희곡집의 예비 설명과 더불어 〈맥베스 고찰 Miscellaneous Observations on the Tragedy of Macbeth〉을 출판했으나, 영어사전을 편찬해달라는 제안을 받자 셰익스피어 작품에는 더이상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서적상 조합이 그러한 거대한 사업을 위해 존슨을 선택했다는 것은 런던에 9년 있는 동안 그가 담당했던 역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뜻이다. 같은 시기 내내 데이비드 개릭은 좀더 빠르고 화려한 출세를 했다. 무대를 위해 법률을 버린 그는 1741년 배우로서 재능을 인정받았고 1747년에 드루어리 레인 극장의 경영자가 되었다.

개릭이 경영하던 때 첫 연극의 서막을 존슨이 썼고, 비록 존슨이 보통 배우나 그 직업에 대해 경멸투로 이야기하긴 했으나 우정을 위해 그들의 입장을 기꺼이 옹호했다. 더욱이 이때 존슨은 연극 공연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을 때였다. 그는 비극 〈아이린〉을 출판하거나 상연할 사람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개릭이 힘을 갖게 되자 옛 스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생각했고 〈아이린〉은 1749년 '동양의 위엄을 보이며' 9일 밤 내내 공연되었다.

근본적으로 도덕군자의 극이었던 이 작품은 보편적으로 칭찬을 받긴 했으나 결코 재공연된 적은 없다.

좀더 오래 지속된 것은 2번째 교훈시 〈헛된 소망 The Vanity of Human Wishes〉(1749)인데 이 작품은 갈릴레오, 울지, 스웨덴의 카를 12세 등의 일생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야심의 위험, 군사적 정복의 무위성, 글쓰기의 고통을 드러냈다.

출판 당시에는 〈헛된 소망〉이 〈런던〉보다 훨씬 덜 팔렸으나 〈헛된 소망〉이야말로 그의 걸작 시였다. 이 시의 양식은 그당시에 유행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뿐 아니라 현대의 학자·철학자·정치가·국왕 등의 진술을 다양하게 그려낸 점이 '고상한 진지함'을 불러일으켜 시에 보편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환멸의 기록만이 시의 목적은 아니다. "가련한 자는 남모르게 주저앉아 운명의 소용돌이를 따라야만 하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람은 그리스도교도의 사랑과 희생과 믿음을 간구해야만 한다고 존슨은 말하고 있다.

1746년 〈영어사전 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의 계약이 체결되었고, 다음해 존슨은 〈영어사전 계획서 Plan of 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를 출판했다.

그는 서적상들의 제의에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 그를 가두어놓을 수는 없었다. 1750년 그는 1주일에 2회 발행되는 〈램블러 The Rambler〉지에 착수했다. 익명의 수필 1편이 담긴 2페니짜리 〈램블러〉는 존슨의 문학접근방식을 평가하려 한다면 근본적으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글이다.

이 작업에 착수하기 전 그는 신의 영광과 자신이나 타인의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간단히 말해 만담가라는 의미의 '램블러'는 흥행사가 아니라 교육자여서 19세기의 비평가들은 그의 글을 평신도의 설교라고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존슨은 그의 첫 클럽인 아이비 레인 클럽을 만든 그즈음 술집 의자에 앉아 스스로 '말하는 즐거움'이라고 부른 것에 지대하게 공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쇄물은 '좀더 정확한 생각과 좀더 다듬어진 아름다움'을 요구했다. 말이란 당연히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인쇄된 낱말에는 도덕가의 책임이 따른다. 세상을 개선시키는 것을 작가의 의무로 보는 것이 바로 존슨의 문학적 신념 중 기본적인 항목이다. 이 책임감이 수필의 문체를 결정했다. 그는 에디슨이나 스틸이 〈스펙테이터 The Spectator〉에서 그려낸 로저 드 코벌리 경과 같은 인물을 창조하지 못했고, 그의 글들은 당대의 사건이나 문학과 거의 관련이 없었다. 반면 그의 글에는 자주 당대의 사회적·문학적 상황들이 반영되어 있다. 그 안에는 대가나 지나치게 가정적인 부인에 대한 경멸, 매춘부 생활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 강도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나타나 있으며, 언론인의 운명을 음산한 유머로 그린 것도 불가피한 일이다.

더욱이 그것들은 인간의 좌절과 폐쇄된 의지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준다. 최근에 지적되고 있듯이 존슨의 작품은 똑같은 언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20세기 이전의 프로이트 이론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램블러〉는 1750~52년에 걸쳐 1주일에 2번 발행되었다. 마지막 호가 나오고 며칠 후 아내가 죽자 존슨의 고질적인 우울증이 더욱 깊어졌다. 그의 결혼생활은 추측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일찍이 런던에 살던 때 존슨의 친구 중 누구도 존슨 부인을 만난 적이 없었던 것 같고 그녀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으나, 상호 존중과 애정에 근거한 결혼생활이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부터 존슨 부인은 남편의 언변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램블러〉에 대해 특별한 존중심을 가지고 있었다. 존슨 편에서도 그녀의 합리적인 희극 독법을 높이 샀다. 그러나 가정적으로 두 사람은 잘 맞지 않았다. 존슨은 가사에 부주의하고 정리정돈을 못했으면서 음식에 대해서는 까다로웠다. 좀더 심각한 점은 말년에 존슨 부인이 술과 약물에 중독되어 남편의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존슨의 기도나 그녀의 죽음에 대한 명상 등을 살펴보면 이러한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슨의 애정은 다소 연민의 정을 띠면서 변함없이 남아 있었다. 1753년 4월 22일 "사랑하는 테티의 기억을 잊지 않으면서 새로운 아내를 찾으려고 애쓰자"라고 쓴 글이 발견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변치 않는 애정은 여전했다. 새 아내를 구하는 그의 탐색이 누구를 향하고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나중에 그가 경험에 대한 희망의 승리라고 표현했던 모험을 생각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존슨은 30년 후 브롬리 교구 교회의 묘비 위에 테티를 "아름답고, 우아하고, 영리하고, 경건한 여인"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말했던 묘비명을 쓰는 데 있어 굳이 진실을 서약할 필요는 없다.

1752년 존슨은 외로웠으나 몇 명의 좋은 친구를 사귀었다.

아이비 레인 클럽에서 그는 "자유롭고 편안한 감정적 교류를 나누면서 몇 시간씩 즐겁게 보냈는데, 그렇지 않았더라면 집에서 고통스러운 회상에 빠져 있었을 것"이었다. 10명의 회원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존슨의 전기작가인 존 호킨스, 존슨도 몇 편의 글을 기고한 〈어드벤처러 The Adventurer〉의 편집자 존 호크스워스, 어린 날의 친구로 그의 장례식까지 참석한 존 라이랜드, 〈램블러〉의 발행인 존 페인, 존슨이 가장 사랑했던 의사 리처드 배서스트 등이 있었다.

1747년 존슨은 〈영어사전 계획서〉를 출판했다.

작가이며 서적상인 로버트 도즐리의 제안에 따라 그 책은 체스터필드 경에게 헌정되었다. 처음에 체스터필드는 약간 관심을 보이며 몇 가지 수정안도 제시했으나 더이상 그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존슨으로서는 기분이 좋았을 리 없었고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1753년 4월 〈사전〉의 제2권에 착수했고 서문, 문법·역사도 써야 했다. 2년 후 작업은 끝났다. 존슨과 그의 서기들이 그 일을 하는 데 모두 8년 반이 걸렸으며, 〈옥스퍼드 영어사전 Oxford English Dictionary〉의 편집장인 제임스 머리 경의 표현대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사전은 그 양이나 어휘의 정확성뿐 아니라 문학적 인용에 이르기까지 먼저 출간된 사전들을 단연 능가했다. 사실 그 사전의 4만 단어는 그 전의 너새니얼 베일리의 사전의 어휘보다는 적었다. 그러나 존슨의 작업이 두드러진 점은 어떤 단어가 갖는 다양한 의미의 여운을 예증할 만한 인용문이 많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는 "작가들은 열심히 정독하여…… 더할 나위 없이 어떤 단어나 구절을 확인 또는 예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베이컨의 〈수상록 Essays〉, 사우스의 〈설교집 Sermons〉 등의 책들이 존슨의 인용으로 되살아났다. 존슨의 조수들은 개별 쪽지에 인용문을 베껴 적고 이것들을 존슨 자신의 단어 정의 아래에 붙여두었다. 처음에 존슨은 잡다한 문헌을 열심히 뒤져보고 북유럽의 학문이 지니는 모호하고 은밀한 의미까지도 샅샅이 뒤져볼 시간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것이 '결국 사전 편찬자를 부추기게 되는 시인의 막연한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옮겨 쓰는 일이 지루했을 뿐 아니라 삭제해야 할 고통도 있었고, 작업의 실무적인 면에서도 한계가 있었던 존슨은 그 불완전성을 아주 예리하게 자각했다. 그의 철자법은 논쟁의 여지가 있었으며 어원 역시 불확실했다. 심지어 사전 출판을 서두르는 바람에 어떤 단어들은 그의 말대로 겨우 싹이 트는 정도였고, 또 어떤 단어들은 갑자기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서문에서 말했듯이 〈영어사전〉은 "학자들의 도움도 거의 없고 뛰어난 사람들의 후원도 전혀 없이, 편안히 은둔한 상태나 학원의 보금자리에서가 아니라, 불편과 혼돈의 와중에 병약함과 슬픔 가운데에서" 씌어진 명저였다.

오늘날 평범한 독자들은 몇 가지 '거친 실수', '우스운 불합리성', 예를 들어 '귀리'를 '영국에서는 흔히 말에게 주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람이 먹는 곡물'이라고 정의하는 데에서 보이는 솔직한 개인적 편견 등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슨의 세심한 정의와 영국문학에서 언어학적 용례들로 선배들의 사전을 풍부히 만든 것은 사전편찬사의 영원한 기념이 될 것이다.

〈사전〉의 표지에 존슨은 자랑스럽게 옥스퍼드대학교 문학석사라고 표기했는데, 이것은 그의 글의 종교적·도덕적 가치를 고려해서 수여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 '만담가'에게 학위가 수여된 셈이다. 〈사전〉에 대한 반응은 우호적이었고 '외쳐봤자 곧 그 소리가 공중에서 흩어지고 더이상 고려의 여지가 없는 시정의 잡담가'들만이 반대 의견을 나타냈다. 그러나 작품이 나오기 직전 〈월드 World〉에 실린 2편의 글에서 체스터필드 경은 자신의 소홀한 태도를 바꿔 존슨을 최고의 영어 사전 편찬가라고 칭찬했다.

이에 대해 존슨은 유명한 편지로 답했다. "당신이 나의 노고에 대해 표해주었던 말들을 좀더 일찍 했더라면 친절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너무 늦어서 나는 그 말에 전혀 관심이 없고 즐겁지도 않다. 고독하기 때문에 그 말을 나눌 수도 없다. 게다가 이미 유명해져서 그 말을 원치도 않는다."

존슨은 곧 〈사전〉을 축약하는 일에 착수했다.

사전편찬가로서 명성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1756년 3월 그는 5파운드 18페니 때문에 체포되었다. 당연히 인쇄업자들에게 도움을 부탁했겠지만 그들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인쇄업자 겸 소설가인 새뮤얼 리처드슨이 그에게 6기니를 보냈다. 어쩔 수 없이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는 토머스 브라운의 〈그리스도교 도덕 Christian Morals〉(1756)을 편집했고, 윌리엄 페인의 〈서양 장기 입문 Introduction to the Game of Draughts〉(1756), 리처드 롤트의 〈상업 사전 New Dictionary of Trade and Commerce〉(1756)에 서문을 썼으며, 잡지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리터러리 매거진 The Literary Magazine〉에서는 요나스 핸웨이의 〈차에 대한 명상 Essay on Tea〉을 읽은 후 스스로를 '고집 세고 부끄럼도 모르는 차 애호가'로 설명하기 위해 20년 동안 차를 마셨으나 아무 해가 없었고 그러므로 차가 독약은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했다.

좀더 중요한 서평은 소암 제닌스의 〈악의 본성과 기원에 관한 탐구 A Free Inquiry into the Nature and Origin of Evil〉(1757)에 대한 것으로 존슨은 아이러니를 사용하여 우수 인종이 그들의 오락을 위해 사람을 속이거나 괴롭혔다는 생각을 부정했다.

또한 존슨은 보다 나은 건강과 극히 적은 오락만 있어도 가난이 보상되어지리라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인생이란 개념적으로 알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직접 보아야만 한다'고 그는 반박했다. 이런 태도야말로 그가 특별히 깊이 있는 느낌으로 그려냈던 주제로서 그가 깊이 느낄수록 그의 문체는 더욱 단순해졌다.

존슨의 관심사나 저술은 문학과 윤리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756년 〈리터러리 매거진〉에 그는 정치상황에 대한 2편의 글 〈대영제국의 정치 상황 개론 An Introduction to the Political State of Great Britain〉·〈현사태 고찰 Observations on the present State of Affairs〉 등을 기고했다. 2편 모두 영국·프랑스의 식민정치에 내재해 있는 권력정치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에서 두 나라가 싸우는 것은 '통행인에게 빼앗은 전리품을 두고 두 강도가 싸우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프랑스가 영국보다 더 뛰어난 총독을 파견하여 원주민들을 더 잘 다스렸다고 스스럼 없이 주장했다.

그의 글에 따르면 국가간의 우정이 문화적이든 야만적이든 그저 친절한 조처에 의해 획득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상상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바로 식민주의자들의 동기와 방법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 불신에서 더 잘 알려진 식민주의 정책에 대한 후기 비판이 나오게 되었다. 이런 일을 하는 동안에 존슨은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는 1756년 셰익스피어 작품집의 편집계획을 발표하면서,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 동기가 명예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금전이 필요해서임을 강조했다. 1757년 4월 그는 버밍엄에 있는 오랜 친구 에드먼드 헥터에게 예약 상태는 약간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럽다고 편지를 썼으나 1758년초 그는 어떤 서적상으로부터 40파운드를 빌려야만 했다.

대략 비슷한 시기에 존슨은 〈유니버설 크로니클 Universal Chronicle〉에 〈게으름뱅이 The Idler〉라는 주간 수필을 기고했다.

그의 이야기는 뛰어났지만 〈영국 시인들의 생애 The Lives of the English Poets〉를 제외한 그의 다른 글들은 읽을 수가 없다는 풍문에 젖어온 독자라면 〈게으름뱅이〉를 읽고 자신의 편견을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채무자 감옥이나 생체 실험과 같은 주제에 대해 도덕가로서, 사회개혁가로서의 모습이 뚜렷하긴 하나 그는 즐겨 인간의 희극적인 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가격인하 판매만 열심히 찾아다니는 여성이나 기복이 심한 출판업자들을 다룬 글도 있는데, 인물묘사로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소버 씨〉이다.

"소버 씨의 가장 큰 즐거움은 대화다. 그의 이야기나 집중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 말하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똑같이 즐겁다. 그러면서 그는 무엇인가를 가르치거나 배우고 있다고 공상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은 자신의 비난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자화상이라고 여겨질 만한 희귀한 글이다.

몇 번 예외가 있긴 했으나 2년 동안 매주 존슨은 〈게으름뱅이〉를 인쇄업자에게 보냈다.

라셀라스

존슨이 다양한 활동을 하던 중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759년 1월 13일 그는 어머니에게 12기니를 보내려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지자 인쇄업자 스트래헌에게 '출판하려고 준비중인 것'의 대가로 30파운드를 빌렸다.

바로 이 책이 〈에티오피아의 왕자 The Prince of Abyssinia〉, 또는 〈라셀라스 Rasselas〉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책이다. 곧 닥쳐올 어머니의 장례식 비용을 염두에 두고 1주일 동안에 씌어진 이 책은 인간의 행복추구의 허망함을 탐구하고 있다. 그 배경은 제롬 로보의 〈에티오피아 여행〉을 연상시키며, '환상의 속삭임에 어리석게 귀기울이고 희망의 환영을 열렬히 추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작품이다. 주인공 라셀라스는 학자·천문학자·양치기·은둔자·시인 등의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면서 각자의 생활 태도가 지닌 한계를 깨닫게 되고, 결국 시인 임랙이 말한 "인생을 선택한 동안은 사는 일에 소홀할 것"임을 알게 된다.

존슨의 모든 작품 가운데 〈라셀라스〉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 그것은 목적과 날짜가 한정된 가운데 존슨의 풍부한 생산력이 발휘된 뛰어난 모범이며, 속도가 빨랐다고 해서 주제의 숭고함이나 기법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았다. 존슨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에티오피아·이집트 등지를 돌아다녔지만 근본적으로 〈라셀라스〉는 정신적 자서전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이 산문 작품은 그의 생전에 즉각적이고 폭넓은 인기를 얻었던 드문 작품이었다. 이 책은 '찬란한 허구로 싸여 있는 강렬한 진실'에 대한 18세기 독자의 취향을 만족시켰다. 여러 번역을 통해 작품의 인기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존슨이 그의 저술로 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된 것은 사실이다. 조슈아 레이놀즈는 존슨의 〈리처드 새비지의 일생〉에 감명받았고 그에 못지 않게 그의 언변에도 감동받았다. 그당시 지도적인 영국의 음악가 찰스 버니는 〈사전〉을 따뜻하게 칭찬하고 셰익스피어 편집을 격려했다.

링컨셔 신사이며 학자인 베닛 랭턴은 어린 나이에 〈램블러〉의 저자를 만날 목적으로 런던에 왔다. 존슨은 또한 옥스퍼드대학교 친구들도 소중히 생각했다. 그는 1754, 1755, 1759년 옥스퍼드에 머물렀고 학위를 수여한 뒤에는 학위복을 입는 데 깊은 즐거움을 느꼈다. 1759년 트리니티에서 베닛 랭턴이 그에게 토팸 보클레어르를 소개했는데 그는 찰스 2세와 넬 그윈의 후손이었다. 1762년 예기치 않던 일이 일어났다. 국왕이 그에게 연간 300파운드의 연금을 수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친구들과 그 문제로 상의하자 레이놀즈는 그를 안심시켰고 총리 버트 경은 그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가 해냈던 것 때문에 상을 주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리하여 아주 만족한 상태로 존슨은 그에게 '간청의 수치와 긴장의 불안'을 면제시켜준 왕에게 감사했다.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과의 만남

1763년은 존슨 일생에서 또다른 전환기가 되었다.

1763년 5월 16일 코벤트 가든에 있는 토머스 데이비스 서점의 후원에서 제임스 보즈웰과 우연히 만난 일인데,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교제의 시작이었다. 스코틀랜드의 판사 오친렉 경의 장남인 보즈웰은 에든버러와 글래스고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런던 생활의 행복을 맛보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유명한 사람을 만나는 것과 자신이 유명한 작가가 되고자 하는 2가지 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존슨에게는 새로운 우정이란 항상 환영할 만한 것이었고 게다가 젊은이와의 우정(그때 존슨은 53세였고 보즈웰은 겨우 22세였음)은 가장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특히 더 좋아했다.

존슨은 그에게 상당히 건전한 조언을 해주었다. 특히 그는 보즈웰에게 일기를 쓰도록 권했는데, 존슨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은 바로 이 보즈웰의 일기를 통해 전해진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존슨의 인생과 성격에 대해 가치있는 기록을 남겼으나 존슨을 존슨답게 그려낸 사람은 보즈웰이었다.

1764년 존슨은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The Club)을 만들자는 조슈아 레이놀즈의 제안에 동의했다(문인 클럽). 원래 구성원 가운데에는 레이놀즈와 존슨 이외에도 에드먼드 버크, 토팸 보클레어르, 베닛 랭턴, 올리버 골드스미스 등이 있었다.

9년 후 보즈웰이 그 클럽의 회원으로 인정받았을 때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동안 존슨은 셰익스피어 편집을 계속하고 있었다. 1745년에 개요가 정해지고 1756년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어 그가 완성에 필요하다고 기대했던 2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1765년 마침내 8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존슨은 평생 셰익스피어의 추종자였다. 그는 우상숭배자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기본적 비판은 도덕가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편집가로서 존슨은 작품의 표기상 실수를 수정시키고, 애매한 언어를 설명했으며,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자료를 다루는 데 있어 셰익스피어가 참고한 책들을 조사하려고 했다. 셰익스피어가 시간·공간의 일치를 무시했다는 비평가들의 비난에 대해 존슨은 '청중은 1막부터 마지막까지 무대는 무대일 뿐이고 연기자는 연기자일 뿐'임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드라마를 믿음직스럽게 만들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필수품'인 시공일치를 거부했다(삼일치). 코델리아의 죽음을 처음 읽고 너무 충격을 받았던 그는 〈리어 왕 King Lear〉을 개작하기도 했다.

19세기 낭만주의 비평가들은 존슨의 셰익스피어론을 과소평가했지만 20세기에 존슨이 더 많은 존경을 받을 것이라는 비평가 월터 롤리(1861~1922)의 예견으로 현대의 편집자들에 의해 충분히 실현되고 있다. 셰익스피어 전집을 출판하던 해 존슨은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로부터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0년 후에는 그의 모교가 비슷한 명예를 그에게 주었다.

존슨은 연금을 받음으로 인해 그의 생활에서 2가지 커다란 차이를 가져왔다.

하나는 더이상 생계를 위해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휴가를 즐길 만한 시간과 돈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작가로서 한가했던 것은 아니었다. 셰익스피어 편집과 〈사전〉을 개정할 필요가 있었고 친구들의 작품에 헌사와 서문을 쓰기도 했다. 그중에는 골드스미스의 〈선량한 사람 Good-Natur'd Man〉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일련의 정치 논설도 썼다. 〈거짓 경고 The False Alarm〉(1770)·〈포클랜드 섬에 대한 소고 Thoughts on the Late Transactions respecting Falkland's Islands〉(1771)·〈애국자 The Patriot〉(1774)·〈비과세 독재 Taxation No Tyranny〉(1775) 등은 정치 도덕에 대한 그의 관심과 월폴 정부의 폭정과 부패, 7년전쟁의 숨은 이유인 상업적 제국주의적 동기에 대한 분석 및 비난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식민주의).

존슨에게 있어 이 논설들은 본질적으로 실용주의적인 그의 정치철학을 개진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신성한 권리란 왕에게도 국민에게도 속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추상적이거나 '당연한' 권리로 자유를 말하는 태도를 위선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안정된 정부와 법률 존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궁극적인 안전책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했다. 정부가 그 권력을 남용하면 국민은 그것을 견디지 않을 것이다. 폭군에 대항해서 국민이 봉기하여 그의 목을 자를 수도 있었다.

존슨의 스코틀랜드 여행

1773년 보즈웰과 존슨은 스코틀랜드 지방을 여행했다(여행문학). 스코틀랜드 서쪽 대서양 연안에 있는 헤브리디스 제도를 두루 둘러보았으며, 존슨은 이 여행이 자신이 해본 여행 중 가장 즐거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많은 관점에서 이 여행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존슨은 던베건에서 64회 생일을 맞았고 맘라타칸의 험한 길을 말을 타고 가는 신체적 강인함을 보였으며 하이랜드의 오두막집에서 잠을 자고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작은 배에 몸을 싣고 이리저리 흔들려보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대단한 경험이었다. 사회적으로 보아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그 여행은 존슨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그를 대접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성공적인 일이었다. 물론 보즈웰에게는 그것이 존슨의 〈영국 시인들의 생애〉의 맨 처음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결정하게 해주었다.

존슨의 행동이나 대화의 '세세한 특이성'을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기록해둔 것이 보즈웰의 〈헤브리디스 여행기 A Journal of a Tour to the Hebrides〉이다. 존슨 자신이 쓴 〈스코틀랜드 서부 여행기 A Journey to the Western Islands of Scotland〉(1775)는 그에게 새롭게 여겨졌던 사회의 관습·종교·교육·무역·농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존슨이 여행에서 돌아온 후 올리버 골드스미스가 세상을 떠났다.

존슨과 골드스미스는 1760년부터 만났던 것 같으며 존슨은 골드스미스의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클럽이나 다른 곳에서 골드스미스와 자주 부딪쳤으나 그의 최종적 판단은 진지했다. "그의 결점을 기억하지 맙시다. 그는 매우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존슨은 썼다. 1777년 세 사람의 서적상이 존슨에게 그들이 준비중인 영국 시인들에 대한 '우아하고 정확한' 편집을 위해 일련의 '전기'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존슨은 이에 동의했으나 그 책의 제목을 〈존슨의 시인들 Johnson's Poets〉이라고 하는 데는 강력히 반대했다. 시인이 이미 선별되었으나 그의 제안으로 5명이 더 첨가되었다. 비록 그는 "꾸물거리다 서두르고, 마지못해 일하다가 열렬히 작업했다"고 하나 그가 글쓰기의 실제적인 즐거움을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이 작품에서였다.

〈영국 시인들의 생애〉는 연재물이 아니라 수필에 가깝다.

아무 계획도 없고 서로간의 어떤 통일된 구도도 없다. 밀턴, 드라이든, 포프 등 주요한 시인들에 대해서는 영국 비평의 명문으로 남을 만한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쓸모 있는 즐거움을 주고 싶다는 정직한 욕구'를 가지고 글을 썼다고 했다. 그러므로 에이브러햄 카울리의 글에서 그는 '이해받기보다는 감탄하고 싶어하는' 시인들인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특징을 길게 조사할 수 있었다. 반면 리처드 듀크에 대한 300단어로 된 간결한 글에서는 그의 시가 '평범 이하는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자신이 덧붙인 시인 중 한 사람인 제임스 톰슨에 대해서는 그의 〈계절 Seasons〉을 높이 칭찬했으나 〈자유 Liberty〉에 대해서는 "처음 그 시가 나왔을 때 나는 읽어보려고 애썼으나 곧 그만두었다. 그리고 다시는 읽어보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썼다.

문학의 전기적 부분은 존슨이 가장 사랑하던 것이었고 그는 시와 시인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그 사람을 싫어한다면 그 작품에 대해 냉정한 비평가가 되는 것은 어려웠다. 밀턴과 그레이의 전기가 2가지 경우로 인용될 만하다.

밀턴의 종교와 정치는 비난을 당했고, 존슨의 이런 편견은 밀턴의 시를 평하는 데서도 나타났다. 확실히 존슨은 〈코머스 Comus〉·〈쾌활한 사람 L'Allegro〉·〈침울한 사람 Il Penseroso〉에 높은 찬사를 보냈고 〈실락원 Paradise Lost〉을 '인간 정신의 고귀한 산물'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그 책들을 더이상 읽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며 계속해서 주요한 결점들을 지적했다. 개인적인 혐오는 그레이의 전기에서도 나타난다.

〈비가 Elegy〉에 대해 존슨은 유명한 찬사를 남겼지만 다른 시들에 대해서는 '이방인의 중립성과 비평가의 냉정함'으로 접근했다. 사실상 그는 그레이의 언어도치, 고어(古語) 취향의 수식어를 격렬히 비난하는 데 있어서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다. 존슨을 기분 나쁘게 만든 것은 그레이의 문학과 인생에 대한 태도였다.

그러브가(Grub Street : 옛 삼류문인들이 살던 곳)에서 30년을 보낸 사람으로서는 편하게 지내자고 여가를 청하고 기분이 날 때만 글을 쓰는 괴팍스러운 학자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존슨의 말년

1781년 〈영국 시인들의 생애〉의 출판이 끝나자 심한 비난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존슨은 논쟁문으로 싸우기에는 너무나 늙었고 사실상 〈영국 시인들의 생애〉는 존슨 작품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최소한 가장 무시당하지 않는 작품으로 남았다.

비우호적인 서평보다 더 그를 괴롭게 만든 것은 오랜 친구 헨리 스레일의 죽음이었다. 아내가 죽은 이후 스레일의 죽음만큼 그를 침통하게 만든 것은 없었다. 그가 유언집행자로서 경영에 참여했던 스레일의 양조장이 '부유한 퀘이커교도'에게 팔렸고 존슨이 자신의 가정처럼 생각했던 스트리트햄도 1782년 8월 스레일 부인의 결심으로 팔리게 되었다. 1783년 6월 천식과 수종으로 고생하던 존슨은 마비증세를 겪게 되었고 다음해 봄까지도 회복하지 못했다. 1784년 스레일부인의 재혼 소식을 듣고 그는 몹시 화가 나 비난의 편지를 썼으나, 곧 그 일은 단지 그녀 자신의 일임을 깨닫고 1주일 후 20년간의 우정과 위로에 감사한다는 글을 썼다.

1783년 12월 그는 에식스가(街)에 또다른 클럽을 열었고 1784년 7월 마지막으로 중부지방 여행에 나섰다. 리치필드에서 모든 이들이 그를 반겼다. 애슈번에 2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이곳은 학생시절부터 친구인 존 테일러가 9시면 잠자러 갔기 때문에 편안했지만 '대화에 굶주렸던 곳'이 되었다. 버밍엄에서 에드먼드 헥터와 옛 이야기를 나누었고 옥스퍼드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11월 16일 런던으로 돌아왔고, 1784년 12월 13일 죽었다. 1주일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존슨에 대한 평가

존슨의 명성에 대한 역사는 상당히 기이하다. 그가 살아 있던 시기에 이미 뛰어난 저술가이자 사상가로 인정받았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명성은 이중적 전통을 따르고 있다. 하나는 주로 보즈웰의 설명에서 비롯되고 매콜리가 확립시켰다고 보는 재담가로서의 존슨이라는 '민속적인 모습'이 있다.

다른 하나는 보즈웰의 묘사를 포용하면서도 문필가로서 존슨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다. 최근의 서적들은 존슨의 재미있고 강력한 언변이 아니라 열렬한 추론적 지성,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 위선에 대한 혐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에게까지 윤리적 기준을 적용하려 했던 그의 태도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흔히 생각하듯 존슨은 엄격한 신고전주의 비평가는 아니었다. 그의 접근법은 경험주의적이었다.

그는 맹목적으로 규칙을 따르기를 거부했고 각각의 작품을 독자적으로 판단했다. 이제 존슨은 20세기 신비평의 선구자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