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딩

필딩

다른 표기 언어 Henry Fie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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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07. 4. 22, 잉글랜드 서머싯 샤펌파크
사망 1754. 10. 8, 리스본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영국의 소설가·극작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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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원숙기
  4. 만년
  5. 필딩에 대한 평가

개요

새뮤얼 리처드슨과 함께 영국 소설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대표적 소설로는 〈조지프 앤드루스 Joseph Andrews〉(1742)·〈톰 존스 Tom Jones〉(1749)가 있다.

초기생애

필딩은 합스부르크가(家)의 지파에 속하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덴비의 초대 백작이었던 윌리엄 필딩이 직계 선조이고 헨리의 아버지 에드먼드 필딩 대령은 18세기초에 위대한 장군으로 이름난 말버러 공 휘하에서 근무하면서 용맹을 떨쳤다. 어머니는 판사인 헨리 굴드 경의 딸이었는데 아버지로부터 도싯에 있는 이스트스타우어 영지를 물려받았다. 필딩이 3세 때 그의 가족들은 이 영지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필딩이 11세가 되기도 전에 어머니가 죽었고 아버지는 재혼했다. 필딩은 이튼 칼리지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문학과 고전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

그는 이어 네덜란드로 건너가 레이덴대학교에서 고전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18개월을 지낸 뒤 고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아버지가 더이상 학비를 대주지 못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귀국한 필딩은 여러 편의 희곡을 쓰면서 문명을 날렸으나 당시 총리이던 로버트 월폴이 의회에서 연극사전검열법을 통과시키자 극작가로서 필딩의 경력도 끝나게 되었다.

당시 30세였던 작가 필딩에게는 1734년에 결혼한 아내 샬럿 크래덕과 2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부양할 길이 막막했다. 그는 4년의 구혼 끝에 샬럿과 결혼했는데 아내를 무척 사랑하여 〈톰 존스〉에서의 소피아, 〈아멜리아 Amelia〉에서의 아멜리아로 그려내기도 했다. 필딩은 이때부터 3년간 법률공부를 해 변호사가 되었다.

원숙기

필딩은 변호사로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1740년 새뮤얼 리처드슨이 〈파멜라 Pamela〉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하녀를 유혹하려던 한 주인이 그녀의 정절에 탄복하여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유형의 작품은 문학사상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모방한 소설들이 우후죽순처럼 발표되었다. 1741년 4월 〈샤멜라 앤드루스 부인의 생애에 대한 변명 An Apology for the Life of Mrs. Shamela Andrews〉이라는 작품이 나왔는데 이것은 리처드슨의 감상적인 태도와 가식적인 도덕심을 가차없이 풍자한 것이었다.

이 익명의 소설은 비록 생전의 필딩이 그것을 쓴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필딩의 작품으로 인정되었고 작품 속의 여러 가지 스타일로 보아 필딩의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작품의 내용이 〈조지프 앤드루스〉와 유사한 데가 있다.

〈조지프 앤드루스〉는 속표지에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를 모방하여 씌어진'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처음에는 〈파멜라〉에 대한 풍자로 씌어졌다.

즉 파멜라의 남동생이며 충직한 종복인 조지프가 귀부인의 성적 유혹을 거부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소설의 당초 목표였던 패러디는 2차적인 것이 되고 점차 소설 자체의 훌륭한 주제의식이 힘차게 전개된다. 절제된 아이러니와 적절한 사회비평이 섞여 있는 이 소설의 중심에는 애덤스 목사가 위치해 있는데 그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희극적인 인물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인물은 19세기의 위대한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장을 그대로 실현시켜주고 있다. 즉 소설 속의 아주 선량한 인물은 약간 희극적으로 만들어져야만 그 진실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필딩은 이 소설의 서문에서 이 작품은 "산문으로 씌어진 희극적 서사시"라고 했다. 그는 소설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조지프 앤드루스〉는 가장 열악한 환경 속에서 씌어진 작품이다.

당시 필딩은 온몸의 통증으로 고통을 받았고 6세 된 딸은 죽어가고 있었으며 아내도 딸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또한 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는데 친구이며 박애주의자인 랠프 앨런의 도움으로 근근이 견디어나갔다. 이 친구는 나중에 그의 작품 〈톰 존스〉에서 올워디 씨로 등장한다. 1743년 필딩은 〈미셀러니 Miscellanies〉 3편을 발표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위대한 인물 조너선 와일드의 생애 The Life of Mr. Jonathan Wild the Great〉이다.

필딩은 이 작품에서 당시에 유명했던 한 범죄자의 생애를 묘사하면서 인간의 위대성을 풍자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위대성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압제와 혼동하는 세태를 강력한 필치로 비판했다. 이 작품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와 함께 영문학사상에서 가장 우수한 풍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미셀러니〉를 발표하고 난 이후 필딩은 2년 이상 창작을 등한시했다.

소설을 써서 벌어들이는 작은 수입에 대한 불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법률에 더 전념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좋지 못했고 변호사 생활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아내의 병세는 위독했다. 1744년 가을 그는 온천욕을 시키기 위해 아내를 바스로 데리고 갔으나 그녀는 그곳에서 죽었다. 필딩은 그후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나 다시 런던으로 나와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갔다.

그는 딸, 소설가인 여동생 세어러, 아내의 시녀 메리 다니엘과 함께 살았다. 1747년 필딩은 런던 사람들의 조롱을 받아가며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메리와 결혼했다. 메리는 결혼 이후 그를 잘 돌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필딩은 열렬한 정부 지지자였는데 그 보상으로 1748년 웨스트민스터와 미들섹스 지구를 담당하는 치안판사(행정장관)로 임명되었다. 그가 관할하는 법원은 런던 중부의 보우스트리트에 있는 그의 관저에 함께 있었다. 판사직은 무급(無給)이었다. 전직 판사들은 판결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내는 수수료를 착복하거나 뇌물을 받아서 비용을 염출했지만 필딩의 직업관은 그들과 달랐다.

20세기의 영국 역사가인 G. M. 트리빌리언에 따르면 필딩은 18세기 런던의 가장 우수한 2명의 치안판사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이복동생이며 장님인 존 필딩 경이었는데 형의 뒤를 이어 같은 지역의 치안판사 자리를 맡았다. 이들 형제는 함께 힘을 모아 아무런 권위도 없던 직책을 대단한 위엄과 힘 있는 자리로 만들었고 사법부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했다. 그렇게 하여 자연히 런던의 범죄를 소탕했던 것이다.

만년

〈톰 존스〉는 1749년 2월 28일 출판되었다.

활기찬 유머, 다양한 인물, 런던 생활과 시골생활의 다양한 대비 등이 이 작품에 인기를 모아준 요인이다. 전작 〈조지프 앤드루스〉와 같이 이 작품은 로맨스 플롯을 위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결말에 이를 때까지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 주인공은 아름다운 소피아 웨스턴을 사랑하며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말을 보기 위해 그는 수많은 장애를 극복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여러 인물들이 서로 쫓고 쫓기는 가운데 18세기 영국의 생생한 사회상이 잘 묘사된다.

소설의 각 장 시작 부분에는 소개의 글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필딩이 얼마나 치밀하게 이 소설을 준비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필딩 이전의 작가들이 소설의 본질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점을 비추어볼 때 〈톰 존스〉는 치밀한 문학적 구성을 갖춘 대작이라는 평판을 받을 만하다.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로맨스적 인물, 악한적(惡漢的) 인물, 희극적 인물의 3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작품의 배경에 남아 있는 올워디 씨는 행복한 결말을 이끌어내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이 소설은 유머와 로맨스가 교묘하게 교차하고 극적인 수법이 많이 동원되어 작품 전개의 속도가 빠르며 또 일상적인 대화체를 잘 구사하여 독자들에게 편안한 독서를 제공해준다.

〈톰 존스〉는 18세기 영국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작품이며 필딩의 관대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작이다. 2년 뒤 〈아멜리아〉가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분위기가 어둡기 때문에 〈톰 존스〉·〈조지프 앤드루스〉에 비해 인기가 없었다. 치안판사로 일하면서 보고 느낀 경험이 필딩의 마음을 어둡게 했고 그것이 이 작품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한 가정의 주인과 하녀의 관계를 다룬 소설이라는 점, 그리고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멜리아가 정절의 표상으로 나온다는 점 등에서 빅토리아 왕조 때 번성했던 가정소설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필딩이 살았던 사회의 여러 가지 악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그 사회가 더이상 희극적이라고 보지 않는 필딩의 생각을 여실히 읽을 수 있다.

필딩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1752년 그는 온몸이 너무 아파서 붕대를 칭칭 감고 지냈으며 어떤 때는 목발이나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다. 1753년 8월 휴양차 바스로 가려고 했으나 출발 직전 런던의 심각한 범죄상황을 우려한 뉴캐슬 공(당시 전쟁장관)의 만류로 범죄소탕 계획안을 작성하게 되었다.

필딩은 천식과 수종으로 고통받으면서도 그해 내내 런던에 남아 범죄소탕에 앞장섰다. 이듬해 6월 필딩은 휴양차 포르투갈로 향했고 1754년 8월 7일 리스본에 도착했으나 그해 10월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유해는 리스본에 있는 영국 묘지에 묻혔다.

필딩에 대한 평가

월터 스콧은 헨리 필딩을 "영국 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이 평가는 아직도 영문학사상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비록 영국 최초의 소설가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의 엄정한 소설관을 가지고 소설을 써낸 최초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한 비평가는 〈조지프 앤드루스〉는 희극적 서사시, 〈톰 존스〉는 서사시적 희극, 〈아멜리아〉는 가정적 서사시라고 평가했다. 이 세 소설로 필딩은 동시대의 시대상이 여실하게 묘사된 리얼리즘의 전통을 확립했고 이 전통은 영국 소설 속에 그대로 남아 19세기말까지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