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폴

월폴

다른 표기 언어 Robert Walpole,1st earl of Orford
요약 테이블
출생 1676. 8. 26, 잉글랜드 노퍽 휴턴홀
사망 1745. 3. 18,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정치가.
Sir Robert Walpole이라고도 함(1725~42).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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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기생애
  2. 중기생애
  3. 후기생애

일반적으로 영국(Britain)의 초대총리(1721~42 재임)로 알려져 있다. 솔직하고 호탕한 품성을 지닌 반면 아무도 필적할 수 없는 예리한 정치 감각의 소유자였다. 월폴은 총리라는 직함을 용어의 남발이라고 생각하고 거절했지만 재무부에 대한 통제, 하원의 운영, 그리고 그가 받든 두 국왕으로부터 받은 신뢰 등은 18세기 정치에 안정과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지도력을 입증한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듯이 휘그당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이용했으며 최대 관심사는 하노버 왕가의 왕위계승을 다짐으로써 그가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있던 재커바이트들의 계략을 미리 막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국가의 번영과 세금 인하 등으로 가장 잘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평화를 추구하고 외국과의 분쟁에 휘말려들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정책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그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들에 가능한 한 많은 의무 규정을 부과했다. 1745년 재커바이트 반란은 그의 두려움의 실체와 정책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월폴의 오랜 총리 재임은 18세기 정치 구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노버 가문 지지파와 재커바이트로 분열된 토리당이 점차 중요성을 잃어감에 따라 정치적인 야심이 있다면 우선 휘그 당원이 되는 일이 관건이 되었다. 권력다툼은 양당간의 갈등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왕실의 지지를 얻고 또한편으로는 지방의 독립 젠트리의 지지를 얻기 위해 벌이는 휘그당 내에서의 다양한 집단·인물·정책 간의 싸움으로 변했다. 그가 모든 관직임명권을 독식했다는 엄연한 사실이 그에 대한 맹렬하고 편파적이며 때로는 과장되기도 한 비난의 원인이 되었고, 또한 정부제도나 기관들에 대한 악평을 불러일으켰지만, 특히 런던 같은 도시의 급진주의를 강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반면에 월폴은 헌정 발전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수세대에 걸쳐 월폴만큼 권력을 행사한 총리는 없을 것이다. 군주인 조지 2세와 마찬가지로 그는 내각제 정부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가능하면 최소한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는 군주정체의 관습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실행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을 뿐 결코 그것을 변경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월폴의 생애에서는 그가 예술작품을 애호하고 상당한 심미안을 가졌다는 사실이 간과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의 면밀한 감독 아래 세워지고 장식된 노퍽 휴턴 홀에 있는 저택은 팔라디오 양식의 걸작이다. 월폴의 회화 소장품은 유명한 예술품 감식가이자 문필가인 그의 손자 호레이스 월폴에 의해 나중에 러시아의 여제에게 팔렸으며, 현재는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전시관의 하나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겉치장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투기와 공직생활을 통해 벌어들인 많은 재산을 마음껏 쓰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초기생애

월폴은 로버트 월폴 대령과 메리 버웰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노퍽의 그레이트 더넘과 이튼 학교(1690~96) 및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킹스 칼리지(1696~98)에서 공부했다.

하나 남은 형 에드워드가 죽자 학업을 중단하고 남은 아들에게 주어진 길인 성직자가 되는 대신에 부친의 영지관리를 돕기 위해 노퍽으로 돌아왔다. 1700년 7월 30일 켄트 지방 바이브룩가(家)의 캐서린 쇼터와 결혼했다. 같은 해 아버지의 사망으로 광활한 영지를 물려받고 곧 의원으로 선출되어 라이징 성의 가문 의석을 계승했다. 1702년에는 킹스린으로 이주해 한 차례의 공백기를 제외하고는 40년 동안이나 킹스린 대표의원으로 활동했다.

월폴은 하원에서 명료하고 힘있는 연설가로, 확고하지만 열광적이지 않은 휘그 당원으로, 적극적인 의원으로 명성을 떨쳤다.

1705년 그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4) 동안 해군업무를 관장했던 왕세자 조지가 이끄는 덴마크 평의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탁월한 행정능력을 발휘해 말버러 공작과 고돌핀 경의 관심을 끌어 1708년 2월 25일 육군장관으로 승진했고, 1710년에는 해군의 재무총감이 되었으나, 1710년 총선거 후 토리당이 집권함에 따라 1711년 1월 2일 해임되었다. 당시 월폴은 휘그당을 이끄는 젊은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치적·사회적으로 입지를 다졌다.

그는 휘그 성향의 문인들로 이루어진 킷캣 클럽을 이끄는 핵심인물이 되었다. 친구가 많았지만 지출이 너무 많아 곧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그는 파산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자신의 직책을 이용했으며, 봉급과 부수입의 한도에 맞게 지출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월폴이 의회에 열성적으로 참석하며 논쟁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사실상 야당의 지도자로 부각하게 되자 토리당에서는 그를 말버러와 함께 파멸시키려는 결의를 다졌다.

1712년 1월 월폴은 육군장관으로 재직할 당시의 부정행위로 탄핵받았으며 유죄로 판명되어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휘그당에서는 즉각 그를 투사로 추앙했고, 월폴은 토리당의 지도자인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할리와 자신을 몰락시킨 볼링브룩 자작 헨리 세인트 존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나갔다.

1714년 조지 1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군수총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비밀위원회 의장이 되어 볼링브룩과 옥스퍼드를 반역혐의로 탄핵함으로써 복수했다. 그는 놀라운 근면함과 하원에 대한 통제력을 인정받아 급속히 승진해, 1715년 10월 11일 재무위원회 위원장과 재무장관이 되었다. 능력을 인정받을수록 주위의 질시를 받게 되었고, 이같은 상황은 그와 그의 처남인 타운센드 자작 찰스가 왕의 두 측근인 선덜런드 백작 제임스 스태너프 및 찰스 스펜서와 외교정책을 놓고 충돌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월폴과 타운센드는 아첨하는 무리들 때문에 영국의 이익이 하노버 왕가의 이익에 희생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1717년에는 왕가의 분열로 월폴과 타운센드가 내각에서 물러났다. 왕과 왕세자 간의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직후 왕가는 분열되었고 반대파들은 왕세자의 거처인 레스터 하우스에 자신들의 거점을 마련했다. 그후 3년 동안 월폴은 정부와 모든 문제를 놓고 마찰을 빚었으며, 1719년 귀족작위 수여에 따른 국왕 대권을 제한하려 했던 귀족법안을 부결시키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이 기간중에 그는 왕세자비인 안스바흐의 캐롤라인과 친분을 맺게 되었는데, 그녀는 남편이 1727년 조지 2세로 왕위에 오른 뒤에 월폴의 정치적인 입지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월폴은 왕세자(나중에 조지 2세)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해 1720년 4월 국왕과 화해했으며 군수총감에 복귀했다.

월폴이 복직하자 곧 나라 안은 스페인령 아메리카와의 통상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합작회사인 남해회사와 관련된 투기열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1720년에 정한 계획안에는 남해회사가 상당부분의 국채를 책임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월폴은 영국은행으로 하여금 부채를 인수하도록 하는 것에 찬성했지만 그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신중하지 못하게 남해 주식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러나 그와 통하는 은행업자 로버트 제이컴의 예측 덕분에 큰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 월폴은 1720년에 정해진 계획안의 추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왕의 독일계 총신들뿐 아니라 다른 많은 관료들에게 씌워진 부패 오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는 탁월한 정치술과 의회 내 논쟁에서의 설득력을 발휘해 휘그당 지도자들과 왕실이, 그들의 어리석은 판단에서 비롯한 결과로 피해를 입지 않게 했다. 재무상서인 존 애슬러비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과로로 인해 사망하기도 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들로는 스태너프와 제임스 크래그스, 그리고 그의 아들 제임스가 있다.

그는 신임을 회복하고 휘그 당원들이 관직을 유지하게 했으며 왕실에서의 자신과 타운센드의 입지를 크게 향상시켰다. 그는 재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721년 4월에는 총리직에 올라 1742년까지 재직했다. 타운센드는 다시 국무장관이 되어 외교업무를 관장했다. 한동안 월폴과 타운센드는 존 카터릿(나중에 그랜빌 백작)과 세력을 공유해야 했다.

카터릿은 1722년 4월 선덜런드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선덜런드의 세력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1724년경 월폴과 타운센드는 카터릿이 국무장관직에서 해임되게 만들었고 그를 아일랜드 총독으로 보냈다. 조지 1세의 나머지 통치기간중에 월폴과 타운센드는 내각의 수반으로 남아 있었으며 그들의 지위는 꾸준히 강화되었다. 스튜어트 왕가의 복귀를 지지하는 재커바이트의 희망은 남해회사포말사건으로 서서히 커졌지만 로체스터 주교인 프랜시스 어터버리가 기도하고 있던 반란이 탄로나면서 1723년에 좌절되었다.

1725년 볼링브룩이 사면되었음에도 토리당의 전망 또한 어두웠다.

중기생애

월폴은 1742년까지 영국 의회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1727년 조지 2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얼마 동안 해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소 위기의식을 느꼈으나 캐롤라인 왕비가 국왕을 설득해 월폴은 관직에 머물 수 있었다. 1730년 그는 외교업무와 관련해 타운센드와 불화를 빚고 타운센드를 해임시켰다. 그의 사임은 월폴의 지위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이때가 월폴에게는 전성기였던 것이다. 그의 세도는 조지 1세와 조지 2세로 이어지는 국왕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이런 조건을 발판으로 그는 왕가의 후원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고 의회에서의 강력한 결정권에 힘입어 언제라도 왕실과 교회, 해군, 육군, 행정관리에 대한 관직임명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수십 년 동안 휘그 당 권력의 핵심이 되어왔던 왕실과 재무부의 힘을 증강시켰다. 그러나 하원에 대한 지배권은 이러한 방법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다. 대외적으로는 평화책을, 국내적으로는 세금을 낮추는 그의 정책이 지방 젠트리 출신 의원들의 인기를 끌어 웨스트민스터(의회의사당 소재지)에서 다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월폴은 논쟁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잡다한 정부업무에 관한 지식과 특히 재정에 관한 해박한 지식은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명료하고 힘찬 표현력은 언제나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한 번도 의회의 힘을 과소평가한 적이 없었으며, 그 이전이나 이후에 그처럼 뛰어난 기량으로 의회를 다룬 각료는 없었다.

월폴의 통치는 늘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완벽한 기량을 필요로 했다.

외교업무는 계속해서 골칫거리였다. 타운센드가 1725년 영국과 프랑스 간의 협력을 강화하는 하노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해결의 전망이 확실해졌지만 지브롤터 및 서인도에서의 영국 무역권을 놓고 스페인과의 사이에 발생한 분규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에 협상의지를 보여줌으로써 마침내 1729년 세비야 조약을 성사시켰다. 이 조약에 이어 1731년 빈 조약의 체결로 모든 현안이 타결되었다.

1733년 폴란드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유럽 대륙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월폴은 영국의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왕에 대한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야만 했다.

많은 정치가들, 특히 월폴과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외교정책이 영국의 국익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월폴이 영국의 오랜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를 저버리고 프랑스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으며,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는 월폴의 뜻은 스페인에 대한 발언권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또 월폴이 왕실의 후원을 이용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이를 부패행위로 몰아부쳤다. 이들은 월폴의 금융정책, 특히 국가채무를 없애기 위해 마련한 감채(減債) 기금계획을 사기행위라고 비난했다. 이같은 반대 움직임의 대표자로는 유능한 휘그 당원이었던 윌리엄 펄트니를 들 수 있는데, 1724년에는 월폴이 국무장관인 뉴캐슬 공작과 볼링브룩의 편에 서서 그를 반대했었다. 반대 진영의 대표자들은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지지세력을 끌어모았다.

그 가운데는 재커바이트, 하노버 왕가 지지파인 토리당원, 휘그당의 반대자들, 도시의 급진개혁 세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형성된 집단을 결집시키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들이 수행한 가장 활발한 활동은 월폴에 대한 맹렬한 언론공격이었다. 이를 위해 〈크래프츠먼 The Craftsman〉을 발행해 매주 월폴 내각을 비판하는 내용을 실었다. 월폴은 신문은 물론 팜플렛이나 시, 연극 등에서 비난을 받았으며 이렇게 계속된 인신공격은 전혀 사실 무근인 것이 아니었지만 의회와 정치권의 위신을 여지없이 실추시켰다.

1733년 월폴은 포도주와 담배에 소비세를 부과함으로써 밀수와 관세 부정을 감시하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이 반대파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 결정에 대한 호응은 매우 좋지 않았으며, 특히 런던 상인층 사이에서 반발이 심했다. 반대파들은 여론형성에 전력을 쏟았다. 월폴은 정책을 철회함으로써 곤란한 상황을 모면했으나 성급하게 그의 법안에 반대한 정치인들은 관직을 잃었다. 그러나 이들을 해고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월폴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그는 당시 정부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상원의 찬성표는 물론 논쟁술을 발휘할 기회를 상당히 잃게 된 것이다.

1733년 이후 해직된 유능한 휘그당 정치인들의 수는 늘어나 월폴 내각의 인원과 맞먹었으며, 소비세로 야기된 위기상황 이후에는 휘그당 내의 반대파가 굳이 월폴과 대항하기 위해 토리당이나 재커바이트에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볼링브룩은 이를 깨닫고 정치에서 물러나 일생 동안 계속된 월폴과의 대결에서의 패배를 깨닫고 1735년 프랑스로 떠났다.

후기생애

월폴은 1734년의 총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선거는 과열경쟁과 소비세에 대한 비판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점차적인 지지도 상실은 대규모 항구와 인구밀집지역에서 많은 의석을 잃음으로써 확연해졌다. 그러나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의 지지자는 여전히 다수였다.

그는 에든버러 감옥에서 군중시위대에 총기를 발사한 호위대 대장을 왕실이 사면한 데 불만을 품고 일어난 에든버러 지방의 폭동을 큰 무리없이 해결했다. 또 그리 어렵지 않게 의원들을 설득해 국채의 이자를 삭감하자는 존 바너드 경의 주장을 거부하게 했으며, 런던 극장에 제재를 가함으로써 야당 성향의 문학인들(스위프트·포프·필딩 등)을 탄압했다. 그러나 1737년부터 그의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캐롤라인 왕비가 세상을 떠날 무렵만 해도 조지 2세는 월폴을 크게 신뢰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왕비가 죽었다고 해서 그의 지위가 위태롭게 되지는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월폴이 점차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이었고 이런 상황에 힘입어 윌리엄 피트(나중에 채텀 백작)와 같은 젊은 정치가들이 어디에선가 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국왕 조지 2세와 심한 불화를 빚었던 왕세자 웨일스 공 프레더릭 루이스는 반대파의 우두머리로 떠오르면서 젊은 휘그당원들을 지칭하는 이른바 '애국 청년'에게 활동 축을 마련해주었고 장소도 제공했다. 서인도의 무역문제로 스페인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자 반대파들은 이를 이용해 월폴을 궁지에 몰아넣기로 했다.

그는 협상을 통해 이 난국을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1739년 어쩔 수 없이 스페인과의 전쟁(일명 '젱킨스의 귀전쟁')을 선포하게 되었다(→ 젱킨스의 귀전쟁). 그는 전쟁에 찬동하지 않고 각료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이당시 월폴은 공적인 불안과 아울러 개인적인 슬픔에 젖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내가 1737년 세상을 떠난 뒤 1738년 3월 3일 오랫동안 자신의 정부였던 마리아 스커리트와 재혼했으나 매력과 재치가 출중했던 그녀가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지지부진했고 반대파들은 월폴에 대한 성토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1741년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다수 휘그당 정치인들과 무소속 정치인들은 그가 전쟁을 강력하게 수행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믿었으며 다시 7년간 의회를 이끌 능력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1742년 2월 2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은 그에게 옥스퍼드 백작작위를 내리고(1725년 기사작위를 받았음) 그를 위해 연간 4,000파운드의 연금을 책정했다. 그러나 하원에서는 그를 탄핵하려는 목적으로 위원회를 구성해 그의 내각을 조사했다. 그러나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으며 월폴에 대한 원한의 목소리도 차츰 줄어들었다.

남은 생애 동안 그는 계속 정치권에서 적극적이고 값진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자신의 퇴임시에 국무장관이 된 카터릿의 사임을 위해 전력을 다했으며 그의 부하이자 휘그당 내 월폴 지지세력의 주도자였던 헨리 펠럼을 총리직에 올려놓았다. 국왕 조지 2세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죽을 때까지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