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링브룩

볼링브룩

다른 표기 언어 Henry Saint John, 1st Viscount Bolingbroke
요약 테이블
출생 1678. 9. 16
사망 1751. 12. 12, 런던 근처 배터시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정치가.
Baron Saint John of Lydiard Tregoze라고도 함.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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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경력
  3. 프랑스 망명생활
  4. 영국 귀환

개요

여왕 시대에 토리당 정치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그후 로버트 월폴 경이 이끄는 휘그당에 반대하는 주요 정치 선동가로 활약했다.

초기경력

이튼 고등학교와 옥스퍼드대학교에 다녔다는 설이 있지만 그보다는 국교 반대파가 설립한 학원에서 교육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1698~99년에 유럽을 여행했고 1700년 프랜시스 윈치콤과 결혼했다. 1701년 의회에 진출했으며 휘그당의 전(前) 내각 및 휘그당의 가장 충실한 동맹 세력인 국교 반대파 프로테스탄트를 비난하는 등 토리당의 당파적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그는 곧 정부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육군장관으로 임명된(1704) 뒤에는 잠시 온건파로 전향해 앤 여왕의 주요각료인 로버트 할리의 정책을 따랐다.

4년 동안 그는 말버러 공작이 프랑스와 맞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충분한 병력과 장비를 공급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지만, 정부 정책을 제멋대로 움직이는 휘그당의 횡포를 막아내지 못하고 로버트 할리와 함께 사임했다(1708. 2). 1708~10년 의회에서 의석을 얻지 못한 그는 토리당과 제휴하는 것이 휘그당을 이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리를 설득했다.

1710년 그는 할리의 새 내각에서 북부 담당 국무장관이 되었지만 곧 할리의 온건한 정책에 반대하고 그 권위에 도전하게 되었다.

정부의 정책을 지배하고 할리(1711년부터 옥스퍼드 백작)의 역할을 하려는 그의 노력은 대부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옥스퍼드 백작이 프랑스와 비밀 평화 협상을 시작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1712년부터 볼링브룩 자작) 평화 협상에 억지로 끼어들었지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협상은 결국 위트레흐트 조약(1713)으로 타결되었다. 의회에서도 볼링브룩은 더이상 옥스퍼드 백작에 대한 토리당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했다.

그는 비국교도의 학교를 그들의 손에서 빼앗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 분리법(1714) 같은 당파적 차원의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일부 토리 당원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지만 대다수를 설득하여 자신을 따르게 하는 데에는 실패했고, 앤 여왕의 후계자 논쟁에서도 토리당을 명쾌하게 이끌지 못했다.

옥스퍼드 백작은 결국 1714년 7월 27일 해임되었지만 8월 1일에 여왕이 죽자 옥스퍼드 백작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던 볼링브룩의 희망도 깨졌다.

프랑스 망명생활

조지 1세에게 해임당한 볼링브룩은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 때 자신이 맡은 역할과 재커바이트(명예 혁명으로 쫓겨난 제임스 2세의 아들로서 영국 왕위를 요구하며 제임스 3세를 자칭한 제임스 에드워드 지지자)들과 꾸민 음모 때문에 탄핵당할 것을 두려워해 프랑스로 달아났으며(1715. 3) 그해 7월에 그곳에 있는 망명 궁정에서 늙은 왕위 요구자 제임스 에드워드의 국무장관이 되었다.

이런 행동 때문에 영국 정부는 반역자에 대한 사권(私權) 박탈법을 제정하고 이 법률에 따라 그의 재산과 시민적 자유를 박탈했다. 그결과 그의 정치적 미래는 재커바이트 반란의 성패 여부에 달리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1715년에 시도한 재커바이트 반란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서로 상대의 잘못을 헐뜯는 격렬한 내분 속에서 제임스 에드워드는 볼링브룩을 해임했다.

그러자 볼링브룩은 당장 영국의 휘그당 정부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1717년에 그는 1710년부터 자신이 취한 행동을 변명함과 아울러 재커바이트의 대의명분을 포기하도록 토리당을 설득하는 〈윌리엄 윈덤 경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 to Sir William Wyndham〉(1753)를 썼다. 그러나 예견했던 대로 사람들을 설득해 자신의 최근 행동을 잊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속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볼링브룩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다른 출구를 찾았다.

볼테르를 비롯한 학자 및 귀족들과 사귀면서 성서와 역사 및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망명 회상 Reflections upon Exile〉·〈직관적인 도덕적 원칙에 관한 고찰 Reflections Concerning Innate Moral Principles〉 등을 비롯한 여러 권의 저서를 썼다. 그는 첫 아내가 죽은 직후 미망인인 프랑스의 빌레트 후작부인과 재혼했다(1719).

영국 귀환

볼링브룩은 여러 해 동안 영국 정부에 탄원하고 프랑스 궁정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영향력을 총동원해 영국 정부를 움직인 끝에 1723년 마침내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1725년에 런던 근처의 돌리에 작은 토지를 살 수 있도록 법적으로 허용이 된 후에야 영국에 다시 정착했다. 그에 대한 사권 박탈은 끝내 완전히 취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 지위를 되찾거나 상원의석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의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로버트 월폴 경의 적의 탓으로 돌렸다.

그가 월폴 경의 정치적 지배권에 끈질기게 도전한 동기는 분명 그 자신의 좌절된 야망 때문이었지만 뇌물과 부패를 지나치게 이용해 권력을 독점하는 듯한 월폴 경의 방식에 불안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그의 행동에 대한 비난은 과장되었지만 월폴 경에 대한 위협적인 반대 세력을 형성하기에 충분한 진실성을 갖고 있었다. 볼링브룩은 조너선 스위프트와 알렉산더 포프 및 존 게이를 비롯한 문단의 주역들과 협력해 영향력 있는 선전활동을 벌였다.

그가 야당지인 〈크래프츠먼 The Craftsman〉에 기고한 주요기사는 〈영국사론 Remarks on the History of England〉(1730~31)·〈정당론 A Dissertation upon Parties〉(1733~34)이었는데 이 기사는 둘 다 휘그당과 토리당의 해묵은 분쟁을 끝내고 월폴에 반대하는 다양한 세력을 결집해 부패한 정부의 권리 침해에 대항해 의회의 독립성을 지켜 나갈 새로운 지방당(Country Party)을 만들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 당과 볼링브룩은 이따금 성공을 거두었지만 월폴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거나 통합야당을 창설하지는 못했다. 1735년에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 철학과 역사 연구를 계속하면서 월폴 반대 투쟁에 미온적인 영국인의 애국심 부족을 개탄했다. 그는 1738년에 잠시 영국을 방문한 뒤, 새로운 반대파가 조지 2세의 아들인 왕세자 프레더릭을 중심으로 레스터 저택에서 세력을 규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희망을 품었다.

그는 이 집단을 위해 〈애국왕에 대한 견해 The Idea of a Patriot King〉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였지만 월폴을 물리치거나 '애국' 정당을 창설하는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다. 어쨌든 프레더릭은 왕이 되기 전에 죽었고 월폴은 1742년에 결정적으로 패배했으나 이는 볼링브룩 탓이 아니었다.

말년에 볼링브룩은 여전히 애국 내각을 만들려는 헛된 노력을 계속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도 없었다.

그는 1744년에 알렉산더 포프가 〈애국 왕에 대한 견해〉를 1,500부나 몰래 인쇄한 것을 알고 더욱 심한 적개심을 품었다. 1749년에 볼링브룩이 이 책의 개정판을 출판하자 이를 기회삼아 포프의 배신 행위를 폭로했다는 신랄한 비난을 받았다. 그는 잊혀진 채 죽었지만 죽은 뒤인 1754년에 출판된 그의 저작들은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비정통적인 종교관이 마침내 공개되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그의 철학 서적은 근대학자들의 주목을 그다지 받지 못했지만 그는 휘그당의 정치를 그당시 가장 잘 분석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