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표기 언어 A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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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65. 2. 6, 런던
사망 1714. 8. 1,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군주로서, 독자적으로 통치하기를 원했지만 지적인 한계와 만성적인 허약 체질 때문에 각료들에게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으며 각료들은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1701~14)에서 영국을 이끌어갔다. 앤 여왕 통치기의 특징은 한마디로 휘그당과 토리당의 극심한 대결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갈등은 불확실한 앤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더욱 심화되었다.
첫 내각은 거의 토리당이 지배적이었지만 중립적인 입장의 시드니 고돌핀과 말버러 공작이 이끌어갔다. 앤은 스페인 왕위계승전 전략면에서 토리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앤과 말버러 및 휘그당은 영국군을 투입해서 유럽 대륙에서 싸우게 하려고 한 반면 토리당은 영국은 해전만 치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결국 1710년 앤은 휘그당을 몰아내고 토리당 내각을 성립시켰다.

앤(Anne)
앤(Anne)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군주로서, 독자적으로 통치하기를 원했지만 지적인 한계와 만성적인 허약 체질 때문에 각료들에게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으며 각료들은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1701~14)에서 영국을 이끌어갔다.

앤 여왕 통치기의 특징은 한마디로 휘그당과 토리당의 극심한 대결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갈등은 불확실한 앤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더욱 심화되었다.

요크 공작(제임스 2세[1685~88 재위]) 제임스와 앤 하이드의 둘째딸인 앤은 아버지가 로마 가톨릭교도였음에도 큰아버지인 찰스 2세의 뜻에 따라 프로테스탄트로 양육되었다. 1683년 앤은 따분한 성격이긴 하지만 준수한 용모를 지닌 덴마크의 게오르 공(1653~1708)과 결혼했으며 남편에게 헌신적으로 정성을 쏟았다.

앤의 어린시절 절친한 친구인 새러 제닝스 처칠(나중에 말버러 공작 1세가 된 존 처칠의 부인)과의 친밀한 관계는 훗날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말버러). 미모와 재능을 갖춘 새러는 앤의 사실(私室) 시녀가 되었으며 앤을 자신의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었다. 1688년 네덜란드의 총독이며 프로테스탄트 통치자인 오라녜의 빌렘편에 서도록 설득한 사람도 바로 새러였다.

권리장전(1689)에 따라 윌리엄(빌렘)과 그의 아내이며 앤의 언니인 메리가 영국의 왕과 여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앤도 왕위 계승 서열에 들게 되었다. 앤과 메리의 사이는 매우 나빠졌다. 1694년에 메리가 죽은 후 윌리엄은 앤과 호의적인 관계가 되도록 노력했지만 자신이 영국을 떠나 있는 동안 앤을 섭정으로 임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1683~1700년 사이에 앤은 무려 18번이나 임신을 했었지만 다섯 아이만이 살아서 태어났고 그중에서도 아들 1명만이 유아기를 살아넘겼다.

그러나 하나 남은 그 아들마저 1700년에 죽었고 이로써 앤은 자신의 후계자로 왕위를 잇게 할 희망이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앤은 1701년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하노버계 후손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한 왕위계승법을 받아들였다. 앤은 1702년 3월 윌리엄이 죽은 직후 여왕으로 즉위했다. 처음부터 성공회에 대한 강렬한 신앙심이 행동의 밑받침이 되었다.

그녀는 가톨릭교도와 국교 반대파를 몹시 싫어했으며 고교회파 토리당에 동조하고 있었다. 동시에 정당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첫 내각은 거의 토리당이 지배적이었지만 중립적인 입장의 시드니 고돌핀과 말버러 공작이 이끌어갔다. 앤에 대한 새러 처칠(말버러 공작 부인)의 영향력은 비록 남편이 영국 군대의 지휘관이었지만 1703년 이후에는 보잘것없어졌다.

앤은 스페인 왕위계승전 전략면에서 토리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앤과 말버러 및 휘그당은 영국군을 투입해서 유럽 대륙에서 싸우게 하려고 한 반면 토리당은 영국은 해전만 치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결국 말버러가 대륙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자 앤에게 휘그당 출신 정치인을 입각시키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앤은 완강히 거부했으며 휘그당 정치인들의 편을 드는 새러에게마저 더욱 냉담해졌다. 1707년 무렵 여왕의 총애는 새러를 떠나 애비게일 매섬에게로 옮겨갔는데 매섬은 토리당의 지도자 로버트 할리(나중에 옥스퍼드 백작 1세)의 측근이었다.

그러나 할리와 매섬의 계획은 앤을 너무나 당황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1708년 앤은 할리를 해임할 수밖에 없었으며 가장 저명한 휘그당원들을 정부에 등용했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민심은 휘그당에게서 멀어져갔다. 1710년 앤은 휘그당을 몰아내고 토리당 내각을 성립시킬 수 있게 되었다. 1711년에는 말버러 부부도 해임했다.

앤이 나이가 많아지고 허약해짐에 따라 후계자 문제가 결정적인 사안으로 떠올랐다.

집권 토리당은 추방되어 있는 앤의 동생이며 가톨릭교도인 이른바 '늙은 왕위요구자'(The Old Pretender) 제임스 에드워드(그의 왕위계승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음)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앤의 갑작스런 병세 악화와 죽음으로 토리당이 품고 있었을지도 모를 계획, 즉 에드워드를 위해 왕위를 찬탈하려는 계획은 좌절되었다. 앤은 마지막으로 유능한 온건주의자 슈루즈버리 공작 찰스 톨벗을 재무장관에 임명하고 프로테스탄트 후계자 확보 문제를 일임했다.

톨벗의 관장하에 하노버 가문의 게오르크 루트비히(조지 1세, 1714~27)가 평화롭게 즉위했다. 데이비드 그린이 쓴 전기 〈앤 여왕 Queen Anne〉이 1970년에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