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그당과 토리당

휘그당과 토리당

다른 표기 언어 Whig Party and Tory Party

요약 18세기 영국에서 정치적 입장을 달리한 두 정당 또는 정파.

원래 '휘그'와 '토리'라는 말은 1679년 요크 공작(후의 제임스 2세)을 왕위계승권에서 배제하려는 왕위계승배제 법안을 둘러싸고 의회 내 찬성파와 반대파 간에 주고받은 경멸적인 말이었다. 휘그는 스코틀랜드 게일어에서 유래한 말도둑을 나타내는 단어였고 후에는 스코틀랜드의 장로파를 뜻하기도 했다. 또한 비국교도·반란 등을 내포하기도 해 왕위계승권 배제파에게 적용되었다. 토리는 아일랜드어로 불법적인 가톨릭교도를 뜻했으며 제임스가 로마 가톨릭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위계승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제임스 2세
제임스 2세

1688년 명예혁명은 양당이 협력해서 성취해낸 것이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토리와 휘그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그후로 대부분의 토리당원은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절대군주제보다 제한적인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휘그당의 강령을 일부분 수용했다. 앤 여왕 시대에 토리당은 주로 지방 젠트리에 의해 종교적 관용과 대외적으로 분규에 휘말리는 것에 반기를 들었다. 토리당은 영국국교주의·지주계급을 대표했으며 휘그당은 귀족, 토지 소유 계층, 부유한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했다.

1714년 앤 여왕이 죽은 후 휘그당이 지지하는 조지 1세가 왕위에 오르자, 토리당 지도자인 헨리 세인트 존이 프랑스로 도망한(1715) 후 토리당은 정당으로서의 정치력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그후 거의 50년간 영국은 휘그당의 전통과 정서와 노선을 같이하는 귀족계급에 의해 통치되었다. 반면 완고한 토리당은 스튜어트 왕가의 통치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폐위된 제임스 2세를 옹립하려다 재커바이트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토리당을 자처하는 지방 젠트리 100여 명이 여전히 하원에 포진해 있었고 휘그당 집권시절에도 개인 또는 지방정치, 행정 차원에서 토리당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지 3세(1760~1820 재위) 집권기간에 휘그당과 토리당은 그 의미가 달라졌다. 휘그당이라는 실체가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단지 일단의 귀족 그룹과 연합 가문들이 있었다. 이런 현상은 토리당도 마찬가지여서 특정 가문들과 사회집단 사이에 토리적인 감각과 전통과 기질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조지 3세가 각료(특히 노스 경 내각하에서)들을 부를 때 사용한 이른바 '왕의 친구'는 양당 출신이 모두 포함되어 있거나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사실상의 정당으로 실체를 갖춘 것은 미국 독립혁명과 같이 여론을 들끓게 하는 중대한 정치적 이슈가 발생한 1784년부터였다.

1784년 이후 윌리엄 소(小)피트가 새롭게 탄생한 토리당의 지도자로 부각했으며 토리당은 지방 젠트리, 상인 계급, 관료층을 대변하게 되었다. 반면 찰스 제임스 폭스가 지도자로 나서 쇄신을 단행한 휘그당은 비국교도·제조업자들을 대변하고 선거, 의회, 인도주의적인 개혁을 지지하는 그룹과 노선을 같이했다. 프랑스 혁명과 대 프랑스 전쟁은 양당의 구분을 더욱 복잡미묘하게 만들었다. 휘그당의 다수인 온건파들은 폭스에 등을 돌리고 토리당의 피트를 지지했다.

1815년 양당의 혼란시대 이후 결국 로버트 필 경과 비콘스필드 백작 벤저민 디즈레일리 등이 주축이 된 보수주의와 존 러셀 경, 윌리엄 E. 글래드스턴이 대변하는 진보주의가 양당을 보수당과 진보당으로 분리시켰다. 그러나 토리당이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으로 계속 유지된 반면, 휘그당은 정치적인 의미를 많이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