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폭스

찰스 폭스

다른 표기 언어 폭스 , Charles James Fox
요약 테이블
출생 1749. 1. 24, 런던
사망 1806. 9.13, 잉글랜드 데번 치직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초대 외무장관(1782, 1806), 국무장관(1783).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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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유년시절
  3. 정치입문
  4. 폭스-노스 연립내각
  5. 피트와 애딩턴에 대한 반대
  6. 말년
  7. 폭스에 대한 평가
폭스(Charles James Fox)
폭스(Charles James Fox)

개요

자유의 옹호자로 유명하나 실제로 그의 정치경력은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단조롭게 끝났다.

국왕 조지 3세와 오랫동안 반목·대립하며 정치적 반대파로 남아 있었으며 그결과 외무장관에 재직한 기간은 1년도 채 못 되었다. 그는 의회를 조정하여 노예매매 제도의 신속한 폐지결의를 이끌어냈으며 1792년 명예훼손법을 제정함으로써 2개의 중요한 개혁을 완수했다(→ 노예제). 명예훼손법은 배심원들이 명예훼손 혐의가 있는 저술이 실제로 발행되었는지를 확인하고 그것이 명예훼손에 해당되는지와 피고인의 유죄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가지도록 한 것이었다.

유년시절

폭스는 헨리 폭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후에 리치먼드 공작의 딸인 캐롤라인 레넉스와 결혼해 홀런드 남작이 되었다.

그는 모계 쪽으로 영국왕 찰스 2세와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후손이다. 이튼 고등학교와 옥스퍼드대학교 허버트 칼리지에서 수학했으며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탐닉한 고전은 일생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의 부친은 도덕성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그가 학생시절부터 낭비와 방종에 빠져 들도록 방치했다. 폭스는 도박으로 엄청난 돈을 날렸고 1774년 부친은 아들의 노름빚 14만 파운드를 갚아주고 세상을 떠날 정도였다.

약 20년 후 폭스의 정치적 동지들은 그의 노름빚을 갚아주면서 안정된 수입을 보장해주는 우정을 보였다. 폭스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경마와 도박에서 완전히 손을 끊었다.

정치입문

1768년 폭스는 부친의 도움으로 의회 의석을 획득했다.

2년 뒤인 1770년 해군본부 차관에 임명되었으나 1772년 2월 사임했다. 왕가의 결혼은 국왕이나 추밀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법안(결국 왕실결혼법으로 통과됨)에 대해 아무 구애 없이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12월 다시 재무차관으로 입각했으나 국왕은 그의 야당기질과 불충을 비난하면서 1774년 2월 해임해버렸다. 에드먼드 버크와 친구였던 폭스는 자연스럽게 휘그당으로 기울었고 하원에서 휘그당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아메리카 식민주의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더욱 야당적인 성향을 띠게 된 그는 총리 노스 경의 식민지 정책이 불공정하고 탄압적이라고 믿어 식민지 정책에 매우 거세게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은 미국과의 전쟁이 영국 내에서 인기가 있음을 인정했다(→ 미국독립전쟁). 그러나 요크타운에서 콘월리스 경이 이끄는 영국 군대가 항복하는(1781. 10) 등 날로 전세가 악화되자 노스 내각은 붕괴되고 말았다(1782. 3). 국왕은 휘그당에 내각구성을 요청하여 로킹엄 경이 총리, 셸번 경(랜즈다운 후작)이 식민장관을 맡았고 폭스는 이때 영국 최초의 외무장관에 올랐다.

폭스는 미국과의 평화협상이 외무장관의 소관이라고 믿고 있었고 식민지들의 독립을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인정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셸번은 영국과 전쟁상태에 있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평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식민지 독립 인정을 유보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미국의 독립이 공식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 독립 협상문제는 당연히 식민장관인 자신이 주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폭스는 사의를 표명했으나(6. 30)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전에 로킹엄 총리가 세상을 떠났다. 국왕은 총리직을 셸번에게 제의했으나 폭스와 그의 동지들은 후임총리 지명은 국왕이 아니라 자신들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국왕은 분명히 총리대신을 선택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폭스의 주장은 위헌적이었다. 폭스와 그의 동지들은 즉각 사임했으나 다른 각료들은 셸번을 지지했다. 역사가 조지 오토 트리벨리언 경은 폭스가 셸번 내각에서 탈퇴한 것은 일생일대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고 평가한다. 셸번에 대한 폭스의 불신은 근거가 없지는 않았으나 과장되었으며 셸번은 어떤 면에서는 당대의 가장 합리적인 정치가였다.

폭스-노스 연립내각

폭스는 항상 연립내각을 선호했고 1783년 2월 14일 오랜 정적 노스와 합세하여 10일 후에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이 내각은 여론의 지지도 받지 못했고 그의 평판에 손상을 입혔으나, 그가 노스와 대립한 유일한 이유인 미국과의 전쟁이 끝났으므로 쌍방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현명하고 솔직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조지 3세는 "영국 또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무원칙한 연립정부"라며 폭스-노스 연립내각을 완강히 반대했으나 결국은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4. 2). 허수아비에 불과한 포틀런드 공작이 명목상의 총리가 되었으며 폭스와 노스는 공동 국무장관을 맡았다.

국왕은 각료들에 대한 전통적인 왕가의 지지표시를 유보하기는 했지만 새 정부는 하원에서 독립적인 젠트리의 지지를 쉽사리 얻었다. 또한 정부에 지지를 표명한 왕세자 웨일스 공(나중의 조지 4세)에게 매년 10만 파운드를 지급할 것을 제의했기 때문에 왕실과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부친인 국왕의 미움을 산 방탕한 왕자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폭스는 더욱더 국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연립정부는 인도법안을 계기로 붕괴되었다.

폭스와 노스는 인도에서의 실정을 끝장내야 한다고 주장해 영국 정가를 들끓게 했다. 인도법안은 영국령 인도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동인도회사의 모든 구조를 개혁하고, 동인도회사의 영토·수익·무역권을 영국정부가 지명하는 7명의 집행관에게 이양하고 집행관은 의회 상·하원의 어느 한쪽의 동의에 의해서만 해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이 즉각 반발했으며 12월 17일 상원은 국왕이 법안 찬성자를 적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공표함에 따라 법안을 기각했다.

연립정부는 그 다음날로 붕괴되었고 소장파 정치인 소(小)윌리엄 피트가 정부구성 권한을 이어 받았다. 폭스는 국왕의 각료 선임권에 대해 계속 공격함으로써 인기를 잃어갔다. 정적들은 그가 국가재판에도 승복하지 않을 정도라고 비난했다. 많은 연정지지자들이 입장을 바꾸고 의회가 해산됨(1784. 3)에 따라 야당은 확실히 궁지에 몰렸다. 새로 구성된 하원에서 야당은 겨우 145석만을 차지했다. 그러나 폭스는 웨스트민스터 지역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어 런던 시장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피트와 애딩턴에 대한 반대

폭스가 조금만 협조적이었다면 개혁의 명분으로 윌리엄 피트 정부에 합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트가 제의한 아일랜드에 대한 무역양허(1784)와 프랑스와의 무역협정을 놓고 폭스는 공격에 나서 평판을 잃었다. 1788~89년 국왕이 잠시 정신이상이 되었을 때 폭스는 섭정권을 주장한 왕세자의 편을 들어 또 한번 실수를 저질렀다. 이때 피트는 의회만이 섭정권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고 물론 정당 이익단체들이 이같은 헌법논쟁에 깊이 관여했다. 결국 왕세자가 권력을 잡았다면 피트를 해임시키고 휘그당을 입각시킬 것이었으나 그렇지 못했다.

폭스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환영했다.

1793년 프랑스 혁명정부와 전쟁이 있었고 1794년 포틀런드가 이끄는 야당이 대거 입각했다. 폭스가 이끄는 소수야당은 그때까지 영국역사상 가장 허약한 야당이 되었다. 1797년 많은 야당 의원들은 국회 등원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1798년 폭스는 공개연설에서 인민 주권 원칙을 천명하여 추밀원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8년 후 국왕은 폭스의 원칙적인 주장 철회를 요구하지 않고 다시 복직시켰다.

1795년 폭스는 이미 동거상태로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던 엘리자베스 아미스테드와 비밀리에 결혼했으며 그들의 결혼은 1802년에야 공개되었다.

폭스는 서리주 처트시 근처 세인트앤스힐에 있는 전원주택에서 고전문학과 전원생활을 즐겼으며 공직생활의 불만과 스트레스를 이곳에서 풀었다. 그의 아내는 자식 없이 1842년 7월 8일 세상을 떠났다. 폭스는 아미앵에서의 조약체결(1802)로 귀결지어진 평화협상을 찬성했으나 한편으로 이것을 나폴레옹에게 "우리가 정복한 것을 모두 넘겨주는 부끄러운 행위"라고 말했다(→ 아미앵 조약). 그는 헨리 애딩턴(후의 시드머스 자작)의 정부(1801~04)가 평화유지에도 실패하고 1803년 전쟁재발에 이은 나폴레옹의 침략 위협에 적절한 방어태세를 갖추지도 못했다고 공격했다.

사실상 불신임안과 같은 그의 제안은 의회에서 256 대 204로 부결되었지만(1804. 4. 23) 애딩턴 정부는 며칠 후에 사임했다. 피트는 이제 광범위한 새 연정을 구성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폭스에게 외무장관직을 맡기려 했으나 국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국왕는 폭스를 외국대사로 보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폭스는 사실상의 추방이나 다름없는 국왕의 제의에 너무 나이가 많아(55세) 관직을 맡을 수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는 정치 동료들에게 연정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나 친구들과 최근 조직된 그렌빌경 추종자들은 폭스의 제의를 거부하고 야당으로 남아 있었다.

말년

1806년 1월 23일 피트가 죽고 그렌빌이 총리대신에 오르자 폭스의 외무장관 임명에 대한 왕의 반대가 별 저항 없이 사라졌다.

프랑스와의 전쟁 초기국면에 폭스는 유럽의 전제군주들이 프랑스에서 새로 탄생한 자유를 억제하기 위한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대외정복이 영국에 미치는 위험성과 프랑스의 호전성을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1806년까지 나폴레옹 영도하의 프랑스가 대영제국과 유럽 전대륙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무렵 폭스의 건강은 매우 나빠졌다. 주위에서는 그에게 보다 덜 힘든 직책을 맡으라고 말했고 하원을 이끄는 힘든 일보다는 상원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충고까지 했다.

그는 1806년 6월 19일 의회에서 마지막 연설을 하고 9월 13일 데번셔 공작의 집에서 죽었다.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피트의 묘지 옆에 묻혔다.

폭스에 대한 평가

폭스는 친교를 맺는 데 천재였고 그의 정치적 영향력의 비결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아량이었다. 그의 매력은 매우 완강한 정적의 적대감마저 희석시켰다. 정치가로서 그는 확실히 실패했다.

그는 종종 편견에 사로잡혔으며 심오한 정치적 사색을 결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탄압의 기미가 보이는 그 어떤 것도 혐오했다. 다양한 식민지문제에 대한 태도는 제국의 신민들이 더이상 착취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결의를 보여주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인정함으로써 정치인이자 작가인 에드먼드 버크와의 우정을 악화시켰다. 폭스는 비록 개인적으로 프랑스 공화당원이 미치는 영향을 두려워했지만 이런 감정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는 전제군주와 이해를 같이해 자유의 반대자로서 프랑스 공화당과 전쟁을 벌이는 것에 반대했다.

국내에서 그는 국왕의 과잉권력이 모든 국가의 가장 큰 화근이라는 시각을 가졌고 일생 동안 국왕의 권력남용을 저지하기 위해 헌신했다. 그는 국왕이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과 무관하게, 하원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정당출신을 총리로 선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결국 그 의견을 실현시켰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자가 아니었으며 편향되고 인내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여론은 무시해 버렸다. 그는 휘그·토리 양당의 주요관심사인 재산보호와 관련하여 무재산의 유권자가 다수인 민주사회에서 재산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옹호하지 않았다.

그의 견해로는, 재산은 귀족사회의 진정한 토대이며 어떤 국가든 정부가 그 재산을 보호할 때 가장 번영하는 것이었다. 폭스는 매우 유럽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국은 상호 결속에 의해 유럽의 한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1832년 개혁법과 같은 조치를 추진하면서 영향력이 지속된 것은 그가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