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3세

조지 3세

다른 표기 언어 George III
요약 테이블
출생 1738. 6. 4(구력 5. 24), 런던
사망 1820. 1. 29, 런던 근처 윈저 성
국적 영국

요약 조지3세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지나친 과세로, 미국의 혁명과 독립을 야기했다. 그때문에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전부 상실하게 되었다. 22살에 왕위에 오른 후, 첫 10년은 불안정한 내각 때문에 7년전쟁의 지출로 인한 재정위기를 극복할 어떠한 방안도 마련되지 못했다. 그리고 미국에 자체 행정비용을 부담시키려는 시도는 본국에 대한 저항의식만을 증폭시켰다. 결국 1775년 4월 미국과의 전쟁에 착수하게 되었다. 당시 반드시 승리할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불리해졌다.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인 집착으로 전쟁을 2년 더 연장시켰으나, 결국 아메리카를 잃게되며 평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말년엔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왕세자인 웨일스 공이 섭정으로 국사를 대행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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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정치적 불안정(1760~70)
  4. 노스 경 내각(1770~82)
  5. 소(小)피트 내각(1783~1806)
  6. 말년(1806~20)

개요

그의 통치기에 영국은 7년전쟁(1756~63)으로 말미암아 유럽의 주요열강으로 부상했으나 아메리카 식민지를 상실하는 패배를 맛보았다.

말년에는 간헐적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왕세자인 웨일스 공(후의 조지 4세)이 섭정으로 국사를 대행했다.

초기생애

조지 3세는 웨일스 공 프레더릭 루이스와 작센고타의 오거스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양친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조부인 조지 2세에 대해 터무니없는 반감을 품게 되었다.

어린 조지는 지적인 능력에 조화되지 않는 강렬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이성과 감성의 불균형적인 발전으로 그는 배우는 것을 잘 깨닫지도, 너무 태평해서 자신을 제어하지도 못했다. 11세가 될 때까지도 글을 정확히 읽지 못했다. 그의 관심은 평생동안 주변의 근친들에게 쏠려 있었다. 조지는 아버지의 사망으로 왕위계승자가 되었을 때 겨우 12세에 불과했다.

18세 성년식 날 미래의 책임과 의무를 의식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무능력을 통감하고 심리적인 부담감에서 오는 고통을 경험했음이 분명하다. 자신감의 결여에서 파생된 외고집 기질은 이미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비정상적인 허세는 스스로를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정형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조지는 뷰트 백작 3세 존 스튜어트를 자신의 이상형으로 생각했는데, 뷰트 백작은 왕세자에게 영감을 주는 스승으로서 나중에 총리가 된 인물이다. 끈질긴 집착력과 목적달성을 위한 책략 등 훗날의 행태로 미루어 조지에게는 뷰트 이상의 정치적 잠재력이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1760년 7년전쟁 중에 국왕으로 등극했을 당시에는 자신의 고유한 정치감각도, 존 스튜어트의 무능력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761년 조지 3세는 독일 내 프로테스탄트 귀족 가문에서 적당한 신부감을 검토해보도록 뷰트에게 지시를 내렸고 뷰트는 메클렌부르크 슈트렐리츠가의 샤를로테 조피를 선택했고, 같은 해 9월 8일 결혼했다. 공적인 의무감에서 이루어진 이 결혼이 50년 이상을 별 탈 없이 지속될 수 있었던 까닭은 영국의 안전에 긴요한 수단이 되었음은 물론, 왕비의 강인한 인성에 힘입은 바 컸다.

그밖에 존 스튜어트가 조지에게 베푼 공헌이 있다면 식물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주고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을 고무하는 등 과거 반세기에 비해 왕실이 보다 품격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정치적 불안정(1760~70)

뷰트 백작은 어린 국왕의 위태로운 과대망상증을 부추겼다.

영국정부는 효율적인 행정기구를 결여하고 있었으며 의회 지도자들은 정부에 협조하기보다는 정부 시책을 트집 잡기 위해 안달이 나 있었다. 화합이 어려웠던 것은 각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국왕의 제1과제는 상원의 원로귀족들을 통합시키는 데 있었지만 뷰트의 입김 아래 어린 국왕은 자신의 의무를 음모와 책략을 통해 적대세력을 제거하는 것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조지 3세가 국왕으로 책봉되었을 때 영국 정치를 좌우하고 있던 인물은 대(大)피트뉴캐슬 공작 펠럼 홀리스였으나 국왕과 뷰트는 두 사람 모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761년 10월 스페인과의 전쟁문제로 피트가 사임하고 곧바로 재정비리 의혹을 산 뉴캐슬이 사퇴하자 이들의 해임은 논란이 분분한 새 내각에 대한 비난의 초점이 되었다. 뷰트 정부는 정국 안정과 평화시의 재정 회복이라는 2가지 당면과제를 안고 있었다.

평화가 찾아왔지만 이 평화는 영국을 유럽 대륙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가능해진 것이었고 이후 거의 30년 동안 영국은 유럽 열강들의 새로운 동맹형성으로 말미암아 숱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조지 3세 역시 만족스러운 상태는 아니었다. '브리튼의 이름으로 길이 칭송될' 것이라는 뷰트의 귀띔과는 달리 즉위연설을 통해 국가의 목표를 천명하는 국왕의 모습은 결코 대중의 호감을 얻지 못했다.

1765년 급진파 의원 존 윌크스는 언론을 동원해 국왕에 대한 비방을 서슴지 않았고 피트와 뉴캐슬을 동정하는 '애국적인' 신사들은, 평화는 어설픈 사기극이며 국왕이 뷰트와 협잡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1763년 4월 뷰트는 총리직을 내놓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야 자신의 어리석음이 대영제국의 정치체계를 붕괴시켰으며 새로운 체제의 구성 또한 어렵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국왕은, 친척인 조지 그렌빌과 컴벌런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 피트, 그리고 그래프턴 공작 3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조지 3세 통치기의 첫 10년은 이렇듯 내각의 불안정으로 결말이 났으며 7년전쟁의 지출로 타격을 입은 왕실의 재정위기를 극복할 어떠한 타개책도 강구되지 못했다. 해외무역은 나날이 번창했지만 동인도회사의 막대한 수익은 본국 경제에 실제로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고 아메리카 식민지에 자체 행정비용을 부담시키려는 시도는 본국에 대한 저항의식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식민지 정책 또한 일관성을 상실하고 있었는데, 그렌빌이 발의한 인지세법(1765)은 이듬해 로킹엄 경의 주도로 폐기되었고 간접세 부과를 위한 '타운센드 법'(1767)은 산출량에 대한 견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차세(茶稅)를 제외하고는 주민들에 의해 무효화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국 불안정에 대한 비난은 조지 3세 개인에게로 돌아갔다.

휘그당 의원이자 정치 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에 따르면 국왕은 불성실하고 막후에서 음모만을 일삼고 있으므로 내각을 이끌어갈 인물이 못 되었다. 영국 정치가 개선되려면 정당의 규율을 바탕으로 내각의 통일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결속의 매개체가 되어야 할 것은 국왕이 아니라 다양한 세력들로 구성된 정치 조직이며 합의된 원칙에 근거하여 국정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조지 3세의 통치 초기는 근대적 의미의 정당정치를 발아시키는 토양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사실 일련의 계략을 통하여 정국의 혼란을 야기시킨 잘못은 국왕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지 3세는 1766년 이후 뷰트 백작을 접한 일이 없었으며 국왕의 측근들도 이른바 '앞잡이들'이 아니라 과거와 같은 지도력을 기대하는 복고주의자들일 뿐이었다. 굳이 거론하자면 정치감각과 경험의 부족에 있을 뿐 하원을 통제할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국왕의 허물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770년이 되자 조지 3세는 상당한 정치력을 갖추게 되었고 아직도 외고집에다 국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기는 했지만 정치 현실을 신중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더이상 선거의 승리를 위하여 행정권을 남용하지 않았으며 바람직하지 못한 인물을 총애하는 오류를 범하지도 않았다.

노스 경 내각(1770~82)

1770년 조지 3세는 다행스럽게도 하원을 다스릴 만한 말재주와 설득력을 갖춘 노스 경을 발굴해냈다.

긁어서 부스럼을 낼 필요없다는 식의 노스의 정책은 행정부의 권한이 지나치게 확장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지방자치구 의원들의 의심을 가라앉히는 데 성공했고 10여 년에 걸친 소요의 시기에 이어 새로운 안정정국이 12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집권초기부터 노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분쟁과 파벌 간의 반목들이 되살아났다. 치명적인 최대의 논쟁거리는 아메리카 식민지 문제였는데, 의회 내 지방유지들과 국왕 모두가 아메리카 스스로 자체의 방위비용을 부담해야 하며 식민지의 안녕을 보장해준 7년전쟁의 빚을 청산해야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노스 경 역시 아메리카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상실하게 된 책임은 조지 3세가 국왕의 대권을 주장한 데 있었다기보다는 의회의 영도자임을 자처한 데서 기인했다. 식민지인들은 본국 국왕의 지상권에 굳이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스스로를 의회와 연결시키려는 조지 3세의 태도는 좀처럼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국왕과 하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노스 경은 식민지의 무례한 언동을 예삿일로 받아넘길 수만은 없었으며 1775년 4월 마침내 아메리카와의 전쟁에 착수하게 되었다(미국독립전쟁).

1779년에 이르러 의회지도자들은 깊어져가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국왕은 재정적인 곤란에도 불구하고 교전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본국 정부에 대한 불복종이 승리를 거둘 경우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 또한 반기를 들고 나설 것이며 1778년 이후 프랑스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있으므로 영국에 앞서 재정파탄을 겪게 되리라는 논리에서였다. 조지 3세는 이렇게 특유의 필사적인 집착욕으로 전쟁을 2년 더 연장시켰고 1779~82년 국왕에 대한 평판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1780년 의회는 조국에 재앙을 안겨준 책임을 들어 노스 내각에 질책을 가했으나, 야당이 애국심이 부족하고 구심점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현실에서 믿을 만한 대체세력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무렵 국민들은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종식시킬 능력도 갖추지 못한 정부의 배후에는 뿌리 깊은 부패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총리의 거듭되는 사퇴의사 표명을 통하여 비난의 화살은 온전히 왕실과 조지 3세에게 돌아갔다. 1782년 노스 내각의 붕괴로 말미암아 실추된 국왕의 위신은 뒤이은 셸번 내각(1782~83)이 단명으로 끝나면서 바닥 끝까지 내려앉았다.

노스 경은 휘그당의 찰스 제임스 폭스와 접촉하여 연립내각의 구성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이 상황에서 조지 3세는 왕위포기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다.

소(小)피트 내각(1783~1806)

국왕은 그러나 1년이 지나기도 전에 형세를 역전시켰다.

국민들의 성원 속에서 조지 3세는 18세기 영국 정치사상 가장 고압적인 형태의 국왕 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폭스와 노스의 '동인도회사 개혁안'이 회사의 공직임명권을 통하여 그들의 권력을 영속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을 때 국왕은 국가 이익의 수호자로서 바야흐로 시기적절한 조치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조지 3세는 상원에서 동인도회사 개혁안을 지지하는 의원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적으로 간주할 것임을 선언했으며 법안은 무효화되고 각료들의 사퇴가 줄을 이었다.

조지는 새로운 애국지사 소(小)윌리엄 피트를 총리로 영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소피트라는 카드에 위험이 전혀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피트의 세력은 하원 내 소수파에 불과했고 경질된 각료들은 당장에라도 헌법상의 정변을 단행하기라도 할 태세였다.

모든 것은 1784년 3월의 총선 결과에 달려 있었으나 국민들은 진정한 마음으로 한편에서는 왕실의 재정적 위기를 깊이 인식하고 조지 3세의 대권행사에 압도적인 찬의를 표명했다. 일단 승리를 거두고 나자 국왕은 더이상의 권력시위를 시도하지 않았으며 피트가 구상하고 있던 정책이 상당부분 마음에 내키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자위 속에서 숱한 비난과 불평불만을 견디어냈다. 피트는 국왕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기 어려웠고 국왕 역시 피트가 아니었으면 폭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야 했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타협이 이루어졌으며 소장의 총리는 별 이의 없이 막대한 통치권력을 이양받았다.

측근들에 대한 국왕의 히스테릭한 집착은 자식들에 대해서는 지나친 소유욕의 형태로 나타났다. 1783년 성년에 이른 맏아들 웨일스 공이 왕가로부터 독립하게 되자 조지 3세는 엄청난 비애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국왕의 절망감은 이내 한없는 분노로 바뀌었는데, 왕자가 정치적으로나 사적인 교류에 있어서 폭스의 무리와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왕실의 얼마간 경직된 분위기에 비하여 왕세자의 주변은 활력이 넘쳐흘렀고 방종한 느낌마저 들게 되었다. 아들들이 하나하나 주변을 떠나가는 가운데 조지는 심한 조울증 증세를 나타냈다. 조지는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퇴위의사를 거론했지만 1788년의 왕실 성명에 따르면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다만 국왕의 이성일 뿐이었다.

과중한 국사는 이러한 국왕에게 신경쇠약증을 안겨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20세기의 의학보고에 따르면 조지 3세는 '포르피린증'으로 알려진 신진대사상의 유전병을 앓고 있었다. 신경계 전체에 퍼진 진홍색 색소는 단말마(斷末魔)의 고통과 비정상적인 흥분, 마비증상, 섬망상태를 몰고왔으며 조지는 적어도 4차례 이상 직무를 떠나 몸져 누워야 했다. 포르피린증은 그러나 보편적인 의학소견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조지 3세의 건강상태가 정치적으로 쟁점화되면서 피트와 폭스 사이에는 왕세자의 섭정권 행사를 놓고 격론이 일었으나 그러는 동안 조지 3세의 건강은 호전되고 있었다.

국왕은 또 광기의 악몽이 찾아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18세기의 마지막 10년을 정책의 기본방침보다는 부차적인 세부사항에 골몰하고 있었다. 소피트의 정책노선은 점차 국왕의 신임을 얻었고 노스 공뿐만 아니라 폭스 세력의 지지까지 확보하기 시작했다. 1793년 프랑스 혁명정부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거의 모든 휘그 당원들이 정부 시책에 보조를 맞추었으며 폭스는 개인적으로 영향력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외로운 반대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영국의 귀족들과 중산시민들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은 국가의 사활이 걸려 있는 위기상황으로 인식되었다.

노령의 국왕은 선의로 충만한 연민의 대상으로부터 그들이 수호해야 할 구체적 권위의 상징으로 부각되었지만 이토록 확대된 정치적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조지 3세의 의지력은 현저히 약화되어 있었다. 국왕은 농업생산을 독려하거나, 조급한 심정으로 말끝마다 '뭐, 뭐, 뭐?'를 되풀이하면서 과거의 정치분쟁, 군사전략 또는 셰익스피어의 단점들을 늘어놓거나, 스스로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는 등의 일로 소일하고 있었다. 조지는 공주들의 생활을 사사건건 트집 잡는 일이 잦았는데 왕자들과는 달리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평화로운 일상을 계속하던 국왕은 그러나 세기가 바뀔 무렵 피트의 아일랜드 정책으로 말미암아 내정의 전면에 뛰어들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로마 가톨릭교도에 대한 억압을 끝낼 것을 절박하게 요청하고 있었다(가톨릭교도 해방). 소피트의 견해로 아일랜드의 반란은 단순히 영국과 아일랜드 의회의 결합책만으로는 조정이 불충분한 것이었으며 이에 덧붙여 가톨릭 해방을 위한 과감한 정치선언이 수반되어야 했다.

총리의 제안을 국가의 기강을 뒤흔드는 자멸책으로 받아들인 조지 3세는 국왕의 모든 권한을 동원하여 해방안을 철회시키려고 노력했으며 그결과 피트는 사임하고 헨리 애딩턴(후의 시드머스 자작 1세)이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1804년 애딩턴 내각이 붕괴하고 피트가 총리직에 복귀했을 때 신임총리는 과거와는 달리 이미 가톨릭 해방안을 포기한 상태였다.

국왕이 그토록 단호하게 억압조치의 해제를 거부했던 근거는 스스로 하원 내 평의원들의 입장을 간파했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정작 피트로서는 문제를 막바지 실력대결로까지 확대시킬 의향이 전혀 없었다.

말년(1806~20)

1806년 1월 소피트가 죽자 조지 3세는 휘그당의 폭스를 거국연립내각(1806~07)의 외무장관으로 맞아들였다.

폭스마저도 총애하게 된 국왕은 같은 해 그가 사망하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휘그 내각은 비록 단기간의 집권에 그쳤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의 강화를 시도했고 노예무역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국왕이 내정에 친히 간섭하여 각료들의 해임을 추진했던 것은 가톨릭 억압조치의 완화제안에 대해서뿐이었다. 가톨릭 문제에 대한 2번째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즈음 조지 3세의 건강은 또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국왕은 거의 시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문서의 철저한 검토를 고집했으며 국사의 수행을 위해 개인비서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렌빌 경은 국왕이 군대의 고위직급에 대한 가톨릭교도의 등용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으나 조지 3세는 오직 시드머스 자작만이 제안의 심각성을 일깨워줄 뿐 각료들 모두가 자신을 현혹시키려 하고 있다고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국왕은 국교회에 대한 신성한 의무감으로부터 각료들에게 가톨릭 문제를 더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요구했지만 내각은 이와 같은 분별 없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이에 따라 포틀런드 경(1807~09), 스펜서 퍼시벌(1809~12), 리버풀(1812~27)을 정점으로 하는 일련의 토리 내각이 향후의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국왕은 살아 있으되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여생을 보내야 했다.

늘 가까이 했고 왕자들에 대한 절망에 한 가닥 위로가 되어 주었던 막내딸 아멜리아 공주의 죽음(1810)은 쇠약한 고령의 국왕에게 크나큰 상실감을 가져다주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에는 극도의 착란 상태가 찾아들었고 의회는 웨일스 공의 섭정권을 인정하고 소피아 왕비에게 조지 3세의 보호감호를 위탁하는 칙령을 공표했다. 조지 3세는 간혹 평정상태를 되찾기는 했으나 끝내 착란증세를 극복하지 못했고 1820년 1월 29일 윈저 궁에서 눈을 감았다. '조지 윌리엄 프레더릭'이라는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조지 3세의 통치기간은 능력범위 이상의 과제를 부여받은 한 선의의 인간이 겪어야만 했던 고난과 역경의 세월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