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도 해방

가톨릭교도 해방

다른 표기 언어 Catholic Emancipation 동의어 구교도해방

요약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걸쳐 잇달아 제정된 여러 법을 통해 영국과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이 받아온 차별대우를 철폐하여 금지당했던 시민적 제 권리를 부여한 일.

종교개혁 뒤로 영국의 가톨릭교도들은 수많은 제한 규정에 시달려 왔다. 영국 가톨릭교도들은 땅을 살 수도 공무원·장교·의회의원이 될 수도 없었고 재산상속을 금지당했으며 가톨릭 의식을 치를 경우에는 벌금이 부과되었다. 더구나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은 의원 선거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프로테스탄트교도 친척에게 땅을 빼앗겨도 어쩔 수 없었다.

하노버 왕조가 들어설 무렵부터 가톨릭교도들은 사회·정치적 위협으로 비쳐졌으나 18세기말에 이르자 이같은 사회적 편견은 사라졌다.

1778년 제정된 제1차 구제법(Relief Act)으로 영국의 가톨릭교도들은 토지 등의 부동산을 매입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으며 아일랜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련의 조치가 있었다(1774·1778·1782). 1791년 영국 의회는 가톨릭교도들이 시민으로서의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도 가톨릭 의식을 치를 수 있도록 하는 또다른 법안을 통과시켰고, 1793년 아일랜드 의회는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에게 선거권과 공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주는 더욱 폭넓은 구제법을 통과시켰다.

1801년 영국과 아일랜드를 통합하는 합동법(Act of Union)이 통과된 뒤에는 열렬한 반가톨릭주의자였던 조지 3세와, 가톨릭교도들이 국가업무에 참여할 것을 두려워한 강력한 아일랜드 프로테스탄트교도 및 토리당의 저항에 부딪혀 그 이상의 해방조처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카리스마적인 아일랜드 변호사이자 웅변가 다니엘 오코늘은 그로부터 20년 동안 가톨릭교도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아일랜드 가톨릭교도 농민들과 중간계급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침내 1823년, 아일랜드에서 수천 명을 끌어들여 '가톨릭교도협회'를 구성했다.

1828년 영국 정부는 가톨릭교도들의 고충을 덜어볼 목적으로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맹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이 운동을 회유할 만한 법을 만들지 않으면 전국적인 규모의 아일랜드 봉기에 부딪힐 위험에 처했다.

오코늘 자신도 1828년 클레어 주(州) 보궐선거에 출마해서 자신이 의원에 당선되면, 의원들이 해야 하는 반가톨릭 맹세인 심사율이 철폐되지 않는 한 의회에 출석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내걸었다. 오코늘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영국 총리 웰링턴 공작과 로버트 필 경은 의회에서 1829년 가톨릭교도 해방령을 제정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법은 아일랜드와 영국의 가톨릭교도들에게 의원에 입후보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고 모든 공직에 선출될 수 있도록 했으나, 당시 가톨릭교도들이 진출할 수 있는 공직은 아주 적었다. 1871년 '대학심사령'(Universities Tests Act)으로 가톨릭교도들에게도 대학을 개방함에 따라 전체 영국의 가톨릭교도 해방은 사실상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