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

피트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Pitt the Younger
요약 테이블
출생 1759. 5. 28, 잉글랜드 켄트 헤이스
사망 1806. 1. 23,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총리(1783~1801, 1804~06).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피트의 제1차 내각(1783~1801)
  4. 피트의 제2차 내각(1804~06)
  5. 사적 생활과 성격
  6. 역사적 중요성
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
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

개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기간 총리로 재직하면서 총리직 강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생애

소(小)피트는 18세기 중반의 유명한 정치가인 채텀 백작 1세 윌리엄 피트(大피트)의 둘째 아들이다.

대피트는 프랑스와의 7년전쟁(1756~63)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이다. 어머니는 총리 조지 그렌빌(1763~65 재임)의 누이인 헤스터 그렌빌이었다. 피트의 성격이 매우 민감했으며, 아버지가 사립학교를 혐오했기 때문에 그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조숙한 소년으로 14세에 케임브리지대학교 펨브룩 홀에 진학했다. 건강이 줄곧 나빴기 때문에 1776년 귀족의 아들을 시험 없이 졸업시킬 수 있게 하는 낡은 특권을 이용해 졸업했다.

아버지가 1778년에 죽으면서 연 300 파운드가 안 되는 수입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피트는 1780년에 법률업에 뛰어들어 서부의 순회재판구에서 일했다. 1780년 9월에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출마했지만 나이가 어려 낙선했다(의회). 그러나 4개월 후 자신의 후원자와 의견이 갈라질 때는 사퇴한다는 조건으로 웨스트몰랜드에 있는 애플비 선거구의 의석을 얻었다.

피트는 성공적인 처녀연설을 했다. 그리고 1782년 3월 새로운 내각이 수립될 것이 명백해지자 놀랄 만한 자신감을 갖고 낮은 직책은 수락할 용의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1782년 7월 총리가 된 셸번 경 밑에서 그는 재무장관이 되었다. 1783년 2월 셸번 경의 동의하에 그는 야당으로 간 찰스 제임스 폭스에게 손잡을 것을 제의했지만 폭스는 셸번 경 밑에서 일하기를 거부했다.

전기작가 조지 톰라인(후에 피트의 전기를 썼음)에 의하면, 당시 피트는 폭스에게 자신은 셸번 경을 배신할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폭스와의 그러한 만남은 피트와 폭스간의 오랜 정치적 대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폭스는 놀랍게도 항상 왕이 바라는 대로 따라가려고 한 노스 경과 손을 잡고 셸번을 패배시켰기 때문에 셸번의 내각은 끝이 났다. 조지 3세는 자신이 미워하던 폭스에게 각료자리를 주려는 연립내각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트로 하여금 내각을 조직하게 했다.

그러나 피트는 하원에서 다수를 획득하지 못할 것을 알고 그 요청을 거절했고 결국 왕은 폭스와 노스에게 그 일을 맡겨야 했다. 포틀런드 공작이 명목적인 총리가 되고, 개혁파와 반개혁파가 혼합이 된 새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해 피트는 이미 전에 자신이 직접 관여했던 의회개혁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선거권의 확대를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부패를 방지하고 선거구를 더욱 현실에 맞게 만들 조처를 제안했다. 비록 그의 결의안들이 부결되었지만 개혁파들은 폭스보다는 피트를 의회지도자로 여겼다.

피트의 제1차 내각(1783~1801)

1783년 12월 상원에서 폭스의 동인도 법안이 부결된 후 조지 3세는 즉각 연립내각을 해산할 기회를 포착하고는 피트에게 내각을 구성하게 했다.

피트가 단지 왕의 도구로서의 총리직을 맡지는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의 첫번째 조처는 자신의 의견에 따라 폭스와 동료들을 새로운 내각에 참여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스는 동료인 노스 경이 배제된 정부에는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1784년 1월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사실상의 불신임 결의안이 39표 차로 통과됨으로써 피트의 정부는 패배했다. 그러나 피트는 사임하기를 거부했으며, 조지 3세는 폭스-노스 연립에 다시 굴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왕위에서 물려나려고 했다.

피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전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막후의 영향력에 의해 움직이는 총리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참고 기다렸다. 점차 의회 내의 연립세력으로 이루어진 다수파는 붕괴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많은 의원들이 총선에서 의석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면서 피트가 의회에서 해산이 불가할 만큼 충분한 다수를 획득하리라는 희망으로 2~3월에는 피트 편으로 넘어갔다.

3월 8일 야당은 1표 차이로 다수를 획득했고 3월 25일 의회는 해산되었다.

18세기에는 어떤 정부도 총선에서 패배하지는 않았으므로 1784년 피트의 승리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왕권의 영향'으로 새로운 하원은 국고에 의해 선출되었다. 임명제와 부정을 통해 피트는 다수파를 획득했고 비밀자금으로 투표권을 매수했다.

물론 개방적인 선거구에서는 여론이 피트를 도왔지만, 피트가 '국민의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왕의 임명을 시행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피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선거구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의원 선거에서 단지 한 차례(1790)만 경선을 벌였다. 피트가 총리가 되었을 때 국가의 신용은 미국 독립전쟁이 초래한 재정지출로 손상되어 있었다. 국가의 채무는 2억 5,000만 파운드나 되었는데 그당시 엄청난 액수였다. 피트는 적자를 회복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밀수를 조장하는 높은 관세를 매김으로써 밀수를 감소시켰다.

감사제도를 확립하여 정부수입에 대한 부정을 감소시켰다. 또한 관세와 현물세를 간소화했으며, 그것들을 단일한 기금으로 집어넣어 국가의 모든 채무에 대한 지불을 담당하게 했다. 1786년에는 새로운 원칙하에서 감채기금을 도입했다. 즉 100만 파운드의 재정흑자는 증권을 구매하는 데 전용되었고 28년 동안 복리로 축적되었다. 28년이 지나게 되면 수입은 한 해에 400만 파운드가 되었다. 1792년에는 모든 새로운 공채에는 1%의 감채기금이 첨부되어 45년 내에 상환되도록 법령으로 정했다.

그러한 제도는 평화시에는 상당히 잘 운용되었는데, 매년 수입잉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93년 전쟁이 발발한 후 정부는 낮은 이자의 공채를 높은 이자로 빌린 새로운 돈으로 상환했다. 폭스의 동인도 법안은 부결되었지만 그 법안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인도에서 영국의 영토가 확대되면서 그 행정을 동인도회사의 손에 맡겨두는 것보다는 정부가 감독할 필요가 있었다(대영제국). 그래서 피트는 그 자신의 동인도 법안을 제출했다(1784). 그는 동인도회사의 이사들을 감독하기 위해 통제부(Board of Control)라는 새로운 정부부서를 창설했다(인도법). 그는 또한 총독부를 봄베이와 마드라스의 하위정부를 모두 관장하는 최고기관으로 만듦으로써 바람직하지 못한 권위의 분산을 종식시켰다.

1786년에는 보충법령을 통해 참사회에 대한 총독의 권위를 증대시켰다. 1773년 이후 벵골의 총독이었던 워런 헤이스팅스는 1785년에 귀국했는데, 그는 인도에서 영국의 권위를 크게 증대시켜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탄핵을 받아야 했다. 피트는 정직하게도 헤이스팅스에 대한 탄핵은 정당한 근거가 있다고 믿었고, 아시아 민족들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영국이 불의와 억압의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조사를 지지했다. 그러나 탄핵을 한 인사들은 정당하지 못한 원한으로 일을 처리했다. 재판은 7년간이나 질질 끌었으며 마침내 헤이스팅스는 방면되었지만 그는 재판비용으로 빈털털이가 되었다.

제국에 관련된 또다른 하나의 문제는 캐나다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1791년의 제헌법으로 퀘벡은 프랑스 주민이 압도적인 로어캐나다와 영국 주민이 압도적인 어퍼캐나다로 나뉘었다.

유형수들이 최초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송되었을 때 총리직에 있던 피트는 오스트레일리아를 유형지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피트의 대외정책은 별반 성공적이지 못했다. 1788년에 그는 프로이센 및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제한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질상으로는 그 동맹은 오직 한 가지 목적에만 유용했다. 즉 프로이센의 외교적 지지로 1790년에 피트는 눗카 해협 문제로 인한 분쟁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스페인에 승리할 수 있었다(눗카만 논쟁). 그래서 북아메리카 대륙의 서해안에서 교역과 정착의 독점권을 갖고자 하는 스페인의 요구는 마침내 분쇄되었다.

그러나 동유럽에 대한 피트의 개입은 그러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흑해에서 러시아의 우위를 확립하고자 애썼다. 1791년 3월 피트는 그녀에게 최후통첩을 보내 크림 반도를 제외한 모든 정복영토를 술탄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투르크를 지원하는 그의 정책은 전내각의 지지를 받지도 못했으며 여론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심하게 타격을 받은 정부는 정책을 선회해야 했다.

비록 영국정부가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에 의해 시작된 유럽의 전쟁에 직면해 중립을 고수했으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프랑스 혁명전쟁). 평화의 유지를 불가능하게만든 것은 1793년 1월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의 처형사건이 아니라 프랑스 군대가 중립영토를 침략하는 것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통치자를 쫓아내려고 하는 어떠한 유럽 국민에게도 군사적인 원조를 약속했던 1792년말의 도발적인 법령들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군대에 대해 승리한 이후 승리를 자신하고 있던 프랑스인들은 영국도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여기고 있어 1793년 2월 1일 영국과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했다. 피트는 프랑스 왕정을 복위시키기 위한 개입은 거부했다. 그는 영국의 사활이 걸린 무역 및 식민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다. 프랑스 혁명은 1785년에 피트에 의해 제안된 법안이 부결된 이후 잠잠하던 의회개혁 운동을 재기시켰다. 그러나 개혁의 대의는 개혁옹호자들이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사태를 인정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불신을 받았다.

급진주의자들의 현명하지 못한 시위들은 정부로 하여금 억압적인 법률에 호소하도록 만들었다. 1792년 5월 선동적 언론에 대한 포고령이 발포되었으며 정상적으로는 재판 없이 구속하는 것을 금지하는 인신보호법이 1794년에 정지되어 1801년까지 효력을 상실했다. 프랑스 혁명은 아일랜드에서도 새로운 반목을 일으켜 오래된 종교적 불화를 악화시키고 1798년에는 반란을 불러일으켜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1792년에 이미 피트는 두 나라의 궁극적인 통합만이 아일랜드의 종교적인 문제의 해결방안이라고 주장했다.

1798년의 사건들로 인해 그는 통합이 급박하게 요청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규모 부정으로 통합조처는 아일랜드 의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피트 내각의 반대, 특히 왕의 반대로 인해 그는 보충적인 조처들(가톨릭의 해방과 가톨릭과 비국교도 성직자에 대한 봉급지불)은 통과시킬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피트는 1801년 2월 3일 사임했으며 그의 친구 헨리 애딩턴이 정부를 구성했다. 그 위기로 말미암아 왕은 또다시 정신이 이상해졌으며, 3월에 회복된 후 그는 피트로 인해 병이 났다고 하면서 피트를 비난했다.

피트는 왕의 재위시에는 결코 가톨릭 문제를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애국적인 동기로 인해 피트는 새로운 내각을 지지하기는 했으나 1802~03년 회기의 수개월 간 그는 월머 성에서 머물며 의회에는 전혀 출석하지 않았다. 월머 성에서 그는 남동 5항(Cinque Ports : 중세 때 특권이 부여되었던 잉글랜드 남동 연안의 5개항)의 장이라는 오래된 관직을 가지고 지방의 의용병력을 조직하는 일을했다.

1803년 3월 애딩턴은 피트에게 정부에 참여할것을 권했지만 피트는 총리로서가 아니면 정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했다. 전쟁은 1803년 5월에 다시 발발했다. 피트는 차츰 정부의 재정정책과 증대되는 침략위협에 대한 정부의 대비책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다. 애딩턴을 지지하는 다수파는 점차 와해되었고 결국 그는 사망했다. 4월 30일 왕은 피트가 새로운 내각을 조각할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렸다. 그는 정당을 초월한 정부가 바람직하다고 답변했으나 폭스를 배제시키려는 왕의 결심에는 동의했다.

피트의 제2차 내각(1804~06)

피트의 제2차 내각은 제1차 내각에 비해 약체였다.

그것은 다른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애딩턴의 그룹이 야당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대항한 제3차 대 프랑스 동맹(피트의 주도로 구성된 러시아·스웨덴·오스트리아의 동맹)은 1805년 울름과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붕괴되었다(제3차 동맹). 그리고 그해는 10월에 넬슨이 트라팔가에서 거둔 승리(이 승리는 영국에 대한 침략의 위협을 종식시키고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영국 해군력의 우위를 확보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난 속에서 저물어갔다(트라팔가르 해전). 피트의 건강이 더욱 나빠져갔다.

그는 1805년 11월 9일에 런던의 길드 홀에서 마지막 대중연설을 했다. 1806년 1월 15일쯤에는 그의 몇몇 동료들은 그의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그를 사임시킬 각오를 했고 또 왕도 그의 후임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몇 주 후 죽었고 2월 22일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묻혔다. 그의 빚을 청산하기 위한 4만 파운드의 지불안이 만장일치로 하원에서 통과되었다. 1801년에도 그의 친구들은 그가 재정상의 곤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1만 2,000파운드를 모아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돈에는 무관심하고 공사에만 몰입해 있었던 그는 상당한 수입을 무책임한 하인들과 상인들이 낭비해버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사적 생활과 성격

비록 의회와 내각에서는 유창하고 강력했지만 그는 사회에 대해서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고 상식적인 면이 부족했다.

그는 항상 눈에 두드러지게 사회생활로부터 벗어나 있었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고 친구도 별로 없었다. 심지어 정부의 성원들조차도 그를 가까이 하기 힘들다는 불평을 했다. 1801년 그의 사직은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당대의 어떤 사람은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또 그에 대해 아무런 치사도 없으며 어떠한 기부금도 없다. 어느 곳에서도 어떠한 동요도 없다"라고 썼다.

그가 죽기 오래 전에 포르투갈산 포도주에 대한 탐닉으로 한층 악화된 육체적 질환은 그의 활동을 감소시켰다. 피트의 경험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에는 발을 디뎌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영국 땅조차 그에게는 대부분 낯선 곳이었다. 그는 결코 문인이나 독창적인 사상가들과는 접촉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후원에 있어서 그는 문학·과학·예술을 무시했다. 그는 그가 펼치는 모든 일에 대해 오랫동안 지나치리만큼 성공을 자신했다. 결국 건강이 나빠지고 1805년 나폴레옹이 큰 승리들을 거둠으로써 이러한 낙관주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록 처음에는 의회개혁운동과 관련을 가졌지만 1785년 그의 법안이 부결된 이후 그 문제를 다시 다루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산업혁명으로 초래된 사회문제들을 다루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공직에 있었던 긴 세월 동안 야만적인 형법, 가혹한 수렵법, 감옥 행정, 지방통치 등을 개혁하기 위한 아무런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설솜씨가 매우 좋았던 그는 그 시대에 탁월한 토론 솜씨로 하원을 지배했다. 의회에서의 그의 행동은 조심성, 확고한 태도, 전무후무한 탁월한 능력 등이 혼합된 것이었다.

역사적 중요성

피트의 활동이 가지는 헌정적 의미는 자주 오해되어왔다.

그는 근대적인 총리는 아니었다. 어떤 시기에도 그는 그 자체의 존재를 선거구민에게 의존하는 하원의 다수를 지배하는 잘 조직되고 응집력 있는 정당의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결코 국가가 선택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왕이 임명한 사람으로 왕의 신뢰를 유지하는 동안에만 총리직을 유지했다. 그는 아일랜드 정책이 왕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1801년 사임했다. 후임자가 전시총리로서 부적격했기때문에 피트가 3년 뒤에 다시 총리직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피했지만 그는 자신의 조건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왕의 조건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는 하원의 지지에 의존하기보다는 왕의 호의에 더욱 의존했다. 최대의 위기는 정신병에 걸린 왕의 지지를 잃어버린 1788~89년 겨울에 찾아왔다. 만약 야당을 후원한 방탕한 웨일스 공이 섭정이 되었더라면 피트는 틀림없이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왕의 지지 없이 어느 누구도 총리직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내각에서 그의 절대적 권위에는 명백한 제한이 있었다. 내각에서 여러 동료들은 당시의 중요한 안건들에 있어 그에 반대했다. 더욱이 피트는 빈약한 지성, 심각한 비합리적인 편견(물론 이런 편견은 당시 영국인 대다수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음)을 가진 군주를 다루어야만 했다.

비록 내각에서 가지는 피트의 우위가 종종 과장되어왔지만 여러 부서의 일을 감독·조정하고 또 왕의 신뢰를 받을 총리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그의 내각 이후에 결코 의문이 제기되지 않았다. 이러한 지위를 피트가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굳센 성격 덕택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총리직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권력에 있었던 19년은 종종 최초의 영국 총리로 간주되는 18세기 초기의 로버트 월폴 경의 재임기간보다 7년이나 더 길었을 뿐만 아니라 보다 가까웠던 노스 경의 재임기간보다 길었다.

이제껏 피트가 새로운 토리당의 지도자로 등장했다고 종종 주장되어왔다. 확실히 왕의 대권을 인정한 각료로서 그는 왕에게 국민들의 선택을 강요하려고 한 휘그당의 전통과는 다른 토리당의 전통을 대표했다. 그러나 그는 하원에서 다수를 지배하는 정당의 위대한 지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를 개인적으로 추종하는 사람은 50명을 넘지 않았다. 지속적인 노력, 탁월한 웅변, 강력하고 유창한 연설 실력을 갖춘 의원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예무역 폐지법안, 의회개혁법안, 가톨릭 구제법안 등을 통과시키는 일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