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사

캐나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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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캐나다의 역사.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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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캐나다의 뉴프랑스 시대
    1. 개요
    2. 백인회사
    3. 대(對) 영국전쟁
  2. 퀘벡 식민지 시대의 캐나다
  3. 영국령 북아메리카
    1. 항의와 반란
    2. 캐나다의 통일
  4. 캐나다 연방의 성립과정
  5. 캐나다 자치령
    1. 개요
    2. 리엘의 반란
    3. 미증유의 번영
    4. 반미 감정
    5. 전후의 정세
    6. 대외정책
    7. 경제정세의 변모
  6. 제2차 세계대전과 이후의 캐나다
    1. 개요
    2. 국가주권과 통일
    3. 진보보수당 시대
    4. 퀘벡의 변모
    5. 트뤼도 정권
캐나다(canada)
캐나다(canada)

캐나다의 역사는 1497년 잉글랜드 왕이 원조한 베네치아 탐험가 존 캐벗이 대륙에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은 프랑스였다. 1534년 프랑스 항해가 자크 카르티에가 왕 프랑수아 1세의 이름으로 이 지역을 프랑스령 뉴프랑스로 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후 뉴프랑스와 영국령 주둔 영국 군대는 끊임없이 충돌하며,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결국 1706년에는 뉴프랑스 전지역이 영국에 항복했고, 1763년 영국 국왕은 퀘벡도 영국의 식민지임을 선언했다.

1864년 10월에 열린 퀘벡 회의에서는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전역을 통일하는 연방 기구의 설립이 결정되었다. 1867년 영국령 북미법이 시행되었고, 이 법에 따라 연방이 결성되었다. 캐나다 연방은 주의 결합체로, 통치권은 연방 정부와 주정부로 분할되었다. 연방의 결성은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영국계 캐나다인과의 사이에 맺어진 기본적인 맹약이기도 했다.

캐나다의 뉴프랑스 시대

개요

1534년 프랑스의 항해가 자크 카르티에는 세인트로렌스 만(灣)에 입항하여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이름으로 이 지역을 프랑스령 뉴프랑스로 할 것임을 선언했다.

1600년경에는 오대호 지방 등 내륙에서도 모피 교역이 널리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역시 프랑스인 사뮈엘 드 샹플랭은 1603년 세인트로렌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이듬해에는 북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프랑스 식민지인 포트로열(지금의 노바스코샤 주 아나폴리스로열)의 건설에 힘썼다. 그뒤 1608년에는 새롭게 식민지를 건설하여 퀘벡이라 했다.

1635년 사뮈엘 드 샹플랭이 죽었을 때 포트 퀘벡의 성인 인구는 불과 85명이었다(→ 식민주의, 프랑스사).

백인회사

1627년 프랑스 정부는 '백인회사'(정식 명칭은 뉴프랑스회사)에 대해 1629년부터 15년간 이 지방에서의 모피 교역의 독점을 인정하는 한편, 매년 200~300명을 이주시키는 조건으로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 전역을 포함하는 뉴프랑스 식민지를 개발할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은 그후 백인회사에 부여한 특허장을 취소하고 뉴프랑스를 국왕 직할지로 결정했다.

1659년 프랑수아 드 몽모랑시 드 라발이 직할지의 초대 대주교로 부임했으며 교회는 일반적인 종교활동 외에도 병원이나 학교를 설립, 그 운영을 맡게 되었다. 직할령의 초대 총독인 장 바티스트 탈롱(1665~68, 1670~72)은 식민지 건설과 산업을 촉진시키는 한편 서부 식민지를 확대시켰다. 또한 1682년에는 라 살이 미시시피 강 하구를 발견하는 귀중한 성과를 얻게 되었다.

대(對) 영국전쟁

당시 뉴프랑스는 이로쿼이족만이 아니라 영국인 이주자들로 인해 골치를 썩고 있었으며, 영국령(뉴욕 및 뉴저지 식민지) 주둔 영국 군대와 잦은 충돌이 있었다. 1740년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시작되자 북아메리카의 지배 세력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교전하게 되었고, 그결과 1745년에 뉴잉글랜드 주민들이 루이스버그를 공격·점령하게 되었다. 그외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전투가 없었고 아헨에서 열린 회의에 의해 유럽 전쟁이 종결되자 루이스버그도 뉴프랑스에 반환되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아헨의 강화조약을 잠정적인 휴전 조약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소강 상태는 오하이오 강 유역의 지배권 다툼으로 끝이 나고 프랑스가 1749년에 포트듀켄(지금의 피츠버그)을 건설하자 영국은 버지니아의 청년 장교였던 조지 워싱턴을 파견하여 이 지역의 프랑스 세력을 격퇴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실패로 끝났으며 1755년에 영국 군인 에드워드 브래덕 장군 역시 격퇴에 실패하고 전사했다.

유럽에서 7년전쟁이 시작되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의 프랑스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프렌치-인디언 전쟁(1754~63)이 시작되었다. 1756~58년에는 프랑스군이 우세했으나 그뒤 영국군이 세력을 만회하여 1758년에는 루이스버그를, 이어 1759년에는 퀘벡을 공략했다. 그리하여 1760년에는 몬트리올이 항복했으며, 뉴프랑스 전지역도 항복하고 말았다.

퀘벡 교구 사제회(Old Quebec Seminary)
퀘벡 교구 사제회(Old Quebec Seminary)

퀘벡 식민지 시대의 캐나다

퀘벡 (Quebe)
퀘벡 (Quebe)

파리 조약(1763)으로 평화가 회복되자 뉴올리언스 주변을 제외한 미시시피 강 동쪽의 뉴프랑스 전역이 영국에 할양되었으며 프랑스에는 뉴펀들랜드에 가까운 상피에르, 미클롱의 2개의 섬과 뉴펀들랜드 해역의 어업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때 6만여 명의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영국 국적을 얻게 되었으며 1763년의 국왕 선언에 의해 퀘벡도 행정상 다른 영국 식민지와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다.

뉴잉글랜드에서 캐나다로 옮겨온 이주자들은 퀘벡이 아니라 노바스코샤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노바스코샤는 다른 영국 식민지와 똑같은 식민지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퀘벡 주민들이 장래 계속해서 프랑스인 의식을 지켜갈 것임이 명백해지자 영국은 정책을 바꾸어 1774년 퀘벡 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퀘벡에서는 영국의 형법과 프랑스의 민법을 병용할 것, 가톨릭 교회를 보호하고 가톨릭교도의 공직 취임을 인정할 것, 통치는 총독과 참사회에 맡기지만 선거에 의한 의회는 설치하지 않을 것을 결정했다. 이 법은 프랑스계 캐나다인으로부터는 높이 평가받았지만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의 불만을 사게 되어 미국 독립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영국인은 이 법률에서 캐나다와 미국의 경계선을 프랑스가 일찍이 주장한 것과 같은 오하이오 강 이북, 미시시피 강 이동(以東)으로 결정지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 독립전쟁이 종결되고 미국의 독립을 인정한 파리 조약에 따라 노바스코샤·뉴펀들랜드·퀘벡(오하이오 강 유역으로 지금의 미시시피·위스콘신·미네소타 각 주에 해당하는 부분은 포함되지 않았음)은 영국령 북아메리카가 되었으며 뉴잉글랜드에 거주하면서 독립전쟁에 반대하여 집이나 토지를 잃은 약 4만 명의 피난민(국왕파)이 미국에서 이 지역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 때문에 노바스코샤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으며 영어를 쓰는 인구가 약 1만 명이 늘어났다.

피난민의 유입은 영국령 식민지의 재편을 초래하여 1784년에는 노바스코샤의 분할에 의해 새로 뉴브런즈윅 식민지가 생겨났다.

1791년 퀘벡 식민지에서는 '제헌법'에 따라 대의제에 의한 정치가 인정되어 임명제의 상원과 선거제의 하원이 설립되었다. 또 캐나다는 세인트로렌스 강을 경계로 하여 로어캐나다(지금의 퀘벡 주)와 어퍼캐나다(지금의 온타리오 주) 두 식민지로 나누어졌다. 로어캐나다의 주민은 대부분 프랑스계였으며 어퍼캐나다는 뉴브런즈윅처럼 절반이 영국계였다.

영국령 북아메리카

항의와 반란

1820년 이후 어퍼캐나다·로어캐나다 식민지, 노바스코샤에서는 정치적 문제로 정세가 험악해졌다.

로어캐나다에서의 고루한 관료들과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충돌은 첫째, 관료의 대부분이 영국계이고 그들에 반대하는 세력의 대다수가 프랑스계였던 점, 둘째, 행정회의와 상원에서는 영국계가 우세하고 하원에서는 프랑스계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점에 기인한다.

이런 이유로 정치만이 아니라 인종이나 제도도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노바스코샤와 어퍼캐나다에서는 로어캐나다와는 달리 주민의 대다수가 국왕파에 속하지 않는 미국인 후손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논쟁이 생기기 쉬웠다. 관료들은 미국계 주민들을 충성심이 없다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개혁파 사람들은 2가지 제안을 했다.

그 하나는 상원을 선거제로 한다는 것(이 제안에는 총독이나 관리도 선거에 의해 뽑아야 한다는 것이 시사되어 있었음)이고 다른 한 가지는 총독의 자문기관인 행정회의는 선거제인 하원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안이 완전자치, 즉 독립에의 길로 연결되지 않을까 우려하여 식민지 내의 문제에만 적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제안에 담겨 있는 정신은 1830년대 식민지 사회에 한층 강한 자극을 주었다.

영국 본국의 휘그당 정권이 개혁파의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했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이것이 원인이 되어 1837년 로어캐나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의 일부는 프랑스계 반정부파의 지도자 루이 조지프 파피노가 계획한 것이며 그밖에 관료나 그 지지자들도 부분적으로 반란을 선동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그것은 마땅히 일어나야 할 것이 었으며 절망한 민중의 감정이 폭발한 것이었다.

캐나다의 통일

이들 반란은 소규모였지만 구태의연한 정치 방식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했다.

영국 정부는 더럼 경을 총독 겸 판무관으로 임명하여 현지에 파견, 반란의 원인을 조사하도록 했으며 사후 처리문제에 관한 권고를 구했다. 뒤에 유명해진 그의 조사 보고에는 캐나다에 관한 2가지 견해 및 영국계 캐나다인의 잘못된 견해가 구체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캐나다에 관한 견해는 캐나다를 재통일해야 한다는 것과, 식민지문제 처리 의무를 갖는 책임정부, 즉 자치정부를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영국계 캐나다인의 잘못된 견해라 하는 것은 영국계 이주민을 많이 이주시켜 프랑스계 캐나다인을 압도하여 그들을 영국인으로 동화시킨다는 것으로, 1763년 국왕선언 당시의 고루한 사고방식과 같은 의견이었다.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는 1840년 영국 본국에서 성립한 합동법(Union Act : 캐나다 법이라고도 함)에 의해 통일되어 각각 캐나다 내의 캐나다이스트와 캐나다웨스트가 되었다. 마침내 1848년 노바스코샤와 캐나다에서는 현안인 자치 정부의 수립이 실현되었다.

한편 캐나다이스트와 캐나다웨스트 양 식민지의 의회는 1840년대에 획득한 자치권을 행사하여 법률이나 정치제도의 개선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캐나다는 프랑스 민법을 집대성하여 법전을 작성했으며 교회와 정치를 분리시키는 외에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하고 공립학교 제도를 두었으며 상원을 선거제로 바꾸었다.

캐나다의 다른 영국령 식민지들도 캐나다를 따라 개혁이나 새로운 정책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1858년 이후 통일 캐나다의 정부 기능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합동법에 따라 캐나다이스트와 캐나다웨스트 의회에는 동수의 의석이 할당되었지만 1851년 이후 캐나다웨스트는 인구에 비해 의석이 적은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인구에 비례한 의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하여 논쟁은 더욱 격렬해졌으며 그결과 1864년 의회정치는 완전히 정지상태에 빠졌다.

캐나다 연방의 성립과정

1850년대 후반에 들어서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전역을 통일하여 연방을 구성하는 안이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보수당의 존 맥도널드, 조르주 에티엔 카르티에, 자유당의 조지 브라운 등의 정계 지도자들은 영국령 북아메리카 연방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연립 정권을 수립했고 이에 따라 퀘벡에서 전체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1864년 10월에 열린 퀘벡 회의에서는 연방 기구의 설립이 결정되었다. 영국 의회는 이러한 결정을 약간 수정하여 입법화했으며 1867년 영국령 북미법으로 시행되었다. 이 법에 따라 노바스코샤·뉴브런즈윅·퀘벡(캐나다이스트)·온타리오(캐나다웨스트) 4개 식민지가 통합되어 연방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뉴펀들랜드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는 가맹을 거부했다. 이 새 연방은 캐나다 자치령이라 불렸으며 대영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캐나다 연방은 주(州)의 결합체로, 통치권은 연방 정부와 주정부로 분할되었다. 캐나다 연방정부는, 주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서 남북전쟁의 발발을 저지할 수 없었던 미국 정치기구의 약점을 고려한 뒤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헌법에 규정된 국가 권한 외에 헌법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주의 정치에 관련 있는 잉여 권한을 갖는 것으로 했다.

정치 체제는 1840년대 이후의 영국의 체제를 기반으로 했다. 그리하여 영국 정부가 최고의 권위를 갖고 연방의 결정사항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그 운용 범위 내에서 캐나다 연방은 광범위하게 실질적인 자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연방 결성은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영국계 캐나다인과의 사이에 맺어진 기본적인 맹약이기도 했다. 이것은 법률적 혹은 정치적인 맹약이 아니라 도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캐나다의 국체와도 연관이 있었다. 즉 프랑스계 캐나다인 지도자들이 캐나다에서 본국의 프랑스 사회와 똑같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었던 것을 자유롭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요구 중에는 그들 자신의 민법, 주의 독자적인 교육제도를 확립할 권리, 퀘벡 및 연방의회와 법정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 각 주의 소수파 종교단체들이 자주적인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권리의 보증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연방 결성 이후 캐나다 연방의 국력은 이들 맹약의 준수 또는 위배에 좌우되었다.

지도 속의 캐나다
지도 속의 캐나다

캐나다 자치령

개요

캐나다는 1867년 7월 1일 초대 총리 존 맥도널드 때에 자치령을 형성했고, 그후 영토를 브리티시컬럼비아 동부 경계까지 확장했다.

이 식민지는 1866년 밴쿠버 섬과 합병한 뒤 캐나다 연방에 가맹하기 위한 운동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연방 합병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동부로 통하는 철도의 부설을 연방에 요구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지자 1871년 캐나다 연방에 가맹했다. 1873년에는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가 유리한 조건으로 캐나다 연방에 가맹하는 데 성공했다.

1880년 영국 정부가 북극해의 모든 섬의 관할권을 캐나다 연방에 이관함으로써 캐나다 컬럼영토는 급속히 확장되어갔다.

1873년 알렉산더 매켄지를 수반으로 하는 자유당 내각이 자유보수당에 이어 정권을 잡았다. 매켄지 정권은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캐나다 연방 가맹에 관한 협약을 이행하는 한편 철도 건설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건설을 인수할 개인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는 국가 세입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부분적인 건설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주민들의 분노를 사 연방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 이무렵 야당이었던 보수당은 다음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강으로 내걸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는 데 몰두했다.

자유보수당의 맥도널드는 드높은 국민의식과 기업의 요구에 주목하게 되었으며 이를 고려하여 '국책'(國策 : National Policy)을 제시했다. 그는 이 국책에서 캐나다 산업의 보호를 약속했다. 1878년 자유보수당은 이 국책을 정강으로 선거에 임해 정권을 잡았으며 이듬해에는 지금까지 세입만을 목적으로 한 관세에 보호관세정책을 적용시켰다.

보수당 정부는 정권을 잡자 바로 태평양철도의 건설에 착수했다. 캐나다태평양철도회사가 설립되어 정부로부터 서부의 약 1억 125만㎢의 토지와 조성금 2,500만 달러를 받고 철도부설작업을 개시하여 1885년 완성했다.

리엘의 반란

북서부 지역에서는 1869, 1885년 2차례에 걸쳐 반란이 일어났다.

그곳 주민들은 주로 '메티스'(metis)로 불리는 프랑스 혼혈로서 이들은 자신들이 지켜온 프랑스 문화의 전통이나 종교, 특히 토지소유권을 지키기 위해 루이 리엘을 지도자로 캐나다 정부에 도전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2차례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이것은 2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캐나다 정부가 메티스와 인디언이 북서부 변경의 식민지를 대표하여 연방 의회에 의원을 보내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식량을 배급하고 토지의 권리서를 발행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시킨 점이며, 다른 하나는 리엘이 재판에 회부되어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진 점이다.

퀘벡에서는 그의 처형에 대해 항의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퀘벡의 주민들은 지금도 리엘을 영웅시하고 있다. 리엘의 처형으로 연방 의회의 의석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퀘벡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의식이 강한 프랑스계 캐나다인 정권이 대두하여 예수회 부동산법(Jesuit Estates Act)을 성립시켰다.

이 법은 1773년에 해산되어 토지를 몰수당한 예수회에 대한 보상을 규정한 것으로 법이 성립된 뒤 정부는 로마 교황에게 보상금의 지불 방법을 결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온타리오 주의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의 분노를 샀으며 자유보수당의 정치가 매커시는 교황의 '캐나다 내정개입'에 대한 반대 운동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1889년 매커시는 1870년의 매니토바 조령에 의거해 종파별 학제가 실시되고 있던 매니토바 주에 가서 가톨릭이 세력을 증대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에 자극을 받아 매니토바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는 것과 가톨릭 학교를 인정하고 있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매니토바의 프랑스계 주민 및 가톨릭 교도의 권리에 대한 비난은 법정에서의 분쟁으로까지 발전했고 그결과 매니토바 주는 종전과 같은 입법권을 인정받았다(매니토바 법, 프랑스계 캐나다인).

미증유의 번영

자유당이 행정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은 1880, 1890년대의 심각한 불황이 끝나고 경기 회복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에 정권을 잡은 점이었다.

캐나다는 1896~1912년 전례 없는 번영을 이루었다. 그결과 서부에도 이주자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이와 같은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초원지대의 밀 생산량의 급속한 증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캐나다 북부철도 및 캐나다 대륙횡단철도와 연결되는 태평양 대간철도(Grand Trunk Pacific)가 건설되었다. 1905년에는 앨버타 주와 서스캐처원 주가 설립되어 다른 주와 동등한 자치가 인정되었다.

반미 감정

1911년 로리에 내각은 반미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한 와중에 붕괴되었고 이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호황시대가 끝나기 시작한 시기에 로버트 보든을 수반으로 하는 보수당 정권이 권좌에 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의 벨기에 침략이 시작되자 캐나다는 영국과 합동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1917년 이후 캐나다는 영국 전시내각을 통해 전쟁지도에 관여하게 되어 보든 총리가 영국 정부의 작전회의에 참석했다. 종전 후의 강화회의에도 참가하게 되어 영연방 내의 일국으로서 조약에 조인했으며 독립국으로서 국제연맹에 가맹했다.

전후의 정세

국내에서는 종전 직후부터 경제가 침체하면서 생활비의 앙등과 농산물 가격 하락에 시달려 전국적으로 민심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구태의연한 제정당에 반항하여 정치활동을 개시했으며 몇개 주에서는 주정부를 점거하기도 했다. 그후 농민들의 전국적인 정치운동을 주체로 하는 전국진보당(National Progressive Party)이 결성되었다. 노동자계급의 불안은 생활비의 앙등, 캐나다 서부에 확산된 노동조합운동, 혁명사상의 침투 등이 원인이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파업이 일어났는데 가장 격렬했던 것은 1919년 위니펙에서 일어난 총파업이었다.

또한 캐나다 북부철도와 태평양 대간철도가 도산하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그후 캐나다 정부가 재건에 착수하여 1923년 캐나다 전국철도가 개통되었다.

그후에도 퀘벡 주에서는 프랑스계 유권자들이 보수당 정부로부터 계속해서 소외당했다. 이에 자유당은 로리에를 계승할 당수로 퀘벡 주민에게 환영받을 만한 인물인 윌리엄 L. 매켄지 을 선출했다.

1921년의 선거에서 킹이 이끄는 자유당은 퀘벡 주에서 완승을 거두었으며 진보당의 지지를 얻어 자유당 소수파 내각이 탄생했다. 1920년대 전반을 휩쓴 불황도 후반에 들어서서는 호황으로 돌아섰다.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여 농민들은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공업 역시 외국 자본의 유입에 힘입어 활기를 띠었다. 이 시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미국이나 영국의 기업이 캐나다에 진출하여 공장을 건설한 것이었다. 자유당은 계속해서 퀘벡 주민의 지지를 얻었으며 점차 투쟁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진보당원들을 흡수해갔다.

대외정책

이 시대에 캐나다는 대외관계에서도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캐나다가 단독 국가로서 외교상의 대표권을 주장하여 승인된 것은 1920년이었으며, 1921년에는 최초로 캐나다의 공사관이 워싱턴에 설치되었다. 뒤이어 파리·도쿄[東京]에 공사관이 설치되었으며 1923년에는 독립국가로서 조약을 체결할 권리를 인정받아 미국과 우호협정을 체결했다. 이처럼 자치체로서 몇 가지 주장이 승인된 뒤에는 대영제국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성명을 발표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1926년 대영제국회의에서 성명 방식이 결정되어 "영연방의 각 자치령은 영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연합하여 있는 국가이며 각각의 나라를 결합해주고 있는 것은 공통 군주에 대한 충성심뿐이다"라는 선언이 발표되었다.

1931년 웨스트민스터 법이 제정되었으며 이로써 대영제국의 선언은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

경제정세의 변모

1930년대에 캐나다도 세계 각국에 밀어닥친 경제불황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초원지대가 오랜 기간 가뭄에 시달리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1930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패배하고 리처드 베넷(뒤의 자작)을 수반으로 하는 보수당이 1935년까지 정권을 잡았다. 같은 해 정권은 다시 자유당에게 넘어 갔다가 국가연합당(Union Nationale)이 1936년에 정권을 잡았다.

캐나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것은 영국의 선전포고가 있은 지 1주일 후였는데 이는 독립국가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캐나다에서는 국제연맹의 이상이 국민들의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 전체가 국제연맹의 태도에 전폭적인 지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국제연맹이 1930년 만주사변 당시 일본이 취한 행동에 대한 제재를 결의했을 때 그에 대한 지지를 삼가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에 대해 국제연맹이 경제제재를 가할 것을 결의했을 때도 캐나다 대표는 이를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이후의 캐나다

개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캐나다는 순식간에 경제불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1942, 1944년에 징병문제로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영국계 캐나다인 사이도 1917년 당시와 같이 반목이 표면화되는 일 없이 단결이 유지되었다.

대미관계도 전례 없이 밀접한 협력관계가 유지되어 방위·생산·강화 문제에 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와 같은 협력 태세는 종전 후에도 계속되어 캐나다에 레이더 경보장치망이 건설되었으며, 북아메리카 상호방위협정이 체결되기도 했다. 1958년에는 북아메리카 공동사령부(NORAD)가 발족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대외관계뿐만 아니라 국내문제에도 현저한 변화를 초래했다. 예를 들면 종전 직후에 전후의 경기침체를 피하기 위해 실업보험과 가족수당과 같은 사회복지제도가 확립되어 권력과 자원배분의 관계에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을 끼치던 제도가 개선되었다. 또한 연방정부는 각주에 대한 보조금 교부제도를 실시하여 가장 가난한 주에서도 최소한의 복지정책을 실시할 수 있도록 했다.

대외관계 면에서도 국제연합(UN) 창립당시 커다란 활약을 했다. 캐나다 정부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경찰기구로서 안전보장이사회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캐나다를 '중간세력'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했다. 또한 군사적으로는 비교적 약체이지만 경제적으로는 강대국임을 들어 UN의 경제·사회 관계기구에 캐나다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요구했다.

국가주권과 통일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캐나다의 전쟁수행을 국내외적으로 순조롭게 이끈 총리 매켄지 킹은 1948년 영연방 내에서 최장기 집권기록(1921~26, 1926~30, 1935~48)을 수립한 뒤 물러났는데 그가 정권 획득 이래 추진해온 캐나다 국가주권의 확립과 통일은 1949년 달성되었다. 전자는 캐나다 최고재판소의 영국 추밀원에 대한 상고 폐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로써 캐나다의 정식 국명은 '자치령'을 뺀 '캐나다'가 되었다. 후자는 1949년 5월 뉴펀들랜드가 캐나다에 가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905년 이래 대략 45년 만에 1개주를 가입시켜 1867년 연방결성 이래부터의 염원이 실현된 것이다. 킹의 후계자는 같은 자유당의 루이 생 로랑으로, 그는 캐나다 사상 2번째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총리가 되었다.

1957년까지의 생 로랑시대에 캐나다는 경제적으로 눈부신 번영을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과 아시아가 피폐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아메리카는 연합국측의 승리를 받쳐준 무기고이자 식량고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비교해도 여유가 있었던 캐나다는 전후 유럽에서 이주민이 쇄도하여 많은 외국자본이 유입되었다. 이주민들은 노동자로서 또는 소비자로서 캐나다 경제를 발전시켰다.

진보보수당 시대

캐나다의 정계 판도는 1956년의 파이프라인 건설문제를 계기로 변화의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19세기말의 대륙횡단철도 부설에 필적할 만한 대계획으로, 앨버타 주의 천연 가스를 동부로 공급하는 캐나다 횡단 파이프라인 건설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대한 국가융자를 가능하게 하는 법안을 다수의 힘으로 강행하려 한 자유당 정부는 20여 년 간의 장기집권의 오만불손을 드러냈다고 하는 여론의 비판을 받았으며 1957년 6월의 총선거에서 존 디펜베이커가 이끄는 진보보수당에 정권을 내주었다. 한편 자유당 내에서는 생 로랑에 이어 수에즈 운하 위기 해결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전 총리 레스터 피어슨이 당수가 되었다. 디펜베이커는 정권획득 후 9개월 만에 다시 총선거를 실시했는데, 이때 그가 얻은 약 80%의 의석획득이라는 대승리 기록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징병문제 이래 경원시되고 있던 퀘벡주에서도 진보보수당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북방 개발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진보보수당 정권아래서도 캐나다 경제는 호황을 누렸다. 미국의 투자도 증가하여 두 나라는 한층 긴밀해졌다. 1958년의 미국과의 북아메리카 상호방위협정, 1959년에 완성된 미국과의 공동사업인 세인트로렌스 수로의 건설은 이러한 두 나라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디펜베이커를 퇴진으로 몰고간 것도 이러한 대미관계의 긴밀화에 의한 것이었다. 1963년 자유당의 피어슨은 진보보수당에게 미국의 핵무기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진보보수당 정권은 원칙적으로는 동의했지만 실시에는 주저했는데, 이 문제를 논점으로 치러진 총선거에서 자유당이 승리를 얻어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캐나다 공군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핵무장을 하게 되었다.

정당 재임기간
존 알렉산더 맥도널드 경 자유보수당 1867 ~ 73
알렉산더 매켄지 자유당 1873 ~ 78
존 알렉산더 맥도널드 경(재임) 자유보수당 1878 ~ 91
존 애벗 경 자유보수당 1891 ~ 92
존 톰프슨 경 자유보수당 1892 ~ 94
매켄지 보얼 경 자유보수당 1894 ~ 96
찰스 터퍼 경 자유보수당 1896
윌프리드 로리에 경 자유당 1896 ~ 1911
로버트 L. 보든 경 보수당 1911 ~ 20
아서 미언 보수당 1920 ~ 21
W.L. 매켄지 킹 자유당 1921 ~ 26
아서 미언(재임) 보수당 1926
W.L. 매켄지 킹(재임) 자유당 1926 ~ 30
리처드 베드퍼드 베넷 보수당 1930 ~ 35
W.L. 매켄지 킹(3임) 자유당 1935 ~ 48
루이 생 로랑 자유당 1948 ~ 57
존 G.디펀베이커 진보보수당 1957 ~ 63
레스터 B.피어슨 자유당 1963 ~ 68
피에르 엘리오 트뤼도 자유당 1968 ~ 79
조지프 클라크 진보보수당 1979 ~ 80
피에르 엘리오 트뤼도(재임) 자유당 1980 ~ 84
존 M.터너 자유당 1984
브라이언 멀로니 진보보수당 1984~93
킴 캠블 진보보수당 1993
장 크레티앵 자유당 1993~2006
스티븐 하퍼 보수당 2006~
캐나다의 역대 총리
퀘벡의 변모

주민의 80%가 프랑스계라는 특징을 지닌 퀘벡 주는 1950, 1960년대에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늦었기는 하지만 '근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퀘벡 주는 1944년 이래 국가연합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주 총리인 모리스 뒤플레시가 대기업·성직자 등 퀘벡의 체제파에 밀착하여 보수적인 정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9년의 아스베스터스의 파업이나 1950년에 창간된 〈자유시민〉지는 퀘벡에서도 노동자와 지식인이 변화를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1960년 자유당이 국가연합당을 타도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자유당의 승리 및 그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개혁은 '조용한 혁명'(Quiet Revolution)으로 불린다.

조용한 혁명의 내용은 경제와 교육의 개혁에 의한 퀘벡 근대화의 추진이라고 할 수 있다. 전력을 시작으로 기업의 공영화가 모색되었다. 이제까지 가톨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퀘벡의 교육제도는 세속화되어 인문과학 대신 자연과학이나 기술교육이 중시되었다. 퀘벡 주에 사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각성은 뚜렷해졌으며, 그에 따라 연방정부도 캐나다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프랑스계의 의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어 이제까지의 정책을 변경해야만 했다.

그 일례는 1963년 피어슨 정권 아래서 설치된 언어·문화위원회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위원회는 1965년 유명한 예비보고를 하여 '퀘벡 문제' 해결을 위해 프랑스어를 중시할 것을 선언했다. 1969년 영어와 프랑스어 모두를 공용어로 하는 결정이 내린 배경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그러나 연방정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퀘벡주의 사태는 한층 진전되어 있었다. 1970년에는 퀘벡 인민전선이 요인을 유괴하는 '10월위기'가 발생했으며 1976년에는 '퀘벡의 분리·독립'을 강령으로 하는 퀘벡당이 정권을 획득했다. 퀘벡당의 당수 르네 레베크는 일찍이 조용한 혁명의 추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퀘벡 주 주민들로부터 인기를 모았으며 1981년 4월 주의회 선거에서 2번째의 승리를 거두었다.

트뤼도 정권

1968년에 정권을 잡은 피에르 트뤼도는 캐나다 역사상 3번째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총리로서, 피어슨의 뒤를 이었다. 그뒤 진보보수당이 1979년 5월부터 1980년 2월까지 9개월 동안 정권을 잡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유당의 장기집권이 계속되고 있다. 트뤼도 시대의 캐나다는 실업률 상승으로 대표되는 경제불황의 악화라는 난제에 직면했는데, 그중에서는 내셔널리즘의 존폐가 문제시된 것이 특징적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경제·외교·문화 각 방면에서 미국의 영향이 뚜렷해졌다. 국내에서는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권한의 분할을 둘러싸고 대립했으며 문화의 상위를 배경으로 한 퀘벡, 석유가 가져온 경제력을 배경으로 한 앨버타를 중심세력으로 하여 각 주의 이반 문제가 현저해졌다. 전자에 대해서 트뤼도 정부는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했다. 1972년의 '제3의 선택'이라 불린 외교정책, 외국자본을 처음으로 문제시한 1974, 1975년의 외국투자심사법, 미국의 인기잡지에 대한 우대조치 중지 등은 캐나다 내셔널리즘의 앙양으로 이해된다.

캐나다 국내에서의 내셔널리즘의 위기는 연방제도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의 연방제도는 1867년의 영국령 북미법에 의해 그 대강이 결정되었으나 이미 그 기능이 사라져 버린 지 오래이며 트뤼도 정부는 '헌법개정'이라는 형태로 해결점을 모색했다. 이 조례에 대한 불만은 원래 이것이 영국의 의회입법인 점, 중앙집권적 성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주 정부의 권한이 강해지고 있다는 점,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점 등에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행에 따라 사회복지, 도시문제, 통신·교통망의 변화 등 100년 전의 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연방정부와 주정부 모두 헌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하지만 개정 내용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채 오랜 기간 헌법회의를 계속해왔다. 결국 1982년 4월 17일 '헌법'을 영국으로부터 이관하는 동시에, 거기에 빠져 있던 '권리와 자유의 장전'과 '헌법개정절차'를 포함하는 '1982년 헌법'이 공포되었다. 이로써 캐나다는 영연방의 일원이면서 주권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퀘벡 주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있어 그 거취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