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널드

맥도널드

다른 표기 언어 Sir John (Alexander) Macdon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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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15. 1. 11,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사망 1891. 6. 6, 캐나다 오타와
국적 캐나다

요약 초기 캐나다의 지도자이며 자치령 캐나다의 초대총리(1867~73, 1878~91).

그릇되고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일을 추진한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맥도널드는 1820년 스코틀랜드에서 현재의 온타리오의 킹스턴으로 이주했고 1836년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영국 의회가 1840년 합동법(Act of Union)을 재정해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를 캐나다웨스트(지금의 온타리오)와 캐나다이스트(지금의 퀘벡)로 각각 명칭을 바꾸고 하나로 통합한 뒤, 그는 1844년 보수당 후보로 킹스턴에서 출마해 캐나다 연합주 의회에 진출했다.

1848~54년 보수당이 야당으로 있는 동안에는 캐나다를 통합해 영국과의 유대를 강화하려 했던 영국령 아메리카 연합(British America League)의 활동을 지원했다. 점차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그는 캐나다이스트의 지도자인 조르주 에티엔 카르티에 경과 1854년 연립정부를 구성했고 이렇게 해서 맥도널드를 지도자로 하는 자유-보수 연합당이 탄생했다(→ 카르티에).

맥도널드는 1857년 캐나다 연합주의 총리가 되었다. 1864년 6월 맥도널드와 카르티에는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통합하는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그들의 가장 큰 정적이던 조지 브라운과 힘을 합쳤다.

프린스에드워드 섬의 샬럿타운을 비롯해 퀘벡과 런던에서 협의를 가진 끝에 '영국령북아메리카법'이 통과되었다(1867). 이 법으로 캐나다 자치령이 성립되었고 맥도널드가 첫 지도자가 되었다. 같은 해 그는 대영제국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바스 훈장 2등장을 받았다.

맥도널드가 총리로 있는 동안 캐나다 영토는 매니토바(1870), 브리티시컬럼비아(1871), 프린스에드워드 섬(1873)까지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1873년 캐나다 정부가 퍼시픽 철도의 건설계약과 관련해 뇌물을 받았다는 퍼시픽 부정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맥도널드는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5년 뒤 다시 총리 자리에 돌아왔고 죽을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1878년 총선에서는 통상정책이 주요선거쟁점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무역을 옹호했으나 수년에 걸친 경제침체를 겪은 캐나다인들은 맥도널드의 보호무역주의를 더 지지했다. 그는 총리 자리에 복귀하자마자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보호무역 정책을 취했고 퍼시픽 철도의 완성을 지원했다. 말년에는 북서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포함해 캐나다의 통합을 위협하는 갖가지 도전에 대해 대응조치를 취했다.

그의 주요 원칙은 언제나 변함없이 영연방에 대한 충성과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으며 "나는 영국의 백성으로 태어났으며 영국의 백성으로 죽을 것이다"는 자신의 선언을 끝까지 충실히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