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민족주의

다른 표기 언어 nationalism , 民族主義

요약 민족주의는 역사적으로는 자기 민족을 다른 민족이나 국가와 구별하고 그 통일·독립·발전을 지향하는 사상 혹은 운동이며, 정치적으로는 민족을 사회공동체의 기본단위로 보고 그 자유의지에 의하여 국가적 소속을 결정하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일민족 일국가의 원리를 주장하는 이러한 민족주의는 자각적 민족의식이 성립한 근대 이후의 현상으로서 시민적 자유주의와 궤를 같이한다.
민족주의는 근대적인 운동이다.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기하여 비로소 만개했으며, 19세기는 유럽에서 민족주의의 시대로 불리었다. 남아메리카의 신생국들이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뒤 19세기 초엽에는 중부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중반기에는 남·동유럽으로 번져나갔다. 20세기의 민족주의 운동은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 치열한 투쟁양상을 보였다.

목차

접기
  1. 유럽의 민족주의
  2.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 민족주의

국가가 국제정치적 원칙이나 개인 수준의 이해관계보다도 더욱 큰 중요성을 갖는다는 주의로서 정책이나 사상체계라기보다는 정치적 견해라고 할 만하다.

역사적으로는 자기 민족을 다른 민족이나 국가와 구별하고 그 통일·독립·발전을 지향하는 사상 혹은 운동이며, 정치적으로는 민족을 사회공동체의 기본단위로 보고 그 자유의지에 의하여 국가적 소속을 결정하려는 입장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일민족(一民族) 일국가(一國家)의 원리를 주장하는 이러한 민족주의는 자각적 민족의식이 성립한 근대 이후의 현상으로서 시민적 자유주의와 궤를 같이한다.

장 자크 루소와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는 초기의 민족주의 사상가로 유명하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를 연구하고 깊이 자극된 루소는 인간의 정치성향과 종교적인 추구 사이의 괴리를 메꾸기 위해서 정치적 공동체가 모든 생활양태의 근간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고, 전시민이 일반의지(volonté générale)의 형성에 참여해야 하며 동시에 정치체제는 공동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므로 공동체의 특수성을 온전히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헤르더는 사회공동체를 문화공동체로서 받아들인 뒤,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핵심 요소로서 민간전승과 민족적 전통의 역할을 강조했다. 한편 후대의 M. 헤르츠는 고전적 민족주의를 '나치오니스무스'(Nationismus), 확장적 민족주의를 '나치오날리스무스'(Nationalismus)로 구분한 바 있는데, 20세기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 민족주의는 전자를,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 분할정책은 후자를 대표한다.

민족주의는 근대적인 운동이다.

그 생명력과 광범위한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유서깊은 사조이고 정치행태의 불변적 요소라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지만 실제로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기하여 비로소 만개했다. 19세기는 유럽에서 민족주의의 시대로 불리었다. 남아메리카의 신생국들이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뒤 19세기 초엽에는 중부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중반기에는 남·동유럽으로 번져나갔다. 20세기의 민족주의 운동은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 치열한 투쟁양상을 보였다. 18세기가 되기까지 국가나 영토는 민족성에 따라서 규정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도시국가, 봉토·영주·왕조국가·종교단체·교파 등에 묶여 있었다.

민족국가의 개념은 역사상 대단히 새로운 것이었으며, 과거에는 이상적 국가형태로 서술되지도 않았다. 15세기에 걸친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이상의 모습으로 부각되었던 것은 보편적인 세계국가였지 분할된 정치단위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은 중세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 명맥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레스 푸블리카 크리스티아나'(그리스도교 공화국 혹은 공동체)의 개념 속에 살아 있었으며 세속화가 진행된 뒤에는 '일치된 세계문명'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정치단위가 민족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던 것처럼 문명의 측면에도 다양한 민족성이 발현될 수 없었다.

중세에는 그리스도교 세계나 이슬람 세계에서나 오직 한가지 색깔을 가진 문명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내용이 고대의 그리스 로마 문명으로 바뀌었을 뿐 르네상스와 고전주의시대에도 이와 같은 일원성은 변함이 없었으며, 이후로는 프랑스 문화가 지성인들에게 일반적인 호소력을 가진 시대도 있었다. 18세기로 접어들면서 교육은 오직 모국어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나타났다.

고전어나 고도의 문명을 이루었던 민족의 문예적 산물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18세기가 끝날 무렵 교육 및 공공생활의 민족주의화 경향은 정치적 충성의 범위를 넘어 민족적 차원으로 나아갔다. 문화적 민족주의를 처음으로 입에 담았던 시인·학자들은 자국어(속어)를 개척하여 문어체의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민족의 전통들을 하나하나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정신을 물려받은 민중들은 장차 민족국가의 형성을 요구하게 된다.

18세기 이전 일부 세력들 사이에서는 민족적 감정이 생성되었고 특히 갈등이 빚어졌을 때 두드러졌다.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띠는 민족감정의 발흥에는 복잡다단한 사태의 진전이 배경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 절대군주가 등장하여 중세 봉건사회의 지방 분권주의(分權主義)를 타파하고 영토확장과 함께 중앙집권적 국가를 탄생시켰으며, 둘째, 생활 및 교육의 세속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국어가 유행하고 교회와 종단의 구속력이 약해졌으며, 셋째, 상업이 발전됨으로써 중산 시민계층과 자본주의적 기업형태를 창출해냈다.

정치적·경제적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영토적 통일국가에는 중세의 종교운동에 견줄 수 있는 열정이 스며들어 있었고 국가의 중심으로 자처하고 있던 군주는 국민주권 이론과 인권사상에 밀려났다. 군주는 더이상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었고 국가는 국민의 국가, 민족적 국가, 조국이어야 했다. 국가는 민족과 동일시되었으며 문명은 민족적 문명을 의미했다.

이러한 발전양상은 2,000년 이상 정치사상을 지배해왔던 기본적 관념들에 배치되었다.

인간이 통상 보편성을 강조하고 일치와 화합을 바람직한 목표로 상정해왔던 반면, 민족주의는 특별하고 국지적인 것들과의 차이, 민족의 개체성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초기의 민족주의는 좋지 않은 면들을 별로 드러내지 않았다. 보편적 인간성, 인간 통성(通性)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신뢰, 그리스도교와 스토아 철학의 전통 등 서유럽 문명의 공통된 기준들은 17~18세기에 확실하게 살아 남았고 민족주의로 인해 사회공동체에 혼란을 가져오는 상황을 막아냈다.

특히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고전적 민족주의'는 세계시민적 신념이나 인류애와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유럽의 민족주의

근대 민족주의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혁명에서 처음 발현된다.

영국은 과학정신·자본주의·정치사상 및 현실정치의 측면에서 선두적인 지위에 있었다. 혁명이념에는 낙관적인 인문주의(人文主義)와 칼뱅주의 윤리학이 뒤섞여 있었으며 〈구약성서〉의 영향을 받아 영국 국민을 고대 이스라엘 민족과 동일시하는 새로운 민족주의를 성립시켰다. 영국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새로운 것이었던 혁명의 메시지는 존 밀턴의 저작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밀턴의 자유관은 "자유가 꽃을 피운 곳으로 영원히 이름을 떨칠" 영국으로부터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17세기 영국 민족주의는 후대에 나타난 세속적 민족주의보다 종교적인 성격이 짙었으며 상업에 종사하는 중산계층의 성장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존 로크는 영국 민족주의의 정치철학을 집대성했고 18세기 미국 및 프랑스 민족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북아메리카에 정착한 영국 이민들은 청교도혁명의 전통과 로크 사상 및 프랑스 철학자들이 영국의 자유주의를 해석하는 데 사용한 계몽주의(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식민지인들은 자유와 인권을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민족(국민)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한편 이들의 고투는 당시의 정치사상에 근거한 것이기도 했는데, 특히 토머스 제퍼슨이나 토머스 페인의 역할이 컸다.

미국이 자유·평등·행복을 지향했던 선봉으로 평가되는 것은 그 자유주의적·인도주의적 민족주의 때문이다. 18세기의 시대정신은 미국 독립선언과 미합중국의 탄생을 통하여 최초의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 독립전쟁).

장 자크 루소는 국민주권과 민족의지를 형성하는 구성원 전체의 협력을 강조하고 일반 대중을 진정한 문명의 주체로 간주함으로써 프랑스 민족주의에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지만, 프랑스 혁명에서 드러난 민족주의에서 보편적 인간성과 자유로운 진보에 대한 이성적 믿음의 표출은 루소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널리 알려진 '자유·평등·박애'의 혁명이념 및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프랑스 국민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하여 호소력을 지니는 것으로 모든 자유민주주의적 민족주의의 공통분모가 되었다. 축제와 깃발들, 음악, 시, 국경일, 애국적인 설교들이 프랑스인의 삶 곳곳에서 피어났다. 혁명적 민족주의는 민족의식의 형성에 있어서 개인의 의사를 강조했다.

국민국가란 구성원들의 의사결정 행위에 의하여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국민투표가 국민의사의 표현방식으로 채택되었다.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의 민족주의는 사회진화사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불평등하고 권위주의적인 과거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등의 세계공동체를 추구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유럽 전역과 근동지역에까지 파급시켰으며, 이무렵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남아메리카 여러 국가들이 민족주의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정복욕은 주변 민족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는데, 특히 독일의 지성인들은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원리 및 민족주의 자체의 자유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성격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전쟁).

독일 민족주의는 이성보다 본능에 주목했고, 정의로운 질서를 향한 이성적인 추구에 반하여 역사적 민족전통의 힘을 강조했다.

그들은 인류공통의 소망보다는 민족간의 차이에 주목했고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평등주의는 궁극적인 사회질서가 자리잡기 전 잠시 겪게 되는 도착증세 정도로 간주되었다. 19세기의 세계사 전개과정은 독일적인 민족주의 해석이 오류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자유주의의 색채는 더욱 확연해졌고 중산계층,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속하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1848년 2월혁명의 여파로 주세페 마치니를 비롯한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듯이 보였다.

마치니는 민주주의적인 방법에 따라 조국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룩하고 모든 민족들이 형제애로 결속되기를 염원했다. 비록 당장의 결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1859~71년의 12년 사이에 이탈리아와 루마니아의 통일이 성취되었고 1860년대에는 러시아와 스페인에서까지 자유주의의 진보가 이루어졌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자유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되돌려놓은 인물이었다.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과업은 보수·권위주의에 바탕을 둔 것으로 독일 내 자유주의 세력을 말살시켰다.

19세기 후반 합스부르크 왕가의 다민족 제국(오스트리아 제국)과 술탄이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한편 러시아 민족주의는 2갈래로 나뉘었는데, 일단의 민족주의자들이 자유적·진보적인 유럽 국가들과 제휴하여 러시아의 서구화를 주장한 반면, 다른 세력은 러시아의 자주성과 그 전체적·정교회적(正敎會的) 전통에 기인하는 특수한 운명을 강조했다.

독일 낭만주의 사상에 힘입은 이러한 친슬라브파는 러시아를 자유주의와 미국·프랑스 혁명으로 잠식당한 서유럽 세계의 구원자로 조명하고 있었다(→ 슬라브주의자). 19세기말 제국주의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민족주의의 반동화(反動化)는 점차 심화되어갔다.

1870년대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했던 1914년까지는 유럽의 각 민족국가가 자본주의에 의한 세계발전을 추구하여 제국주의적 영토분할과 식민지 경략에 치중했던 기간이었다.

제국주의는 민족주의의 부정임과 동시에 그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민족국가의 테두리를 넘어서 타민족을 지배하려는 면에서는 민족주의의 부정임에 틀림없었으나, 민족의 힘을 과시하고 권위를 높이려는 것이었으므로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민족주의를 최대한 이용했다.

그들에게 민족주의는 대외침략과 제국주의 전쟁을 미화하고 약소민족에 대한 압제를 합리화하며 식민지 주민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상적인 근거로 생각되었다.

반동화는 20세기의 1920~30년대에 걸쳐 파시즘이 대두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체제하에서는 개인의 자유·평등·인간성의 가치가 부정된 반면 국가나 민족이 절대시되고 민족적 이기주의와 침략전쟁이 신성화되었다.

아시아에서 반동적 민족주의를 발전시킨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프로이센과 비스마르크의 영향을 받아 덴노제라는 절대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왕·귀족·지주 중심의 민족주의를 전개했다.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자 자본주의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킴과 동시에 대규모 침략전쟁에 나섰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통(皇統)'이니 '세계무비(世界無比)의 국제(國制)'니 하면서 그것을 지킨다는 구실 아래 국민의 자유가 억압되었으며 침략전쟁에는 이른바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비롯된 중요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중·동부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승리를 거둔 일이었다.

합스부르크·로마노프 왕조의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등 새로운 민족국가로 재편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신생국가에서는 소수민족간의 갈등이 초래되고 밖으로는 영토문제를 둘러싸고 외부민족들과 분쟁을 겪게 되는 등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러시아의 민족주의는 1917년 레닌이 볼셰비키를 이끌고 차르 체제를 전복시킴으로써 부분적으로 탄압을 받았으나 곧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기치 아래 민족주의 정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추축국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민족·애국주의를 호소했던 스탈린은 전쟁이 종식되자 민족주의가 동유럽에 대한 공산세력의 확장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위 민족공산주의는 소비에트 블록에 균열을 가져왔다.

1948년 크렘린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를 변절자라고 비난했다. 1956년 가을 폴란드·헝가리의 반소폭동에서 발현된 민족주의운동은 이내 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로 이어졌으며 1980년에는 폴란드의 자유노조운동으로 꽃을 피웠다.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 민족주의

민족주의가 자유의 적에게 봉사하며 반동화되어가고 있을 때, 제국주의의 핍박을 받고 있던 식민지·반식민지에서는 새로운 민족주의가 혁명적 정신의 기수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동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로, 서남아시아에서 아프리카·남아메리카로 식민지 세계의 전역에 퍼져나갔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고전적 민족주의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다. 고전적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봉건세력의 억압에 항거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민족주의였으므로 한결같이 반봉건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식민지 민족주의의 경우는 보다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무르익어 제국주의의 단계로 접어든 시기에 제국주의의 압제로 신음하던 식민지에서 일어난 것이었으므로 대개 식민지 민족주의에는 반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과거 일제하에서 일어났던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이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식민지 민족주의의 전개과정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연맹제2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연합(UN) 역사 속에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국제연맹 규약이 채택되었던 베르사유 조약은 패전 동맹국들을 해체시키기도 했다. 독일의 지배 아래 있었던 아프리카 식민지는 영국, 프랑스, 벨기에, 남아프리카 연방공화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태평양 제도는 일본·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의 관할하에 놓였다. 국제연맹의 초기 회원국 가운데는 아시아 지역의 5개국과 아프리카의 2개국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1946년 연맹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3개의 아시아 국가와 2개의 아프리카 국가가 합류되어 있었다. 위임통치를 받고 있던 지역 가운데 이라크·레바논·시리아만이 국제연맹의 존속기간중에 독립을 성취했다.

1945년 종전 후부터 1950년대까지의 동서냉전 시기는 수많은 신생국가들이 출범해서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기간이었다. 비(非)서유럽 식민지 민족주의는 정치적으로 반제국주의적 비동맹 중립노선에 의한 주권독립국가의 발전을 추구했고, 경제적으로는 반자본주의적 민족경제체제의 수립에 치중했으며, 문화적으로는 반백인적·반그리스도교적인 전통문화의 승계·발전에 역점을 두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명맥을 유지하여 제3세계와 선진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경제적 갈등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전에 식민지였던 제3세계에 대하여 제국주의 국가는 그들이 식민지시대부터 구축해왔던 매판적 지배세력을 지원해서 신식민주의적 영향력을 지속하려 하며 이에 맞서 제3세계에서는 '민주적 민족주의'가 현저하게 대두하고 있다. 국제연합은 창설 당시의 51개 회원국 중에 8개국이 아시아 국가였고 아프리카 국가는 4개국에 불과하던 것이 35년이 지난 1980년에는 총회원국수가 150여 개국으로 늘었으며 대부분이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신생국들로 충원되었다.

국제연맹의 경우 아시아·아프리카 국가의 수는 1/3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연합에서는 과반수를 점유하게 되었다.

한편 아시아·아프리카의 새로운 민족주의운동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침투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서구 자본주의 열강에 대항한 민족해방 투쟁을 돕고, 일단 독립이 성취된 후에는 재정·기술 원조를 제공해서 자본주의 세력을 견제하는 전략이 쓰였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장제스[蔣介石]에 의해서 추진되었던 중국의 민족주의는 공산당이 본토를 석권하게 되자 쇠퇴했으나,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점차 초국가적인 공산주의 원칙으로부터 이탈되어갔다.

1960년대말 중·소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국 공산당은 그 민족주의적 성향을 노출시켰고 마오쩌둥[毛澤東]은 레닌에 비견할 만한 위치로 부상했다. 중국의 공산주의가 폐쇄성을 더해감에 따라 제3세계에 대한 영향력도 줄어들게 되었다. 각각의 국민적(국가적) 이익으로 인하여 신생국들 사이에는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UN의 복잡한 정치행태는 이 새로운 민족주의의 문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독립된 후에도 서(西)이리안(이리안바라트) 주를 둘러싸고 네덜란드와 영토권 분쟁을 계속했고 UN군은 1956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수에즈 위기에 개입했다.

이스라엘의 건국으로부터 발단이 되어 통일 아랍 공화국(UAR)의 출범 등 아랍권 내부의 불화를 포함하는 중동문제는 여전히 UN의 골칫거리로 남아 있다. 이밖에도 UN이 개입된 국제적 위기에는 인도와 카슈미르 간의 잠무카슈미르 분쟁, 한국 분단과 6·25전쟁, 콩고 문제, 신생국 키프로스에 대한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알력, 사바 주(북보르네오)의 말레이시아 편입에 대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반발 등 복잡다단하다. 신생국들은 독립에 대하여 한결같이 자부심을 느끼지만 숱한 난관에 직면해 있다.

콩고는 독립된 지 5년이 지났어도 자치 역량의 부족으로 안정된 정부조차 마련하지 못했고, 나이지리아에서는 너무나도 다양한 종족 및 언어 구성이 문제가 되었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잠무카슈미르 주가 이슬람교 국가인 파키스탄에 편입되어야 할지, 힌두교 국가인 인도로 편입되어야 할지의 여부는 1949년 인도독립법이 발효된 이후 20년이 지나도록 미해결인 채 남아 있다.

경제적 이해관계도 민족간·국가간의 갈등을 초래했다.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의 수원(水源)을 확보하기 위해 또다른 차원에서 인접 아랍국들과 투쟁을 벌이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럽 석탄철강공동체, 유럽 원자력공동체(Euratom), 유럽 공동시장 등으로 알 수 있듯이 유럽의 민족주의는 쇠퇴하는 추세에 있지만, 최근의 독일 통일이나 동유럽 및 소련의 대변혁과정은 고전적 민족주의 요소를 다소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