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제퍼슨

토마스 제퍼슨

다른 표기 언어 제퍼슨 , Thomas Jefferson
요약 테이블
출생 1743. 4. 13, 미국 버지니아 앨버마를 샤드웰
사망 1826. 7. 4, 몬티첼로
국적 미국

요약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했으며 미국 제3대 대통령을 지냈다. 1775년 버지니아 대표로 제1, 2차 대륙회의에 참가했고, 1776년 대륙회의의 독립선언문 기초위원으로 선발되었다. 이후 버지니아로 돌아와 버지니아의 법률과 제도를 개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779년 버지니아 주지사가 되었다.
1783년 연방회의 의원이 되었고, 연방의회에서 영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1784년 버지니아가 정부에 양도한 오하이오 강 북서부 지역에 관한 정부안을 입안했다. 1796년 부통령, 1800년에는 대통령이 되었다. 1803년 나폴레옹 1세로부터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사들여서 미국 영토를 거의 배가시켰다. 1809년 제임스 매디슨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줬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어린시절
  3. 독립선언문 기초
  4. 버지니아 헌법
  5. 정계복귀
  6. 해밀턴과의 논쟁
  7. 대통령직 취임
  8. 제퍼슨에 대한 평가
토마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토마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개요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했으며,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을 지냈다.

어린시절

제퍼슨은 부유한 농장주이자 토목기사인 피터 제퍼슨과 제인 랜돌프의 아들로 태어나 민주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지방유지로서 치안판사를 역임했고, 나중에는 버지니아 의회 하원의원이 되었다. 175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1760년 윌리엄앤드메리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수학과 자연과학에 흥미를 갖고 평생 동안 그 연구를 계속했으며, 외국어로 라틴어 및 그리스어도 열심히 공부했다.

독립선언문 기초

제퍼슨은 1767년 변호사가 되었지만, 법률보다는 정치에 관심이 많아 1769년 식민지 의회의 하원의원이 되었다.

그당시 버지니아를 비롯한 식민지들은 영국의 식민정책에 반대하여 끈질긴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강력한 저항을 주장하는 패트릭 헨리 등과 손을 잡았고 곧이어 그 집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1775년 봄 버지니아 의회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제2차 대륙회의에 참석할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토머스 제퍼슨을 임명했다.

1776년 6월 제퍼슨은 대륙회의의 독립선언문 기초위원으로 선발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존 애덤스도 기초위원이었지만, 그들은 제퍼슨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고 그에게 거의 모든 작업을 맡겼다. 나중에 제퍼슨은 이 공식문서에서 미국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제퍼슨이 독립선언문에 표현된 이상(理想)을 상징하는 유일한 인물이 된 것은 단지 독립선언문을 썼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같은 헌신적인 조국애 때문이었다.

미국 독립선언문(Declaration of Independence)
미국 독립선언문(Declaration of Independence)

버지니아 헌법

버지니아 헌법은 제퍼슨이 대륙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1776년 6월에 채택되었다.

헌법기초작업에 참여하지 못한 제퍼슨은 1776년 10월 대륙회의에서 버지니아 의회로 돌아오자마자 버지니아의 법률과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개혁의 주요목적은 '낡은 귀족정치를 없애고 앞으로도 귀족정치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며, 참된 대의정치의 토대를 쌓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다음 4개 항목의 개혁을 강조했는데 ① 한정상속제도의 폐지, ② 장자상속제도의 폐지, ③ 신앙의 자유, 교회의 특권 철폐, ④ 교육제도의 확립이었다(→ 재산법, 교회와 국가, 공교육).

1779년 독립전쟁 당시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지사가 되었지만, 주지사는 책임만 많고 권력은 거의 없는 자리였다.

1780~81년 겨울에 버지니아군이 영국군과 싸워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자, 제퍼슨은 주지사로서 비상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의회는 만장일치로 그에 대한 신임을 확인했지만, 제퍼슨은 주지사나 하원의원으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 몬티첼로로 은퇴했다. 그가 공직에서 은퇴한 것은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내인 마사 웨일스 스켈턴 제퍼슨의 건강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사는 1772년에 제퍼슨과 결혼한 뒤 5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중 2명만 살아남았고, 1781년 가을에 다시 임신했다. 그녀는 6번째 아이를 낳은 뒤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782년 9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정계복귀

제퍼슨은 1782년 12월에 공직으로 돌아와서, 버지니아 대표로 몇 개월 동안 대륙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1783년에는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에 따라 창설된 연방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것은 1781년에 각 주의 비준을 얻어 성립된 미국 최초의 헌법이다. 그는 연방의회에서 영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미국 화폐단위에 십진법을 채택하는 법안을 성립시키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업적은 1784년에 버지니아가 정부에 양도한 오하이오 강 북서부 지역에 관한 정부안을 입안한 것이다.

이 정부안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1800년 이후에는 이 땅에서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이 조항은 그후 1787년에 제정된 노스웨스트 법령에도 포함되었다(→ 노스웨스트테리토리). 1784년 제퍼슨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프랑스 주재 미국공사가 되어 프랑스의 경제상황과 사회현실을 직접 관찰하고 절대왕정을 더욱 혐오하게 되었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그는 유럽의 과학자나 지식인들과 자유롭게 사귀었고, 특히 독립선언문과 버지니아 주의 종교자유법을 기초한 사람으로서 라파예트 후작 같은 온건한 정치지도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는 1789년말에 귀국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초기 단계밖에는 목격하지 못했다.

해밀턴과의 논쟁

1787년에는 필라델피아 헌법제정회의에서 헌법이 기초되어 그동안 국가의 기본법 역할을 맡았던 연합헌장을 대신하게 되었고, 이 헌법은 이듬해 정식으로 비준을 받았다.

제퍼슨은 그 헌법에 대체로 찬성했지만, 권리장전이 빠져 있고 대통령의 연임을 제한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미국연방헌법). 그가 1789년 가을 프랑스에서 돌아오자마자, 조지 워싱턴은 그에게 새 정부의 국무장관 자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워싱턴 행정부의 재무장관은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는데, 제퍼슨은 해밀턴의 정책이 중앙정부의 헌법상 권한을 넘어섰고 국민 대다수의 이익에 위배되며 공화제도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맹렬히 반대했다.

외교정책에서는 제퍼슨이 프랑스 쪽으로 기운 반면, 해밀턴은 영국에 친밀감을 보였다. 제퍼슨과 해밀턴은 인물뿐만 아니라 정책과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적 정당을 결성하는 문제에서도 의견대립을 보였고, 이 논쟁을 계기로 하여 양당체제의 선례와 유형이 확립되었다. 두 사람은 워싱턴의 1차 임기가 끝나갈 무렵 내각에서 물러났지만, 제퍼슨은 여전히 민주공화파의 지도자였고 해밀턴은 연방파의 상징이었다.

연방파의 존 애덤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1796년 선거에서 제퍼슨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798년 연방파가 주도하는 하원이 언론 및 출판의 자유를 규제하는 외국인 규제법과 보안법을 제정하자 제퍼슨은 유능한 협력자인 제임스 매디슨과 함께 맹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이 법률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연방법이 헌법을 위반할 경우에는 지방정부가 법률을 무효로 간주할 권한을 갖는다는 버지니아-켄터키 결의안을 작성하여 통과시켰다.

제퍼슨은 해밀턴을 '공화정부의 적'으로 간주했고, 해밀턴은 제퍼슨을 '선동적인 급진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해밀턴은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의 권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제퍼슨은 개인의 생명·자유·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따금 반대자들에 대한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지만, 끝없는 이념 논쟁이 분열과 갈등을 초래한다는 것을 느끼고 두려워했다. 미국 사회를 화합으로 이끌고자 하는 제퍼슨의 소망은 그후 대통령직 수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통령직 취임

1800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연방파는 패배를 맛보았지만, 민주공화파가 대통령후보로 내세운 제퍼슨과 애런 의 득표수가 공교롭게도 똑같았기 때문에, 결국 하원이 결선투표를 하여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듬해 3월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제퍼슨은 지난 12년 동안 연방파가 시행하던 정책을 전면개편하려고 하지 않았다. 제퍼슨이 명분에만 구애되었거나 무절제한 정치적 열정의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미국 역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가져온 미묘한 상황을 무시했다면, 미국 사회는 안정을 잃고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갔을지도 모른다. 1803년 제퍼슨은 나폴레옹 1세로부터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사들였다. 그결과 미국 영토는 거의 2배로 늘어났고 루이지애나에서 강대국 프랑스의 권력이 물러났기 때문에 국가는 더욱 안정되었다(→ 루이지애나 매입). 제퍼슨은 1804년 대통령으로 재선되어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중립정책을 유지했지만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가 추진한 출항금지법은 지나치게 강경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제퍼슨은 원하기만 했다면 대통령을 3번 연임할 수도 있었지만, 조지 워싱턴을 본받아 2차례의 임기만 마치고 물러났다. 1809년 3월 4일 그는 후임자인 제임스 매디슨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버지니아 주 몬티첼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 버지니아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대학교 설립이 "나의 마지막 관심사이며, 내가 조국에 바칠 수 있는 마지막 봉사"라고 말했다. 그는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공사를 감독했으며 교수들을 모으고, 교과과정을 짜고 교과서까지도 선정했다.

제퍼슨에 대한 평가

제퍼슨은 보기 드물게 박식한 인물이어서, 모든 학문이 전문화된 오늘날에는 거의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광범위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고대 영어를 배웠다. 71세 때는 플라톤의 〈국가론 Republic〉을 원문으로 읽었고, 〈신약성서〉를 철저히 분석하여 '제퍼슨의 성서'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복잡한 수학계산을 취미로 즐기고, 자연과학도 열심히 연구했다. 또한 그는 흑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한 민족학적 연구에도 흥미를 보였다. 그는 유럽에 있을 때 보았던 기구실험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유럽에서 이루어진 각종 발명을 미국에 소개했다. 그는 몬티첼로에서 12㎢의 면적에 노예가 150명이나 되는 큰 농장을 경영하면서 과학적 영농법을 시험했다.

제퍼슨은 185cm의 키에 뼈대가 굵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지만, 자세가 꼿꼿해서 강인한 느낌을 주었다. 모난 얼굴은 불그스름하고 머리카락은 금발이었으며, 눈동자는 진지하고 솔직했으며, 말투가 활달할 뿐 아니라 내용도 다채롭고 유익하여 청중을 매혹시켰다. 제퍼슨은 독립선언 50주년 기념일인 1826년 7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정치적 경쟁자이며 친구였던 존 애덤스는 그보다 몇 시간 뒤에 죽었다. 제퍼슨의 묘비에는 그가 미리 써두었던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미국 독립선언문과 종교의 자유를 확립한 버지니아 헌법의 기초자이며 버지니아대학교의 아버지인 토머스 제퍼슨, 이곳에 잠들다."

제퍼슨의 위대함은 화려한 경력만이 아니라 그의 정치사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온갖 인종이 모여 사는 광대한 지역에서 대의정치를 실현하고자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직접 기초한 독립선언문의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자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도덕성과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 그리고 정의를 존중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라고 제퍼슨은 생각했다. 또한 경제안정과 어느 정도의 번영도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농업경제의 우선과 자작농제도를 지지했다. 그는 대의정치가 성공하리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탁상공론식 낙관주의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정치적 조건을 바탕으로 한 신념이었다. 그는 권력남용을 막기 위해서는 삼권분립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로서 미국이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고 연방정부도 강력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국가주의로 기울지 않고, 모든 분야에서 시민의 이익을 가장 효율적으로 증진할 수 있는 것은 연방정부가 아니라 각급 지방자치단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관용정신과 인내를 강조했는데, 그 바탕에는 진보에 대한 기대가 깔려 있었다. 그는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두뇌가 좀더 발전하고 계발되어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진실이 밝혀짐에 따라, 그리고 상황변화와 더불어 풍속습관이나 사고방식이 변화함에 따라, 모든 제도도 함께 진보하여 시대와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