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니

마치니

다른 표기 언어 Giuseppe Mazzini
요약 테이블
출생 1805. 6. 22, 제노바
사망 1872. 3. 10, 피사
국적 이탈리아

요약 비밀 혁명단체인 '청년 이탈리아당'을 세웠고(1832) ' 리소르지멘토'로 알려진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기수였다.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이탈리아가 통일과 독립을 이루었을 때(1861) 사보이 왕가의 왕정 아래 설립된 의회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에 대한 평판은 때에 따라 큰 변동을 겪었다. 초기에는 조국에서 거의 전설적인 영웅이었으나 나중에는 많은 동포들에게서 국가의 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근대에 들어서 많은 역사가들은 그의 활동이 이탈리아에서 해방과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폭력혁명의 위협이 끊이지 않을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가치가 있었다고 본다. 오늘날 그는 민족의 대의를 위해 노력하도록 피에몬테 정부와 그 뒤의 이탈리아 정부를 끊임없이 채찍질함으로써 근대 이탈리아 건설에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교육과 망명
  3. 청년 이탈리아당 창당
  4. 영국 체류
  5. 로마 공화국의 삼두정치
  6. 업적과 평판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

개요

비밀 혁명단체인 '청년 이탈리아당'(Giovine Italia)을 세웠고(1832)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로 알려진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기수였다.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이탈리아가 통일과 독립을 이루었을 때(1861) 사보이 왕가의 왕정 아래 설립된 의회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교육과 망명

주세페 마치니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 제노바는 예전에는 공화국이었으나 1814년 피에몬테 왕국에 합병되었다. 어릴 때부터 아주 똑똑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고 14세에 제노바대학교에 들어가 이 기대를 충분히 뒷받침해주었다. 2년 뒤 봉기에 실패하고 외국으로 도망치던 한 애국자를 만나 강한 영향을 받고 "우리 이탈리아인들은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울 힘이 있고 따라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사르데냐).

1827년 법과를 졸업하자마자 '빈민의 변호사'로 개업했으며 진보적인 잡지에 글을 쓰면서 극작가나 역사소설가가 되려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탈리아의 절대왕정을 타도하자고 맹세한 비밀결사 카르보나리당에 가입했고 1830년에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당한 뒤 사보나에 억류되었다. 사보나에서 3개월 동안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재검토하고 쇠락해가는 카르보나리당을 대신할 새로운 애국운동의 윤곽을 잡았다.

1831년초에 석방되면서 피에몬테를 떠나든가 어느 작은 마을에 가서 살라는 명령을 받은 그는 망명을 선택하고 마르세유로 갔다.

마르세유에 있던 많은 이탈리아 망명객들은 가냘픈 몸매와 짙은 피부색의 잘생긴 용모, 검은 머리와 턱수염, 검은 벨벳 옷차림의 그를 곧 친근하게 받아들였으며 지도자로 인정했다. 그가 처음 공식적으로 한 일은 피에몬테 왕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공개서한'을 보낸 것으로, 피에몬테 입헌정부를 세우고 민족운동을 이끄는 한편 오스트리아인을 롬바르디아-베네치아 및 이탈리아의 여러 근거지에서 몰아낼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이 공개서한은 이탈리아 전역에 나돌았으나 정작 카를로 알베르토는 마치니가 피에몬테에 돌아오면 잡아넣겠다고 협박했을 뿐이었다.

평생 동안 공화주의자였던 마치니는 나중에 전제군주에게 이처럼 우호적으로 접근했다는 비판을 받자 자신은 카를로 알베르토가 이탈리아의 자유를 위해 싸울 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폭로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했다.

청년 이탈리아당 창당

마치니는 마르세유에서 가장 보람있는 2년을 보냈다.

그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애국운동 조직을 만들고 '청년 이탈리아당'이라고 불렀다. 이 조직은 각각의 이탈리아 국가를 외세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단일 자유독립 공화국으로 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주의적 단체였다. 그 목적을 수행하는 방법은 교육과 봉기였으며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마치니 자신은 그리스도교도는 아니었지만)과 진보·의무·희생의 영원불변한 법칙에 대한 자신의 신념에서 도덕적 근거를 도출해냈다. 이것은 모든 계급을 포괄하는 최초의 이탈리아 민주화 운동이었고 마치니는 오직 민중이 선도하는 운동만이 이탈리아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교황도 국왕도 아닌, 신과 민중들만이 우리에게 미래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새로운 운동은 이탈리아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제노바와 여러 도시에서 비밀리에 지부가 결성되었고 1833년경에는 회원이 6만 명에 이르렀다. 마치니는 이 단체의 선전지 〈조비네 이탈리아 Giovine Italia〉를 편집해 다른 혁명적인 소책자와 함께 이탈리아로 밀반입시켰다. 또한 그는 동료 망명자인 모데나 출신의 아름다운 미망인 주디타 시돌리의 연인이 되었다.

청년 이탈리아당에서 계획했던 봉기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1833년 피에몬테에서 일으키기로 준비한 봉기는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발각되어 12명이 처형당하고 1명은 자살했으며 마치니는 궐석재판(闕席裁判)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예언적으로 "이념은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빠르게 성숙한다"는 말을 했다. 몇 달 뒤 프랑스 경찰을 피해 스위스로 옮겨가서 사보이(당시 피에몬테 왕국의 일부)를 공격할 1,000명의 의용군을 모집하고자 했으나 200명밖에 모이지 않자 그 병력마저 해산해버렸다. 연이은 실패 때문에 청년 이탈리아당은 정신은 살아 있었지만 조직은 붕괴된 상태였다.

마치니는 인류의 우애에 대한 믿음과 세계공화국 연방에 대한 희망을 바탕으로 더욱 폭넓게 혁명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는 청년 유럽당을 창설하고 청년 독일당과 청년 스위스당, 청년 폴란드당 설립을 도왔으나 스위스에서 보낸 3년은 불행하고 좌절뿐인 세월이었다. 주디타 시돌리는 아이들과 같이 살기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갔으며 그는 회의와 환멸에 빠져 정서적 위기를 겪었다. 1837년 그는 몇몇 이탈리아 친구들과 함께 런던으로 갔다.

영국 체류

이제 영국은 그에게 실질적인 삶의 터전이 되었다.

그는 런던의 단출한 셋방에서 책, 논문, 애완용 새들에 둘러싸여 살면서 대영박물관에 가서 공부했고 영국의 정기간행물에 기고했다. 돈은 거의 없었지만 런던에 이탈리아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고 〈인민의 사도 Apostolato popolare〉라는 신문을 발행했으며 그 신문에 논문 〈인간 의무론 On the Duties of Man〉의 일부를 발표했다. 1840년 파리에 있던 주세페 람베르티의 도움으로 청년 이탈리아당을 부활시켰다. 이는 무엇보다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탈리아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유럽·북아메리카·남아메리카의 새로운 지부에 수많은 편지를 써보냈으며 또한 칼라일 부부(토머스와 제인 웰시)를 비롯한 여러 저명인사들과 사귀었다.

1844년 반디에라 형제와 접촉했으나 이들은 칼라브리아에서 봉기를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마치니는 영국 의회의원인 2명의 친구를 만나 영국 정부가 자신의 편지를 뜯어보고 반디에라 형제의 계획에 관한 정보를 나폴리 당국에 알려준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털어놓았다.

이 문제가 의회에서 쟁점으로 떠올랐고 영국 정부는 마지못해 개인의 편지를 뜯어보았음을 인정했다. 대중의 분노가 거세게 일었고 각계각층에서 마치니에게 동정심을 보였다. 이 사건으로 마치니는 영국에서 더욱 유명해졌고 유명한 자유주의 가문인 애셔스트가(家)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1847년 그가 국제인민연맹을 창설했을 때 수많은 영국의 자유주의 인사들이 그를 지원했다.

같은 해 그는 교황령에 자유주의적 개혁을 실시한 새 교황 피우스 9세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썼다.

그는 교황에게 이탈리아의 통일을 촉구했으나 교황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1848년 마침내 밀라노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피에몬테도 오스트리아인들을 축출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 혁명의 해에, 마치니는 망명 후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밀라노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롬바르디아가 공화국이 되기를 원했으며 피에몬테 왕국과 통합하자는 밀라노 임시정부의 제안은 미래의 이탈리아를 건설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곧 인기가 떨어졌다.

피에몬테 군대가 철수하고 오스트리아군이 밀라노에 다시 들어오자 그는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비정규군에 잠시 가담했다가 다시 영국으로 갔다.

로마 공화국의 삼두정치

1849년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온 마치니는 토스카나에 머무르다가 혁명으로 교황이 쫓겨나고 공화정이 선포된 로마로 갔다.

그는 황제와 교황이 차례로 지배한 로마에 뒤이어 제3의 로마, 즉 민중들의 로마가 탄생할 것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으며 이제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는 위대한 애국자로 칭송받았고 공화국의 3인 집정관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정부의 실질적 수반이 되었으며 교회 및 사회개혁에서 뛰어난 행정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단기간에 그쳤다. 교황이 가톨릭 국가들에 지원을 호소한 결과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공화국은 영웅적인 항전을 벌였으나 끝내 붕괴되었고 마치니는 로마를 떠났다.

런던에 돌아온 뒤 1851년 '이탈리아의 벗'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단체를 만들어 곧 새로운 혁명활동에 뛰어들었다. 1853년에는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운 밀라노 노동자들의 봉기를 후원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853~54년 카라라에서 봉기를 일으키도록 펠리체 오르시니에게 2가지 임무를 맡겨 파견했으나 역시 소득이 없었다.

1856년 수많은 동시다발 봉기를 계획하려고 몰래 제노바로 갔다. 그 가운데 정작 실행에 옮긴 것은 1857년 카를로 피사카네가 칼라브리아에서 일으키기로 한 것이었으나 상륙부터 실패했다. 이 시기의 거사계획들이 명백히 성과없이 끝나긴 했지만 유럽 여러 나라 정부에 계속 이탈리아 문제를 제기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 한편 새로운 중도파 정부가 들어서서 혁명을 치르지 않고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려 하던 피에몬테에서는 이같은 봉기음모를 꾸민 마치니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피에몬테 총리 카보우르는 그를 '암살단 두목'이라고 불렀으나 이것은 부당한 비난이었다. 마치니는 봉기계획을 꾸몄을 뿐 암살을 모의한 적은 없었으며 그 자신은 명백히 '단검의 논리'를 배격했다.

1858년 마치니는 런던에서 또다른 잡지 〈사상과 행동 Pensiero ed azione〉을 창간했다. 이 제호는 사상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만 가치가 있다는 그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는 1859년 프랑스와 피에몬테 연합군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카보우르는 나폴레옹 3세의 지원을 얻어 알프스 산맥에서 아드리아 해에 이르는 이탈리아를 해방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치니는 또한 1860년 가리발디의 시칠리아 원정을 후원한 '행동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원정은 마치니가 초기에 구상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행동파에게 준 마치니의 선물'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는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남부에서 독재권을 장악한 짧은 기간 동안 나폴리로 갔으나 베네치아와 로마를 제외하고 1861년 통일된 새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었을 때는 런던에 돌아와 있었다.

1860년대 마치니는 베네치아와 로마를 장악하기 위한 현실성 없는 구상에 빠져 있었다.

이때는 제1차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제1인터내셔널)이 결성되었을 때였다. 그는 일찍부터 인터내셔널 회원들과 접촉했으나 자신의 정치사상을 이루고 있는 도덕적·종교적 바탕 때문에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나 바쿠닌의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어 곧 관계를 끊었다. 메시나에서는 몇 차례나 되풀이해서 마치니를 의회대표로 선출했으나 이탈리아 정부는 그때마다 선거를 무효로 했다.

1870년 그는 판단을 잘못해 시칠리아에서 공화파 봉기를 지도하겠다고 동의했다. 그러나 시칠리아로 가는 도중 체포당해 가에타에 억류되었고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를 점령한 뒤 사면을 받았다.

업적과 평판

마침내 베네치아(1866 합병)와 로마도 새로운 왕국으로 편입되었지만 마치니의 생애는 좌절 속에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그가 강한 반대에 부딪치면서도 항상 옹호했던 대로 연방 형태가 아닌 중앙집권적 단일국가 형태로 통일되었으나 그것은 그가 바라던 공화국이 아니라 군주국이었다. "나는 이탈리아의 영혼을 일깨우고자 했으나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시체일 뿐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말년에 그는 또하나의 신문 〈인민의 로마 Roma del popolo〉를 창간해 루가노에서 편집을 했으며 이탈리아 노동자 의회를 구성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1872년 피사에서 늑막염으로 죽었다.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니에 대한 평판은 때에 따라 크게 변동을 겪었다. 초기에는 조국에서 거의 전설적인 영웅이었으나 나중에는 많은 동포들에게서 국가의 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가 죽은 뒤 2세대 동안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의 활동이 1849년을 마지막으로 의미를 잃었으며 그뒤 음모에서 손을 뗐어야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는 다른 견해가 우세하다. 많은 역사가들은 그의 음모활동이 이탈리아에서 해방과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폭력혁명의 위협이 끊이지 않을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가치가 있었다고 본다.

오늘날 그는 민족의 대의를 위해 노력하도록 피에몬테 정부와 그뒤의 이탈리아 정부를 끊임없이 채찍질함으로써 근대 이탈리아 건설에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