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발디

가리발디

다른 표기 언어 Giuseppe Garibaldi 동의어 주세페 가리발디, Giuseppe Garibaldi
요약 테이블
출생 1807년 7월 4일, 제정 프랑스 니스
사망 1882년 6월 2일, 이탈리아 카프레라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국가 통일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한때 공화주의자였으나 로마의 혁명 공화정부가 무너지자 사르데냐 왕국 중심의 통일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859년 알프스 의용대를 지휘하였고 이듬해에는 '붉은 셔츠대'를 조직,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정복하고 남이탈리아를 사르데냐 왕국에 바침으로써 통일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가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 게릴라전의 명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선동가이긴 했으나 자신의 군사적·정치적 재능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대의에 이용한 것이 당시의 조류와 잘 맞아떨어져 그에게 커다란 갈채를 안겨주었다. 더불어 자신의 부귀영화에는 관심이 없는 정직한 인격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 올곧은 심성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무기일지도 모른다. 그는 오늘날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남아메리카 망명시절
  4. 해방전쟁
  5. 후퇴
  6. 시칠리아와 나폴리 정복
  7. 이탈리아 왕국의 성립
  8. 마지막 군사작전
  9. 평가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개요

게릴라 부대 '붉은 셔츠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정복함으로써 이탈리아가 사보이 왕가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룩하는 데 이바지했다.

초기생애

가리발디 집안은 고기를 잡아 해안에서 장사를 하며 살았다.

가리발디 자신도 10년 넘게 선원으로 일하다 1832년 상선(商船)의 선장 자격을 얻었다. 1833~34년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해군에 복무하는 동안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위대한 선구자였던 주세페 마치니와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가인 생 시몽 백작의 영향을 받았다. 1834년 피에몬테에서 공화파 혁명을 일으킬 목적으로 반란에 가담했으나 반란 음모가 실패하자 프랑스로 도망쳤다.

그는 제노바에서 열린 궐석재판(闕席裁判)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남아메리카 망명시절

1836~48년 가리발디는 남아메리카에서 망명생활을 했으며 당시 혼란과 혁명으로 들끓던 남아메리카 대륙의 생활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리우그란데두술 공화국의 해군 함장으로 자원 입대해 싸웠으나 그렇게 작은 나라가 브라질 제국에서 벗어나 독립한다는 것은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그는 브라질 민간선박을 약탈했을 뿐이었다. 육지와 바다에서 여러 가지 위험을 겪는 가운데 유부녀인 안나 마리아 리베이로 다 실바(아니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데리고 달아났다.

아니타는 그의 동지로서 죽을 때까지 함께 싸웠다.

브라질이 1839~40년에 걸쳐 내리 승리를 거두자 결국 리우그란데를 떠나기로 결심, 아니타와 아들을 데리고 한 무리의 가축들을 몰며 몬테비데오를 향해 먼 길을 떠났다. 몬테비데오에서 행상인·교사로서 일을 해보았으나 민간인 생활에 좀체 익숙해질 수 없었다. 1842년 우루과이 해군의 지휘를 맡아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에 맞선 해방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듬해에 다시 우루과이군에서 복무하면서 몬테비데오에 새로 구성된 '이탈리아 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 부대는 훗날 가리발디의 이름과 함께 널리 알려진 붉은 셔츠대의 모태가 되었다.

1846년 그 규모는 작았으나 영웅적인 산탄토니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유럽에까지 이름을 날렸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기금을 모아 그에게 명예의 검(劍)을 헌정하기도 했다. 1847년 그는 얼마 동안 몬테비데오 방어 임무를 맡았는데이때 처음으로 알렉상드르 대(大) 뒤마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뒤마는 나중에 가리발디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가리발디는 또한 다른 외국인들에게도 정직하고 능력있는 사람으로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남아메리카에서 게릴라전 전술을 터득하는 귀중한 기회를 얻었고, 훗날 게릴라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던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큰 효과를 보았다. 자유라는 명분을 내걸고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을 쳐부수는 최초의 위업을 이룸으로써 가리발디는 직업혁명가이자 굽힐 줄 모르는 독불장군의 길을 걷게 되었다.

평생 동안 아르헨티나 대초원 주민들이 입는 가우초를 입고, 인생이란 자유를 위한 영원한 투쟁인 것처럼 행동했다.

해방전쟁

1848년 4월 그는 오스트리아에 대항한 독립운동인 '리소르지멘토'에 가담하기 위해 60명의 이탈리아 연대원들을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처음엔 교황 피우스 9세에게 교황의 군사로서 싸우겠다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다시 피에몬테-사르데냐의 국왕인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사르데냐 왕의 이름으로 싸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가리발디가 1834년 반란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일을 기억하고 있던 카를로 왕 역시 그의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게다가 이탈리아 정규군은 독학으로 전술을 익힌 이 게릴라 지도자를 멸시했다. 이렇게 되자 가리발디는 해방전쟁을 벌이고 있던 밀라노를 돕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밀라노에서는 이미 마치니가 좀더 공화주의적이고 급진주의적인 성향의 해방전쟁을 이끌고 있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쿠스토차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패한 뒤 휴전에 합의했으나 가리발디는 밀라노의 이름을 걸고 혼자서 계속 전투를 벌였다. 루이노와 모라초네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나 8월말 병력이 크게 달리자 스위스 국경 너머로 후퇴해야 했다.

얼마 동안 그는 아니타와 3명의 아이들과 함께 니스에 정착해 살았으나(이들은 1842년 결혼했음) 이탈리아를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결의는 어느 때보다 강했다.

비록 지금은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들이 서로 싸우는 일이 많지만 언젠가는 단일국가로 통일될 것이라고 믿으며 자신의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그와 마치니를 비롯해 몇몇 사람뿐이었다. 교황 피우스 9세가 교황령 안의 자유주의 세력에게 쫓겨 1848년말 로마에서 몸을 피하자 가리발디는 지원병들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1849년 2월 로마 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로마를 독립공화국으로 만들 것을 제의했다.

그해 4월 교황령 정부를 복귀시키기 위해 프랑스군이 쳐들어오자 지휘자가 된 그는 과감하게 방어전을 벌여 야니쿨룸 언덕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5월에는 로마 외곽의 벨레트리에서 나폴리군을 무찔렀으며, 6월에는 프랑스군에게 포위당한 로마의 방어전을 지휘했다.

더이상 로마를 지킬 가망은 없었으나 이들이 벌인 용감한 저항은 리소르지멘토의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가리발디는 패배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채 1849년 7월, 수천 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로마를 빠져나와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을 피해가며 중부 이탈리아를 지나 중립지역인 산마리노 공화국에 이르렀다.

후퇴

그는 자신이 포위되었음을 깨닫고 대원들을 해산시키기로 결심했다.

그 자신도 탈출하려다 오스트리아군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때 아니타가 죽었으나 그는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토스카나 지방의 해안에 다다랐다. 중부 이탈리아를 가로지른 후퇴작전이 신문마다 실려 그는 유명인물이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두 세계(남아메리카와 이탈리아)의 영웅'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후퇴작전의 전술을 비판하기도 했으나 그는 지도자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았으며, 항복하지 않으려는 용기와 결단력은 이탈리아인들에게 애국심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나 피에몬테의 군주는 이같은 그의 행동에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그가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2번째로 망명길에 올라 탕헤르와 스테이턴아일랜드를 거쳐 페루로 갔다. 페루에서 그는 원래의 직업이었던 선장으로 일하다가 1854년에야 피에몬테 왕국의 총리인 카보우르 백작의 허락을 받아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카보우르는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공화주의자인 마치니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그는 사르데냐 해안에서 좀 떨어진 카프레라 섬의 한 지역을 사들여 말년에 그곳에서 살았다.

1856년 나폴리의 부르봉 왕가에 붙잡혀 있던 정치범들을 풀어주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나갔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858년 카보우르 백작으로부터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또 한 차례의 전쟁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의 임무는 이탈리아의 다른 지방에서 모집한 지원병을 지휘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피에몬테 군대의 소장 계급을 받았다. 1859년 4월 전쟁이 터지자 그는 자기 부대인 '알프스의 사냥꾼'(Cacciatori delle Alpi)을 이끌고 바레세와 코모를 점령한 뒤 남부 티롤 지방의 접경지대까지 진격했다. 이 전쟁은 피에몬테 왕국이 롬바르디아를 획득하는 것으로 끝났다.

1859년 9월 북부 이탈리아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자 그는 이미 피렌체에 혁명정부가 들어서 있던 중부 이탈리아로 관심을 돌렸다.

이곳에서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개인적으로 여러 차례 만난 끝에 그는 교황령 공격을 준비하기로 했다. 공격에 성공하면 에마누엘레 2세는 지원을 보내고 만약 실패할 경우에는 그와의 관계를 전면 부인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이 계획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에마누엘레 2세는 그에게 계획을 포기하도록 종용했고 가리발디도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다.

그는 언제라도 에마누엘레 2세와 이같은 구두협정을 다시 맺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목표가 같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두 사람 모두 애국자였으나 가리발디는 이미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뛰어든 몸이었으며, 에마누엘레 2세는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피에몬테 왕국의 영토를 가능한 한 많이 넓히는 데 관심이 있었다. 가리발디는 1860년초 카보우르와 에마누엘레 2세가 자신의 고향인 니스(1814년에 피에몬테 왕국에 편입)를 프랑스에 돌려주자 매우 분노했으며, 좀처럼 나가지 않던 의사당에 나타나 이같은 행위는 민족의 신조를 위반한 것이라고 항의했다.

1860년 1월 그는 라이몬디 후작의 딸인 주세피나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자신의 부하장교와 관계를 가져 이미 임신 5개월에 이른 사실을 알고 몇 시간도 안되어 그녀와 헤어졌다. 20년이 지난 뒤에야 이 결혼이 무효라는 판결을 받아냈고, 프란체스카 아르모시노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들을 자신의 적법한 자식으로 만들 수 있었다.

시칠리아나폴리 정복

1860년 5월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큰 모험을 감행해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정복했다.

이번에는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았고, 카보우르와 에마누엘레 2세도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영웅인 그를 감히 막지 못했다. 이들은 가리발디를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그의 성공이 확실할 경우에만 지원할 생각이었다. 가리발디는 카보우르에게 압력을 가해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또다른 행동에 원조를 받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에 이같은 구두협정을 받아들였다.

5월 6일 약 1,000명의 대원들과 함께 제노바 근처 항구를 떠난 그는 5월 11일 시칠리아의 마르살라에 도착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름으로 자신을 독재자로 선포했다.

그는 대중의 인기를 끌 만한 대단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고 시칠리아의 주민들이 일으킨 혁명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많은 농민들은 그를 노예제와 봉건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신(神)으로 여겼다. 가리발디의 부대는 칼라타피미에서 벌인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결정적인 순간을 맞았다. 여기서 그는 나폴리 왕의 정규군 부대를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었고 곧이어 그를 지지하는 주민들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도움을 얻어 그는 5월말 팔레르모를 점령했다.

팔레르모 점령은 그가 이룩한 가장 커다란 군사적 성공이었고 이를 통해 카보우르는 비밀을 계속 지켜야 했으며 피에몬테 왕국은 앞으로 가리발디의 자원병 부대를 강력하게 지원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시칠리아 섬을 가로지르던 가리발디는 7월에 북부 이탈리아에서 온 증원군의 도움으로 밀라초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8월 18~19일에는 메시나 해협을 건너 칼라브리아 지방에 상륙함으로써 이탈리아 본토에 발을 내딛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적에게 한치의 쉴 틈도 주지 않는 번개 같은 작전을 벌인 뒤 칼라브리아 지방을 통과해 1860년 9월 7일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인 나폴리에 진입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을 '양(兩)시칠리아의 독재자'로 선포했다(나폴리 국왕이 다스린 지역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이름이 붙었음). 이어서 나폴리 북쪽에 있는 볼투르노 강가에서 또 한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는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전투로, 약 3만 명의 군사를 지휘했다. 이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둔 뒤 그는 시칠리아와 나폴리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그결과에 따라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에마누엘레 2세와 만나자 제일 먼저 그를 가리켜 통일 이탈리아의 국왕이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에마누엘레 2세가 11월 7일 왕실마차를 타고 나폴리로 개선행진을 할 때 가리발디는 그의 곁에 앉았다.

그뒤 가리발디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보상을 사절하고 카프레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요구한 단 한 가지는 나폴리가 정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국왕의 총독 자격으로 나폴리를 계속 다스리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요구는 거부당했다.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 그는 여전히 위험한 급진주의자였고, 게다가 교권(敎權)반대자로서 공공연히 사회개혁에 대한 진보적인 견해를 피력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교황이 있는 로마를 다시 점령해 이탈리아의 수도로 삼기를 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로마에는 프랑스 수비대가 여전히 버티고 앉아 이 지역에 대한 교황의 세속적인 통치권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마누엘레 2세에게는 이것이 지극히 위험스러운 계획으로 보였다.

이밖에도 더욱 방심할 수 없는 위험은 가리발디가 에마누엘레 2세보다 더 인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피에몬테 왕국의 정규군은 가리발디의 군사적 성공을 매우 시기하고 있었으며 그에게 다시 점수를 얻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니와 공화주의자들이 가리발디의 협력을 얻어낸 뒤 그에게 군주제(君主制)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왕국의 성립

1861년 새로운 이탈리아 왕국이 그 모습을 드러냈으나 가리발디는 출발부터 새 왕국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골칫거리로 여겼다. 그는 의회에서 카보우르의 주장에 반대했으며, 국토의 절반을 점령해 국왕에게 헌납한 공을 세운 자원병들을 대우하지 않는다고 정부를 힐난했다. 또한 자신이 점령했던 여러 지방의 비효율적인 행정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는 자신을 거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생각했으며, 이탈리아 정부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 태도를 보였다.

이탈리아 밖에서 큰 찬사를 받고 있던 그는 남북전쟁중인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으로부터 1861년 7월 북부연합군의 사령관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사절했다.

그 이유는 링컨이 노예제에 대해 모든 논란을 일소할 만큼의 충분한 비난을 하려 하지 않은데다가 그에게 북군의 최고사령관 자리까지는 내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명성을 증명해준 또다른 일은 1864년 4월 영국에서 열광적인 영접을 받은 일이었다. 런던 거리를 지날 때 자발적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환호를 보낸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군사작전

1862년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다시 한번 그를 설득해 혁명원정대를 이끌도록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번에는 발칸 반도의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자원병 모집허가가 내려졌고 군수품은 시칠리아에서 조달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원정대로 교황령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령을 수비하고 있는 프랑스와의 관계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이탈리아 정규군을 동원해 그의 진격을 멈추게 했다. 뒤이어 아스프로몬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는 심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됐으나 풀려났고, 이로써 그와 에마누엘레 2세 사이의 비밀스러운 협조관계는 더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아스프로몬테 전투).

이때 입은 부상으로 그는 발을 절게 되었으나 1866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게 되자 이탈리아 정부는 이에 구애받지 않고 공공연히 그를 내세웠다.

그는 티롤에서 거의 독자적인 지휘권을 쥐었으며 이 전쟁에서 어떤 정규군들보다도 더 큰 신망을 얻었다. 또한 이 전쟁으로 이탈리아는 베네치아를 획득했다. 1867년 가리발디는 또다시 자신의 원정대를 이끌고 교황령으로 진격했다. 이번에도 이탈리아 정부는 비밀지원을 했으나 왕은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체했다. 그러나 정치문제를 제대로 풀어가지 못해 프랑스가 개입하게 되었고, 가리발디의 자원병 부대는 멘타나에서 프랑스군에게 패했다.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국왕과의 협조 관계를 은폐하기 위해 다시 한번 이탈리아군에게 체포당했고 곧 풀려나 카프레라로 돌아왔다.

1870~71년 그는 마지막 군사작전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을 도와 프로이센과 싸웠다. 여기서 다시 한번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고, 보르도에서 출마해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는 관절염과 여러 번의 부상으로 인해 말년에 이르러 절름발이가 되었다. 카프레라 섬에서 은둔 생활을 했으나 그를 찾아오는 많은 사절단들 때문에 여전히 세상사에 밝았고, 그래서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곤 했다. 말년에 그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했으나 카를 마르크스와 무정부주의자인 미하일 바쿠닌은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전쟁은 결코 정당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일종의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또한 노동의 권리와 여성해방의 옹호자로 인정받았다. 종교상으로는 자유사상가의 면모를 보였으며, 시대를 앞서 인종간의 평등 및 사형제도 철폐의 신념을 가졌다.

평가

'리소르지멘토' 시기에 이탈리아가 거둔 군사적 승리의 대부분은 가리발디의 공로였다.

이것은 그가 게릴라전의 명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선동가로서도 이탈리아의 통일에 많은 기여를 했다. 평민 출신인 가리발디는 애국심이라는 새로운 뜻으로 민중을 일깨우는 과업을 카보우르나 마치니보다 훨씬 잘 수행했다. 게다가 자신의 군사적·정치적 재능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대의(大義)에 이용한 것이 당시의 조류와 잘 맞아떨어져 그에게 커다란 갈채를 안겨주었다. 더불어 자신의 부귀영화에는 관심이 없는 정직한 인격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 올곧은 심성은 그의 정책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자신을 위한 권력추구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남아메리카의 경험을 통해 독재정치에 대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의회제는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정치제도라고 불신했다. 실제로 그가 1860년 남부 이탈리아에서 독재를 폈을 때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그것은 그뒤를 이은 이탈리아 왕국의 통치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가리발디에게는 지성적인 면이라고는 거의 없었으나 그의 천진한 급진주의는 이탈리아 국민들 사이에 사상 처음으로 정치적 자각을 불러일으켰으며 민족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깨웠다. 뒤에 사회주의로 입장을 바꾸기는 했으나 원칙적으로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민족주의가 목표로 했던 것은 언제나 민중의 해방이었지 과장된 애국심은 아니었다. 바로 이러한 목표를 구체화시켰기 때문에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역사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