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시몽

생 시몽

다른 표기 언어 Claude-Henri de Rouvroy, comte de Saint-Simon 동의어 생시몽 백작 클로드 앙리 드 루브루아
요약 테이블
출생 1760. 10. 17, 프랑스 파리
사망 1825. 5. 19,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의 바탕을 마련한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주요저작인 〈새로운 그리스도교〉(1825)에서 인간의 형제애가 산업과 사회의 과학적 조직화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가정교사들을 통해 비정규적인 교육을 받은 뒤 17세에 군에 입대했다.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인 아메리카 식민지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가 파견한 연대에 종군하여 1781년에는 요크타운에서 포병대 대위로 복무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등록하고 저명한 과학자들과 교분을 텄다. 첫 출판저작인 〈어느 제네바인이 동시대인에게 보내는 편지〉(1803)에서 생 시몽은 과학자들이 사회질서 속에서 사제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치권력을 가진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에 맞서 기득권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지식의 진보를 후원하는 것이라는 논리도 전개했다. 만년에는 종교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했다. 〈새로운 그리스도교〉에서 종교가 "가장 가난한 계급의 상태를 가장 빠르게 개선한다는 대의를 향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며, 이밖에도 유럽의 왕들에게 군국주의와 권력유지에 몰두하는 일을 그만두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서 진정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생애
  3. 그의 운동과 그 영향
생 시몽(Claude-Henri de Rouvroy)
생 시몽(Claude-Henri de Rouvroy)

개요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의 바탕을 마련한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사회주의). 주요저작인 〈새로운 그리스도교 Nouveau Christianisme〉(1825)에서 인간의 형제애가 산업과 사회의 과학적 조직화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생애

생 시몽은 가난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사촌이 루이 16세의 왕궁에 대한 회상록으로 유명한 생 시몽 백작이었으며 생 시몽 자신은 스스로가 샤를마뉴 대제의 혈통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하기를 즐겨했다. 가정교사들을 통해 비정규적인 교육을 받은 뒤 17세에 군에 입대했다.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인 아메리카 식민지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가 파견한 연대에 종군(從軍)하여 1781년에는 요크타운에서 포병대 대위로 복무했다.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생 시몽은 프랑스에서 친구에게 꾼 돈으로 새로 국유화된 땅을 사들여 살고 있었다.

공포통치시기에 뤽상부르 궁에 투옥되었으나 혁명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이전에 사놓은 국유지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호화로운 살롱을 열어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화려하고 자유스러운 삶을 누렸다. 그러나 몇 년 만에 파산 직전의 상태에 빠지고 말아 다시 학문연구로 되돌아와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에 등록하고 저명한 과학자들과 교분을 텄다.

첫 출판저작인 〈어느 제네바인이 동시대인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s d'un habitant de Genève àses contemporains〉(1803)에서 생 시몽은 과학자들이 사회질서 속에서 사제(司祭)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치권력을 가진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에 맞서 기득권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지식의 진보를 후원하는 것이라는 논리도 전개했다.

1805년 무렵 그의 경제사정은 어려워졌으며 그의 말년 20년 동안은 주로 친구들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여러 가지 연구·출판 활동에 힘을 쏟았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관념에 바탕이 될 지주(支柱)를 마련하려 했다. 생 시몽의 사상은 체계적이지 못하고 명료함과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군국주의의 유혈성에 대한 반발을 대표하는 사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는 세계의 산업화를 내다보았으며 과학과 기술이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연합체를 이루어 전쟁을 억제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불화가 있기 전까지 함께 일했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에게도 사상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쳤다. 1823년 실의에 빠져 권총자살을 기도했지만, 눈 하나를 잃고 마는 데 그쳤다.

만년에 쓴 저작에서 생 시몽은 종교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했다. 〈새로운 그리스도교〉에서 종교가 "가장 가난한 계급의 상태를 가장 빠르게 개선한다는 대의를 향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며, 이밖에도 유럽의 왕들에게 군국주의와 권력유지에 몰두하는 일을 그만두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서 진정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그의 운동과 그 영향

생 시몽은 1825년 친구들과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상은 이들을 통해 전해지고 유명해졌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으로는 방자맹 올랭드 로드리게와 바르텔레미 프로스페르 앙팡탱 등 두 은행가가 손꼽힌다. 이들은 스승의 사상을 전하는 작업으로 우선 1825년 〈프로뒥퇴르 Le Producteur〉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이 잡지의 발간은 이듬해 중단되었으나 운동은 성장하기 시작하여 1828년말에는 파리뿐 아니라 많은 지방도시에서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바자르는 1828년 '생시몽주의 신앙에 대한 완벽한 상론(詳論)'이라는 연속 강좌를 개설했다. 1830년까지 계속된 이 강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추종자들도 늘어났다. 1830년 7월 혁명을 통해 생시몽주의자들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들은 공유제·여성참정권·상속권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다음해에는 영향력이 큰 신문인 〈글로브 Le Globe〉를 장악했다. 이렇게 해서 생시몽주의자들의 모임은 가장 유능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프랑스 청년들 가운데 일군(一群)을 포괄할 수 있게 되었다.

생시몽주의자들은 3개의 등급으로 나누어진 조직으로 결사체를 이루었으며 뤼몽시뉴에 있는 집에서 가족이나 모임단위로 함께 살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들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균열은 논리적이지만 무신경한 편이던 바자르와 공상적인 사제제도를 만들고 거기에 자유로운 성(性)관계라는 형식을 보태려 했던 앙팡탱의 의견충돌에서 비롯되었으며, 얼마 후 바자르는 강력한 지지자들 상당수를 이끌고 탈퇴해버렸다. 1832년 겨울 동안 사치스러운 연회를 잇달아 열면서 생시몽주의자들은 재원(財源)이 줄어들고 평판이 나빠지는 등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마침내 이들은 메닐몽탕 교외에 있는 앙팡탱 소유의 넓은 영지로 옮겨갔으며 여기에서 푸른 겉옷에 붉은 베레모를 쓰고서 고상하고도 검소한 방식으로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적 색채를 띤 이 공동체는 얼마 안 되어 그 책임자들이 공공질서와 도덕을 손상시켰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으면서 와해되었고 지도자들은 사회생활로 돌아갔다.

생 시몽의 사상은 19세기 유럽 지성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과 토머스 칼라일, 독일의 하인리히 하이네, 러시아의 작가인 알렉산드르 헤르첸과 비사리온 벨린스키, 미국의 사회주의자인 앨버트 브리스베인 등이 생 시몽과 그 제자들의 사상에 여러 가지 경로로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경우, 친구이자 동료인 카를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생 시몽의 사상을 후대 사회주의 사상의 싹으로 간파하고 '천재의 폭넓은 안목'을 높이 평가했다.

펠릭스 마컴 같은 인물은 생 시몽의 사상이 많은 나라의 정치제도에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전통종교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한 20세기 후반부 상황에 특히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