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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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8. 1. 19, 프랑스 몽펠리에
사망 1857. 9. 5,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사회학·실증주의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콩트의 <실증철학 강의>는 현대 산업사회에 알맞은 정치조직의 기초를 형성할 수 있는 완벽한 철학체계였다. 그의 3단계 법칙에 따르면 인간의 지적 발전은 역사적으로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적 단계로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콩트는 신체적으로 허약했지만 지적으로는 놀랄 만큼 조숙했다. 그의 조숙함은 빠르게 학습 성과로 나타났고 외고집은 반항적인 기질로 표출되었다. 그의 반항은 관료적이고 허세적인 것, 국민의 지지가 없는 원칙 등을 겨냥한 것이었다. 콩트는 철학과 역사분야의 책을 폭넓게 읽었으며, 사회문제에 사상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학·천문학·물리학·화학·생물학 등에 대한 연구도 계속했다. 1846년부터 <실증 정치체계>의 완성 작업에 몰두했다. 이 책에서 콩트의 사회학이 완성되었다. 이 연구에서 인간의 지식과 노력의 핵심적 관심사인 도덕과 도덕의 진보를 강조했다.

콩트(Auguste Comte)
콩트(Auguste Comte)

사회학·실증주의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사회학과 실증주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정치조직의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 제시된 사상과 지식의 체계이다.

콩트의 출생지는 역사적·문학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 산맥이 보이는 곳에서 자란 콩트에게 나폴레옹에 대한 스페인의 저항은 단지 학문적인 관심거리만이 아니었다. 또 스페인·이탈리아·파리에서 시작된 도로들의 교차지인 몽펠리에는 오래전부터 지적 탐구가 활발한 곳이었다.

페트라르카, 라블레, 존 로크, 로렌스 스턴 등 저명한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했으며 1289년 이래 대학이 설립되었다. 콩트의 가족도 그의 성장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아버지 루이 콩트는 세무 공무원이었고 어머니 로살레 보이어는 철저한 왕정주의자이자 독실한 로마 가톨릭교도였다. 부모의 성향은 당시 프랑스를 휩쓸고 있던 공화주의와 회의주의를 거부하는 쪽이었다. 콩트는 이러한 갈등을 깊이 느꼈지만 어린 나이에 이미 가톨릭과 왕정주의를 모두 거부함으로써 그러한 갈등을 해소했다.

어린시절 콩트는 일생 동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여러 특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몸은 약하고 볼품이 없었다. 이러한 신체적 결함 외에도 위장장애와 근시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신체적으로는 허약했지만 지적으로는 놀랄 만큼 조숙했다. 그의 부모는 읽기·쓰기·기초 라틴어 등을 가르치는 선생을 고용했고 소년 콩트는 자주 공부시간이 되기도 전에 이 선생을 불러내곤 했다. 이러한 특성은 그가 가족을 떠났을 때 더욱 뚜렷해졌다. 9세 때 지방의 중등학교에 진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것은 불행한 경험이었다.

콩트는 어머니에게 애틋한 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뒷날 저작들에서 그 나이에 집을 떠난 것이 몹시 후회스럽다고 밝혔다. 기숙사를 비난했고 어린이 교육에서 가족생활의 지속적인 경험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조숙함은 빠르게 학습성과로 나타났고 외고집은 반항적인 기질로 표출되었다. 10세 또는 11세 무렵에 전교 학생 앞에서 스페인 국민이 나폴레옹을 스페인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밝혔다.

또 자신을 가르친 선생들이 나폴레옹의 기분을 맞추느라, 종교적 관용을 옹호한 볼테르를 지지하다가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꾼 데 대해 솔직하게 혐오감을 털어놓았다. 그는 공직자들을 몹시 혐오했다. 14세 때 부모의 종교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그 사실을 부모에게 알렸다. 이것은 중대하고 신중한 결정이었다. 그는 마음먹은 모든 일에서 우등생이었다.

15세 때 파리에 있는 에콜폴리테크니크(1794년 군사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나 곧 선진 과학을 가르치는 일반학교로 바뀜)의 입학시험에서 상위권에 들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입학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리세에서의 마지막 1년 동안은 수학선생이 병으로 고생하자 대신 수학을 가르쳤다.

조숙하고 머리가 좋고 고집스러웠지만 동료들과의 우애가 돈독해 그들은 콩트를 좋아했다.

그의 반항은 관료적인 것, 허세적인 것, 속된 것, 국민의 지지가 없는 원칙 등의 각종 전제(專制)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뒤 여러 사람과 많은 논쟁을 벌였지만, 처음부터 깊이 있고 지속적이고 충실한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콩트는 이전의 스승 다니엘 엔콘트르에 대해서도 따뜻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의 마지막 저작 〈주관적 종합 Synthèse subjective〉(1856)을 스승에게 바침으로써 이러한 마음을 표현했다.

또 오랫동안 몽펠리에의 급우 중 한 사람인 폴 발라트와 굳건한 우정을 유지했다. 콩트의 인생에 관해 알려진 대부분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신뢰에 찬 편지에서 나온 것이다. 16세 때인 1814년 10월 파리의 에콜폴리테크니크에서 콩트의 인생은 새로운 장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그의 반항심으로 2년 만에 갑자기 끝나버렸다. 에콜폴리테크니크의 일과는 엄격했다. 하루 일과는 북소리와 더불어 오전 5시 30분에 시작해 저녁 9시 30분에 끝났다. 그 사이의 시간은 빈틈없이 짜여 있었다. '사상가'(학생들은 콩트를 이렇게 불렀음)는 이러한 일과를 오래 견딜 수 없었다.

한 번은 관리들이 학생들에게 저녁 9시 30분까지 반드시 귀교하도록 지시한 적이 있었는데, 150명의 학생이 극장에 갔다가 밤 11시에야 돌아왔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했을 때 콩트는 그를 싫어했으면서도 동료 학생들과 함께, 동맹군에 맞서 파리를 방어하는 데 나서게 해달라고 학교에 요구했다. 콩트는 종종 밤중에 혼자 학교 밖으로 나가 파리 군중과 팔리스루아얄 거리 근처의 매춘부들 속을 배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풍기문란 사건이 일어났다. 교사 하나가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다.

콩트는 대답할 차례가 되자 똑같이 격식없는 자세를 취했다. 교사는 그의 태도가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콩트는 그 교사의 사임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돌려 학생들의 서명을 받아냈다. 콩트는 경찰의 감시 아래 몽펠리에로 돌려보내졌고, 동시에 전부터 공화주의 성향으로 의심받고 있던 이 학교는 폐교되었다. 콩트는 이제 파리를 벗어나서는 오래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곁눈으로만 보아온 고통스럽고 무질서한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재건사업을 돕기 위해 그 속에 깊이 뛰어들고 싶었다. 1816년말 18세의 콩트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때 격렬하고 고되지만 첫번째 주요업적을 이룬 실질적인 독립기가 시작되었다.

그의 공부는 점점 더 체계와 일관성과 깊이를 갖추어갔다. 가난했지만(한 전기작가의 말처럼) '다락방의 달콤한 자유'를 즐겼다. 그는 철학과 역사분야의 책을 폭넓게 읽었으며 특히 인간사회의 역사에서 어떤 질서를 분별하고 추적하려 한 사람들에게 매료되었다. 몽테스키외, 콩도르세, A.-R.-J. 튀르고, 조제프 드 메스트르 등 18세기 프랑스의 주요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은 콩트의 사고체계 속에 비판적으로 녹아들어갔다.

모든 것은 인간 정신의 본성과, 영국의 과 독일의 칸트가 연구한 인간의 인식에 관련되어 있었다. 점차 이 모든 요소들은 새롭게 종합되었다. 콩트의 이 새로운 종합은 자신이 새로 정식화한 인간과 사회에 관한 과학과 연결되면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만들기 위한 만족할 만한 기초를 제공하는 듯했다.

그는 가끔씩 강의와 평론기사를 써서 번 수입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생활을 했고 뒷날 좋든 나쁘든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앙리 드 생 시몽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사회개혁자이며 사회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현대사회에서 경제조직의 중요성을 명확히 이해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콩트의 생각은 생시몽과 매우 비슷했다. 그리하여 콩트의 초기의 글들이 생시몽의 간행물에 실렸다. 그밖의 중요한 친구들은 천문학자인 장 들랑브르와 동물학자인 앙리 드 블랭빌이었다. 콩트는 무엇보다도 사회문제에 사상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학·천문학·물리학·화학·생물학 등에 대한 연구도 계속했다.

1821년 5월 어느 날 콩트는 늘 하던 저녁산책을 하다가 카롤린 마생이라는 젊은 매춘부를 만났고 잠시 동거한 뒤 결혼했다.

결혼은 민사혼(民事婚)으로 치러졌고 마생이 전에 사귀던 한 변호사가 참석했다. 이 결혼은 마생과 그 변호사의 사전 계획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럴 법한 이야기이다. 아무튼 콩트의 연구와 저술 계획은 확실한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었고, 그는 가족과 어린시절 친구들 곁에서 조용히 살면서 연구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아내를 동반한 몽펠리에 방문은 온갖 냉대 속에서 비참하게 끝났다.

2주일 뒤 그들은 파리로 돌아왔다. 이 일이 있은 직후 콩트는 '실증철학 체계'를 수립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당대의 매우 뛰어난 많은 사상가들로 구성된 청중을 상대로 1826년 4월에 시작한 일련의 강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2번째 강의 후 갑자기 강의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가 미쳐버렸기 때문인데 이 사실은 그의 아내와 논쟁적인 수사이자 철학·정치학 저술가인 아베 펠리시테 로베르 드 람네에 의해 발견되었다. 콩트는 파리의 아파트로 돌아오기 전에 잠시 동안 정신병원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마생과 함께 외롭게 지내면서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고는 몹시 의기소침해졌다.

1827년초 퐁데자르 거리를 걷다가 다리에서 센 강으로 뛰어들었는데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던 시 방위대의 군인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때부터 눈에 띄게 회복되기 시작했고 혼자 여행하면서 몽펠리에의 부모를 방문한 1827년 여름에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뒤 콩트는 부모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마생과 새 아파트에 입주해서 소박하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호의를 가진 한 제조업자와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정하지 않은 강의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1829년 그는 이미 계획한 일련의 강의를 다시 시작했다.

이 강의는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는 1829~30년에 왕립학술협회에서 다시 강의를 했다. 그뒤 12년 동안 이 강의내용을 출판(6권)하는 데 몰두했다. 콩트의 〈실증철학 강의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는 현대산업사회에 알맞은 정치조직의 기초를 형성할 수 있는 완벽한 철학체계였다. 그의 '3단계 법칙'에 따르면 인간의 지적 발전은 역사적으로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적 단계의 3단계로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신학적 단계는 세계와 세계 속의 인간의 운명은 신의 의지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고, 형이상학적 단계는 본질, 궁극원인, 다른 추상개념들로 인간 및 세계의 운명이 설명되는 단계이고, 그리고 마지막이 현대의 실증적 단계이다. 이 마지막 단계의 특징은 인간지식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다. 지식은 인간의 종족 본성과 다양한 사회적·역사적 상황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절대적인 설명은 현상들 사이의 규칙적 연관인 좀더 분명한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포기된다(신학, 인식론). 콩트는 모든 실증적 지식을 '과학의 위계질서' 속에서 분류하여 각 과학의 방법을 분명히 밝혔고, 특히 새로운 통합과학인 사회학을 강조했다.

이 작업은 1842년에 끝났으며, 이 시기(1830~42)에는 저술 이외에도 많은 활동을 했다.

1830년 콩트는 국가방위군에 입대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3일간 감옥살이를 했다. 이해부터 1848년까지 매년 보수 없이 노동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또 1832년부터 에콜폴리테크니크의 수학강사가 되었고 1836년부터는 시험관이 되었다. 그러나 마찰이 생겼고, 그러다가 〈실증철학 강의〉 제6권에서 관료 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공격함으로써 해임되었다.

1837년 콩트의 어머니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마생에게는 가끔 남자들이 찾아왔고 그녀가 집을 비우는 일도 잦아졌다. 사실상 결혼생활은 깨졌고 콩트는 더욱 고독해졌다. 그는 좋아하던 오페라를 보러 갔고 베르길리우스, 단테,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등의 고전을 읽었다. 당시 출판물이 쏟아져나오자 이른바 '뇌 건강'을 위해 독서의 범위와 질을 점차 구분하기 시작했고 이때문에 많은 비웃음을 샀다. 그의 강의는 여전히 꼼꼼하고 딱딱했다.

1838년 〈에든버러 리뷰 Edinburgh Review〉지가 그의 연구를 진지하게 다루면서, 1840년부터 여러 영국의 학자들이 그에 관한 글을 썼고, 그를 방문했다. 1842년 8월 마생은 결국 그를 떠났다. 콩트는 그녀에게 생활비를 마련해주었지만 그들은 결코 다시 만나지 않았다.

다음 3년 동안에 콩트의 운명은 바뀌었다.

그는 에콜폴리테크니크의 강사 자리를 잃었지만 존 스튜어트 의 노력으로 3명의 영국인에게 재정적 도움을 받았다. 노동자에 대한 그의 강의는 점차 진가를 인정받게 되었고, 1845년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강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콩트의 집까지 행진했다. 1844년 10월 콩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면서도 슬프고 큰 영향을 끼친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는 제자인 막시밀리앵 마리를 만나러 갔다가 그의 여동생 클로틸드 드 보를 소개받았는데 그녀도 이혼한 상태였다.

그녀는 파리의 한 평론지에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는 작가였다. 둘 사이에 편지가 자주 오갔다. 1845년 8월 그들은 막시밀리앵의 아기 세례식에서 대부·대모가 되었다. 이때부터 클로틸드는 플라토닉 러브를 고집하면서 망설였으나 그들의 관계는 점차 깊어졌다. 그들은 새로운 도덕·종교·결혼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1846년 4월 클로틸드는 결핵으로 죽었다. 콩트는 슬픔으로 상심한 가운데서도 마지막 과제인 〈실증 정치체계 Système de politique Positive〉의 완성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뒤 8년(마지막 제4권은 1854년에 출판되었음) 동안 콩트는 이 작업에 몰두했다.

이 책에서 사회학에 대한 콩트의 정식이 완성되었다. 한 권은 사회의 성격에 관한 '사회정역학'을, 또 한 권은 사회변화의 역사에 관한 '사회동역학'을 다루고 있다. '인간 개인'에 관한 풍부한 연구도 담겨 있다. 이 연구 전체는 인간의 지식과 노력의 핵심적인 관심사인 도덕과 도덕의 진보를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 필요한 정책 또는 정치조직을 설명했다.

이 연구과정에서 콩트는 대단히 까다로운 사람이 되어갔다. 그러나 그의 가정부 소피 블리오는 그녀의 가족을 집으로 데려왔고 그를 충실하게 돌보았다. 그의 저작들은 이제 널리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많은 영국 지식인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저작을 번역하고 널리 유포했다. 프랑스인 추종자들도 증가했다. 그는 전세계의 실증주의 학회와 폭넓게 서신을 교환했다. 매주 콩트는 실증주의자인 친구와 동료들을 불러들였다. 그의 방에 들어서면 모든 종류의 애정이 그의 주변에 모이는 듯했고 또 그의 내면으로 융합되는 듯했다.

그를 방문한 모든 사람은 이제 신경성 경련과 눈물병마저 겹친 여전히 매력 없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의 풍모를 감싸고 있는 광채와 침착성에 관해 말했다. 오랜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얻은 오한 때문에 1857년 5월부터 앓기 시작해 그해 9월에 죽었다.

천재 콩트는 한편으로는 사도의식을, 다른 한편으로는 비웃음을 불러일으켰다. 콩트의 지나친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거만하고 바보 같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완수한 연구는 여전히 훌륭한 종합이며 중요한 사상체계이다. 심지어 그가 비웃음을 받은 요소들, 즉 정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교한 의례(어떤 저자에 의하면 '그리스도 없는 가톨릭교')조차 현대사회에서 지속되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학화·산업화된 문명의 위기 속에서, 어떻게 하면 개인의 만족과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따뜻한 감정을 견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궁극적인 신념과 필수불가결한 사회제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이것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콩트는 어느 누구보다도 주목할 만한 대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