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

다른 표기 언어 John Stuart Mill
요약 테이블
출생 1806. 5. 20, 런던
사망 1873. 5. 8, 프랑스 아비뇽
국적 영국

요약 20년 동안 영국 동인도회사와 인도 정부 간의 교섭업무를 맡았으며 1856년에는 심사국의 책임자로 일했다. 정치경제학자로 연구, 저술활동을 왕성하게 했고, 1865년 웨스트민스터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의회활동을 했다.
밀은 스코틀랜드의 사회학자·경제학자·철학자인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밑에서 엄격하게 교육받은 그는 1823년 17세가 되던 해 인도회사의 심사국에 들어갔다. 1832~33년 여러 출판물에 글을 발표했고, 1835년에는 <런딘 리뷰>의 편집을 맡았다. 이후 정치경제학, 윤리학과 정치학 관련 저서들을 출판했다. 1868년 총선에서 낙선한 그는 아비뇽 별장에서 독서·저술·토론에 열중했으며 식물연구에도 힘을 기울였다.

목차

접기
  1. 초기활동
  2. 공직생활과 저술활동
  3. 말년
  4. 영향과 중요성
밀(John Stuart Mill)
밀(John Stuart Mill)

19세기 개혁 시대에 시사평론가로 이름이 높았다.

논리학자이자 윤리학 이론가로서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초기활동

스코틀랜드의 사회학자·경제학자·철학자인 제임스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8세 때 이미 그리스어로 된 수많은 원전을 읽었으며 라틴어도 배웠다. 12세 때 스콜라 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그리스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관련서적도 읽었다. 다음해 스코틀랜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의 저작과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저작을 연구했다. 전(全) 교육기간 동안 밀은 아버지의 정력적인 성격과 철저한 지적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20년 5월부터 1821년 7월 사이에 밀은 영국의 이름난 철학자·경제학자·법률이론가인 제러미 벤담의 형제인 새뮤얼 벤담의 가족과 함께 프랑스에서 지냈다. 당시에 쓴 일기를 보면 밀은 화학과 식물학을 연구했으며 최신 수학문제에도 매달렸음을 알 수 있다. 1821년 영국으로 돌아와 심리학과 로마 법률을 공부했는데, 당시 아버지는 밀이 변호사 직업을 갖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23년 17세가 되던 해 인도회사의 심사국에 들어감으로써 아버지의 기대는 꺾이고 말았다. 짧은 견습기간을 거쳐 밀은 보조심사관이 되어 그후 20년(1836~56) 동안 영국 동인도회사와 인도 정부 간의 교섭업무를 맡았으며, 1856년에는 심사국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822~23년 밀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공리주의자협회를 결성했다. 신문 〈트래블러 Traveller〉지와 〈모닝 크로니클 The Morning Chronicle〉에 글을 기고해 토론의 자유를 열렬히 옹호했다.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의 기관지 〈웨스트민스터 리뷰 Westminster Review〉가 창간됨으로써 밀은 또다른 의견표현의 장을 얻었다. 밀은 아버지 집에 초대된 저명인사들의 토론모임에 열심히 참석했으며 1825년 런던 토론회에도 참석했다.

공직생활과 저술활동

밀은 1826년부터 런던 토론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독특한 음을 내는 지적 기계라고 불릴 정도로 호기심섞인 주목을 받았다.

사사로운 애정보다는 공적인 애정을 더 중요시한 아버지의 강한 영향을 받았던 밀은 이제 더 유연하고 실제적인 지적 태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1829년 런던 토론회에 참석하는 일을 중단했다.

1830년 가을 파리에서 젊은 자유주의자들과 교분을 쌓은 뒤 영국으로 돌아와 쓴 편지들은 이제 희망찬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이정표였다. 1832~33년 여러 출판물에 많은 글을 발표했으며, 1835년에는 윌리엄 몰즈워스 경이 창간한 〈런던 리뷰 The London Review〉의 편집을 맡았다.

이 잡지는 1836년 〈웨스트민스터 The Westminster〉와 통합해 〈런던 앤드 웨스트민스터 리뷰 The London and Westminster Review〉가 되었는데, 밀은 1840년까지 이 잡지의 주필로 일했다. 1840년 〈에든버러 리뷰 The Edinburgh Review〉에 발표된 중요한 논문들은 밀이 관심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중 특히 밀의 논변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벤담(1838)과 콜리지(1840)에 관한 2편의 논문에서는 당시 영국의 급진주의에 불어넣으려고 시도한 새로운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밀은 논리학과 정치경제학에 관한 체계적인 저작들을 썼다. 인간성에 대해 새롭게 각성한 열정을 바탕으로 도덕과 사회과학의 결론을 확실히 증명하는 방법을 제공하려 했다. 밀은 프랑스 실증주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에게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그에게 주된 영감을 준 사람은 영국의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아이작 뉴턴이었다. 밀은 새로운 논리학이 옛 논리학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삼단논법을 귀납논리의 추정체계로 대체할 것을 주장한 스코틀랜드 논리학자들에 반대했으며, 귀납논리가 삼단논법을 '보완할 뿐 대체할 수 없다'고 보았다.

1837년 밀은 휴얼의 〈귀납과학의 철학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과 존 허셜의 〈자연철학 연구에 관한 예비 논의 Preliminary Discourse on the Study of Natural Sciences〉를 읽고 나서 과학연구의 방법을 정식화하고 옛 논리학을 보완해 새로운 논리학을 결합할 방안을 찾아냈다.

1843년 〈논리학 체계 A System of Logic〉가 2권으로 나왔다. 이 저서의 제6판에서 밀은 데이비드 흄의 용어로 된 인과설명을 바탕으로 해석학·심리학·사회학을 포괄하는 인문과학의 논리를 세우려고 과감하게 시도했다. 그러나 밀이 세운 이 논리는 이후 근본적인 비판을 받았다.

정치경제학자로서 밀의 경력은 3차례의 발전단계를 거쳤다.

먼저 1844년 〈정치경제학의 해결되지 않은 몇 가지 문제에 관하여 Essays on Some Unsettled Questions of Political Economy〉에서 밀은 국제무역에서 거둔 이익의 분배, 소비가 생산에 미치는 영향, 생산노동과 비생산노동의 정의, 이윤과 임금 사이의 정확한 관계 등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여기서 리카도의 주장을 정확히 규정하고 결론을 더욱 철저히 밀고 나가는 등 자신이 데이비드 리카도의 제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가 첫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정치경제학의 원리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1848)를 출간하면서 밀의 사상은 독창성을 띠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가 2번째 단계이다. 이 책에서 밀은 아일랜드의 무질서와 황폐한 상황에 대한 치유책으로 농민 소유권 제도를 확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뒤 사회주의자의 저서를 철저히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사회문제가 정치문제 못지 않게 중요함을 확신하게 되었다. 밀은 분배와 생산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했으며, 노동계급을 구속하고 비참한 상태에 묶어두는 분배에 찬성하지 않았다.

밀은 사회주의의 해결책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로부터 사회의 기초를 중시하는 관점을 새롭게 배웠다. 이 시기가 정치경제학자로서 밀의 3번째 발전단계이며, 밀의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나중에 아내가 된(1851) 테일러 부인(해리엇 하디)이었다. 7년의 결혼생활 동안 밀은 영국동인도회사 일에 점차 깊이 빠져들었으며 저술활동은 다른 어느 시기보다 미미했다. 인도회사 심사국에서 책임을 맡은 동안 1858년 회사가 폐쇄될 때까지 회사폐쇄 및 권한이양에 반대하여 정력적인 탄원활동을 벌였다.

회사폐쇄와 함께 공직에서 은퇴한 밀은 곧이어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아비뇽 근처 생베랑에 정착했다.

말년

밀은 이전에 틈틈이 구상해 아내와 함께 써놓았던 윤리학과 정치학 관련저서들을 출판하면서 삶의 위안을 찾았다.

1859년에 〈자유론 On Liberty〉·〈의회 개혁에 관한 구상 Thoughts on Parliamentary Reform〉이 출판되었다. 1861년에 출판된 〈대의제 정부에 대한 고찰 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에서는 민주정부에 대한 신념과 현실 민주주의에 대한 비관론이 섞여 있다.

〈공리주의 Utilitarianism〉(1863)에서는 자신의 윤리학설에 대한 반대와 오해에 답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특히 '효용성'(utility) 개념에상의 쾌락과 고차적인 감정의 만족감을 포함할 것을 분명히 했다. 밀은 철학문제에 더 폭넓은 관심을 가져 〈윌리엄 해밀턴 경의 철학에 대한 검토 Examination of Sir William Hamilton's Philosophy〉·〈오귀스트 콩트와 실증주의 Auguste Comte and Positivism〉를 썼다.

밀은 윌리엄 해밀턴의 글을 영국 직관철학의 견고한 요새로 보고 그의 주장을 공격했다. 콩트에 관한 책에서 밀은 콩트의 초기 실증주의 철학과 후기 인문주의 종교를 구분하여, 철학은 버클리와 흄의 견해를 발전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했지만, 종교는 고통받는 인류 위에 군림하는 권위주의적 위계질서를 세우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밀은 이 기간 동안 주로 이론적인 연구에 매달렸지만 현실정치 문제에도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의 남북전쟁은 궁극적으로 노예해방의 대의를 갖는다고 보아 북군을 지지했다. 1865년 웨스트민스터에서 하원의원에 입후보한 밀은 자신이 세운 원칙에 충실해 어떠한 적극적인 선거활동도 하지 않았으나 당선했다. 의회에 진출해 1867년 선거법 개정법안이 상정되었을 때 정부의 권한남용을 막을 법안을 이끌어내는 일에 적극 참여했다. 그밖에도 아일랜드의 토지소유 개혁, 국가 빚의 감축, 크림 전쟁 동안 바다를 통한 재산의 이송을 규정한 파리 선언의 무효화 등을 적극 옹호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친근감을 주지 못하는 개혁안을 줄곧 제안해 '온건 자유주의자'의 인기를 잃었는데, 1868년 총선에서 낙선하자 아비뇽으로 돌아왔다.

아비뇽의 별장으로 돌아온 밀은 독서·저술·토론에 열중했으며 식물연구에도 힘을 기울였다. 밀은 일생 동안 정력적인 식물연구자였으며 학술지 〈파이톨로지스트 Phytologist〉에도 몇 편의 짧은 논문을 기고했다. 성실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토지·노동·재능·형이상학과 심리학 문제와 같은 다양한 인간사를 〈포트나이틀리 리뷰 Fortnightly Review〉에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1867년에는 P. A. 테일러 부인, 에밀리 데이비스 등과 함께 '전국여성참정권단체연합'을 결성했으며, 1869년에는 〈여성의 종속 The Subjection of Women〉(1861 저술)을 출간했다(여성참정권). 그의 삶에서 마지막 공직활동은 '토지소유개혁협회' 결성에 참여한 일이었다.

밀은 1873년 아비뇽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서전 Autobiography〉(1873)·〈종교에 관한 에세이 3편 Three Essays on Religion〉(1874)은 죽은 뒤에 나왔다.

영향과 중요성

밀은 극도로 단순한 생활방식을 고집한 인물이었다. 그의 저작이 당대의 영국 사상에 끼친 영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당시의 중요 문제를 다룬 그의 자유분방한 탐구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밀이 남긴 철학의 장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여러 평가가 있다. 밀의 저술은 아주 명석한 철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 지성의 폭이 다소 좁다는 한계도 보여준다.

밀의 철학은 아직까지도 철학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밀의 철학이 진지한 인간정신에 대해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는 점과 더불어 특정 경향의 철학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철학은 곧 공리주의이다. 그러나 밀의 저서에서는 간혹 공리주의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구절이 나타나기도 한다. 밀을 흔히 경험주의자라고 이야기하지만 밀의 수학이론은 경험주의적 사고가 숙명적으로 처할 수밖에 없는 귀결들을 제시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밀이 벤담과 아버지 제임스 밀에게서 공리주의를 물려받아 당시에 제기된 비판에 대응해 수정했다고 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밀이 공리주의자의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밀은 벤담과 자신을 분명히 구별짓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중요한 철학주제에서도 밀의 위치를 정확히 규정하는 일은 힘들다. 때로는 공리주의자라기보다 분별력없는 결론을 내놓은 낭만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분명 밀은 어떤 종류이든 생명력있는 사상 조류를 수용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은 낭만주의자였다는 점에서 그의 시대를 대표한다. 밀은 자신이 당대에 가장 뛰어난 지성과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인물이라고 자부했지만, 사실 그의 저작에는 19세기 초반의 온갖 사상 경향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