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리카도

데이비드 리카도

다른 표기 언어 David Ricardo
요약 테이블
출생 1772. 4. 18/19, 런던
사망 1823. 9. 11, 잉글랜드 글로스터셔 갯컴비파크
국적 영국

요약 데이비드 리카도는 애덤 스미스와 함께 영국 고전경제학의 이론체계를 완성하여 19세기 경제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20대에 증권거래소의 일을 하며 재능과 특성을 인정받았고, 사업의 성공으로 젊은 시절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 경제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리카도는 이후 10년간 경제학 연구에 전념했다. 리카도의 첫 번째 저작은 영국은행의 정책을 둘러싼 논쟁에 신선한 충격을 주어 중앙금융 이론 발전에 기여했다. 제임스 밀의 고문 영입과 제레미 벤뎀 및 토머스 맬서스 등과의 친분은 리카도의 경제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저서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를 통해 사회적 생산물이 '사회의 3계급', 즉 지주·노동자·자본소유자 사이에 분배되는 법칙을 분석했으며, 상대국 사이의 비교우위론을 주장하며 자유무역을 옹호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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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사업계 은퇴
  4. 리카도에 대한 평가
리카도(David Ricardo)
리카도(David Ricardo)

개요

데이비드 리카도는 경제이론에 체계적이고도 고전적인 형식을 부여해 19세기 경제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데이비드 리카도의 자유방임 원리가 전형적으로 드러나 있는 철의 임금법칙론(Iron Law of Wages)에서 리카도는 노동자의 실질소득을 늘리려는 시도는 모두 무익한 것이며 임금은 필연적으로 생존수준에 가깝게 유지된다고 말했다.

초기생애

데이비드 리카도는 유태계 독일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세부터 런던 증권거래소의 중개업자로 큰 재산을 모은 아버지의 사업을 거들기 시작해 일찍이 사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21세 때에는 종교문제로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일신론자가 되어 퀘이커교도와 결혼했다. 그로 인해 데이비드 리카도는 혼자 힘으로 자립해야 했다. 증권거래소 일을 계속하는 동안 재능과 특성을 인정받은 리카도는 어느 유명한 금융회사로부터 후원을 받아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리카도는 단 몇 년 만에 재산을 모으고 생활의 여유를 갖게 되자 다방면으로 재능을 펼쳐 문학과 과학, 특히 수학·화학·지질학 분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경제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799년 우연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Wealth of Nations〉을 읽게 되면서부터였다.

처음에는 다소 즉흥적으로 시작했지만 차츰 집중력을 보이면서 이후 10년간 경제학 연구에 전념했다. 최초로 출판된 저서는 〈지금(地金)의 고가(高價), 지폐의 평가절하를 나타내는 증거 The High Price of Bullion, a Proof of the Depreciation of Bank Notes〉(1810)로 1년 앞서 〈모닝 크로니클 Morning Chronicle〉에 발표했던 여러 편의 소고(小考)를 모아 새롭게 편찬한 것이었다.

데이비드 리카도의 저작은 영국은행의 정책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논쟁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당시 정부는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한 부담 때문에 영국은행에 지폐의 금태환을 정지시켰다. 영국은행과 여러 지방은행은 현금지불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지폐발행 및 대출량을 늘렸다. 영국은행의 감독관은 계속되는 물가상승과 파운드화(貨)의 평가절하가 은행신용 증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리카도와 다른 논자들은 지폐발행량과 물가 수준 사이에는 실로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물가 수준은 환율과 금의 유입·유출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반론을 폈다. 반론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즉 은행은 한 나라의 중앙 금 저장관리자로서 전반적인 경제 동향에 따라 대출정책을 취해야 하며 통화와 신용의 규모에 대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논쟁은 이처럼 중앙금융 이론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원에서는 '지금(地金)위원회'를 설치했는데 이 위원회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견해를 대폭 신뢰하여 은행제한법령의 폐지를 제안했다.

이무렵 데이비드 리카도는 장차 그의 지적 발전을 심화시키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몇 사람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고 존 스튜어트 의 아버지였던 제임스 밀로서, 리카도의 정치고문이자 편집고문이 되었다.

다른 한 사람은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덤이었고 또 한 사람의 친구는 토머스 맬서스였다. 이후 데이비드 리카도는 인구증가율이 식량공급증가율을 앞지른다고 하는 맬서스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1815년에는 곡물 수출입을 규제하는 '곡물법'을 둘러싸고 또 한 차례 논쟁이 벌어졌다. 밀의 가격이 하락하자 의회는 수입밀에 대한 관세를 높였고, 이로 인해 대중적인 항의가 촉발되었던 것이다. 리카도는 당시 〈저곡가가 자본의 이윤에 미치는 영향에 따른 시론 Essay on the Influence of a Low Price of Corn on the Profits of Stock〉(1815)을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그는 수입곡물에 대한 관세인상이 지주의 지대 수입을 높이는 반면 생산자의 이윤은 하락시킨다고 주장했다.

사업계 은퇴

곡물법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 1년 전, 데이비드 리카도는 42세의 나이로 사업계에서 은퇴하고 글로스터셔에 정착하면서 그곳의 넓은 토지를 사들였다.

1819년에는 당시 흔히 행해지던 방식으로 돈을 주고 하원의 의석을 사 포르타링턴을 지지하는 하원의원이 되었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자주 연설을 하지는 않았고 그의 자유무역사상이 하원의 지배적인 견해는 아니었지만 경제문제에 관한 명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그의 의견은 매우 존중되었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또한 자신의 저서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1817)를 통해 사회적 생산물이 '사회의 3계급', 즉 지주·노동자·자본소유자 사이에 분배되는 법칙을 분석했다.

그밖에도 자신이 발견한 여러 가지 사실을 더욱 광범위하게 적용해 다양한 경제원리들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당시 데이비드 리카도는 상품의 상대적인 국내 가치는 생산에 소요되는 노동량에 따라 결정되며 지대는 생산비용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실업은 거의 없는 것으로 가정한 상태에서 이윤은 임금에 반비례하고 임금은 생필품 비용에 따라 변화하며 지대는 인구증가와 한계경작비용 증가에 따라 상승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빠른 인구증가로 인해 임금이 생존수준 이하로 하락하고 한계경작비용이 증가해 결국 이윤은 줄고 그에 따라 자본형성이 억제될 것을 염려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또한 국가간의 무역을 지배하는 요인은 비교생산비가 아니라, 무역 당사국간의 비교우위를 반영시켜 교역을 정당화시키는 내부 가격구조의 차이라고 주장했다. 그밖에도 통화문제, 특히 과세문제를 상세히 다루었던 리카도는 비록 부분적으로 애덤 스미스의 연구에 바탕을 두었지만 한편으로는 스미스보다 더욱 정교하게 경제학의 영역을 세분했으며 사회철학을 거의 배제했다.

1823년 병으로 의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데이비드 리카도는 51세가 되던 해에 일생을 마쳤다.

리카도에 대한 평가

리카도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간을 사업에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또한 자신의 견해를 추상적인 방식으로 설명해 논적들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했지만, 결국 그의 견해는 영국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오래전부터 다른 저작과 새로운 이론적 접근들이 등장해 그의 사상을 대체하고 수정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경제학을 최초로 체계화시킨 사상가로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자유방임자본주의 옹호자들뿐만 아니라 카를 마르크스나 로버트 오언처럼 그에 반대한 사람들 가운데에도 각자 다양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많은 작가들이 그의 사상에 크게 의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