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증주의

실증주의

다른 표기 언어 positivism , 實證主義

요약 실증주의의 기본 주장은 사실에 관한 모든 지식은 실증적 경험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사실의 영역을 넘어서면 순수논리학과 순수수학의 영역으로 한다는 것이다. 실증주의자에게는 관찰과 경험의 증언에 엄격히 따르는 것이 절대명령이다. 윤리학에서 대부분의 실증주의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나 이와 유사한 윤리 규범을 받아들인 공리주의자였다.
프로타고라스·섹스토스 엠피리코스·오컴·게오르크 리히텐베르크 등 실증주의를 미리 내다본 인물들이 있었으나, 실증주의의 가장 가까운 뿌리는 이성의 계몽을 강조한 프랑스 계몽주의와 감각경험의 역할을 강조한 데이비드 흄, 조지 버클리의 영국 경험론이었다. 콩트는 계몽주의 백과전서파의 영향을 받았고, 사회사상면에서는 프랑스 사회주의의 창시자 클로드 앙리 생 시몽의 영향을 받았다.

목차

접기
  1. 사회실증주의
  2. 비판적 실증주의
  3. 초기 논리실증주의
    1. 개요
    2. 언어와 의미 명료화
    3. 의미의 검증가능성 기준
    4. 통일과학 테제
  4. 논리경험주의의 후기 실증주의
    1. 개요
    2. 비판과 논쟁

기본 주장은, 첫째, 사실에 관한 모든 지식은 '실증적' 경험자료를 바탕으로, 둘째, 사실의 영역을 넘어서면 순수논리학과 순수수학의 영역으로 한다는 것이다. 실증주의자에게는 관찰과 경험의 증언에 엄격히 따르는 것이 절대명령이다.

형이상학이란 실재의 본성에 관한 사변에 불과하며 이 사변을 지지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어떤 증거도 허용하지 않는다. 한편 윤리학에서 대부분의 실증주의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나 이와 비슷한 종류의 윤리 규범을 받아들인 공리주의자였다.

철학의 역사에는 실증주의를 미리 내다본 인물들이 있었다. 고대 철학자로는 BC 5세기의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와 AD 3세기말에 살았던 고전적 회의론자 섹스토스 엠피리코스, 중세 철학자로는 유명론자 오컴, 18세기에는 독일 사상가 게오르크 리히텐베르크 등이 있었다. 그러나 실증주의의 가장 가까운 뿌리는 이성의 계몽을 강조한 프랑스 계몽주의와 감각경험의 역할을 강조한 데이비드 , 조지 버클리의 영국 경험론이었다.

콩트는 드니 디드로, 장 달랑베르 등 계몽주의 백과전서파의 영향을 받았고, 사회사상면에서는 프랑스 사회주의의 창시자 클로드 앙리 생 시몽 백작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클로드 앙리 생 시몽(Claude-Henri de Rouvroy)
클로드 앙리 생 시몽(Claude-Henri de Rouvroy)

사회실증주의

콩트의 실증주의에서 가장 기본적인 주장은 이른바 지성 발달의 3단계 법칙이다. 콩트에 따르면 인류의 전역사와 개인의 성장사에서 사유 형태의 진화는 매우 비슷하다. 첫째, 신학적 단계에서 자연현상은 초자연적 힘 또는 신적 힘의 산물로 설명된다(→ 자연철학). 콩트는 이 단계가 모든 것을 인간과 유비하는 데 기초한 의인화 단계라고 비판했다.

둘째, 형이상학적 단계는 탈의인화했을 뿐 여전히 신학적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자연현상은 비인간적 힘, 신비한 성질, 생명력, 엔텔레키아(entéléchie) 등에 의해 일어난다고 설명된다. 콩트는 이 단계도 진정한 설명을 제공할 수 없으며 궁극적 실재, 제일원인, 절대적 출발점 등에 관한 물음에 대해 결코 대답할 수 없는 것으로 선언해버린다고 비판했다. 셋째, 과학적 단계 또는 '실증적' 단계는 실증적 사실만을 중요시한다(→ 과학철학). 과학과 지식의 과제는 자연과 사회의 사실·규칙 등을 연구하고 이 규칙을 기술적 법칙으로 정식화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자연현상은 일반법칙에 포섭됨으로써 설명된다. 콩트에 따르면 인류의 사유는 신학적 단계와 형이상학적 단계의 사이비과학적 설명을 포기하고 과학적 방법을 철저히 견지해야 완전히 성숙할 수 있다.

한편 콩트는 6개의 기초 순수과학을 피라미드 계층구조로 분류하여 뒷날 논리실증주의가 각 층의 과학을 그 아래층의 과학으로 '환원'할 길을 열었다. 콩트는 다른 어떤 과학도 전제하지 않는 수학을 가장 아래층에 놓고 그 위층들에는 각 층의 과학이 그 아래층의 과학에 의존·이용하도록 배치했다. 그리하여 이 계층구조 속에 수학·물리학·화학·생물학(생리학도 포함)·사회학 등을 차례로 놓았다.

이 과학체계에서는 심리학이 빠져 있는데, 콩트는 심리학이 한편으로는 생물학(특히 뇌신경생리학)의 한 분야,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학의 한 분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사회학의 '아버지'로서 사회과학도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관찰에서 시작해 일반법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콩트는 이와 같이 객관적 관찰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20세기 행동주의의 방법론에 매우 가까이 다가갔다. 19세기 영국의 철학자·논리학자·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은 콩트와 의견이 다소 다르지만 당대의 뛰어난 실증주의자였다. 〈논리학 체계 System of Logic〉(1843)에서 인식과 과학적 추론에 관해 철저한 경험론적 이론을 주장했으며, 수학과 논리학도 경험과학으로 보았다.

비판적 실증주의

흄과 콩트의 사상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독일 실증주의 학파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학파의 대표자로는 뉴턴 역학을 철학적으로 비판한 에른스트 마흐와 경험비판론이라는 철학을 창시한 리하르트 아베나리우스였다. 마흐는 〈감각분석론 Beiträge zur Analyse der Empfindungen〉(1886) 서론에서 흄의 반(反)형이상학적 관점을 되살려 모든 사실적 지식은 '요소', 즉 직접 경험자료를 개념적으로 조직하고 가다듬음으로써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콩트의 정신을 이어받아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 특히 '물자체'(物自體)에 관한 학설을 거부했다. 칸트는 물자체가 현상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 실체이며 우리의 지각의 부분적 원인이지만 우리는 물자체를 절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19세기 독일의 뛰어난 과학자·철학자인 헤르만 폰 헬름홀츠는 물리학의 이론적 실체(entity)가 곧 물자체라고 주장했다. 실증주의자들은 칸트와 헬름홀츠의 견해에 모두 반대하면서 이론과 이론적 개념은 예측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론은 변할 수 있지만 경험적 규칙은 과학적 추론을 시작하고 이 추론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해 되돌아가야 할 굳건한 토대이다. 그러므로 실증주의자들은 대부분 어떤 이론이 맞거나 틀리다고 말하기보다는 유용하거나 유용하지 않다고 말하기를 더 좋아한다.

마흐와 물리화학의 창시자 빌헬름 오스트발트는 물리학과 화학에서 원자론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원자론, 원자설). 실증주의자의 눈으로 보면 원자는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기껏해야 '편리한 허구'이거나 나쁘게는 부당한 아드 호크(ad hoc) 가설로 여길 수밖에 없다.

원자론에 대한 이러한 반대는 실증주의자들이 관찰불가능한 것을 얼마나 기피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물리학과 화학에서 미시이론들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실증주의 이데올로기는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루트비히 볼츠만, 막스 플랑크 등 뛰어난 과학자에게도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과학자는 실증주의의 기본 태도를 견지했으며 미국에서는 실증주의와 더불어 실용주의·도구주의가 등장했다.

아베나리우스의 실증주의는 생물학적 인식론을 주요내용으로 삼는다.

이 인식론에 따르면 생명체가 주위 환경의 긴급한 사태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미래의 조건을 예측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가 발달했다. 그러나 상식과 과학의 개념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재료는 '주어진 것', 즉 직접적인 감각경험의 자료이다(감각 여건). 그러므로 마흐와 아베나리우스는 보통 실제 세계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을 '감각복합'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했다.

예를 들어 돌은 딱딱함·색·질량 등 감각적 성질들의 집합일 뿐이다. 마흐와 아베나리우스는 이러한 속성을 가진 배후의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전통적 가정을 거부했다. 실증주의자에게 실체 개념은 거추장스럽고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마흐는 공간과 시간을 절대적 실재로 보는 뉴턴의 이론을 면밀히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뉴턴은 가속운동이나 곡선운동으로 발생하는 관성력과 원심력을 실제 공간에 있는 특별한 좌표계와 관련된 운동의 효과로 해석했다. 그러나 마흐는 어떻게 절대적 빈 공간이 그토록 강력한 효과를 낳는지 의아하게 여겼고, 특별한 좌표계는 지각할 수 없는 그물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은하와 항성을 포함한 우주의 총질량에 의해 생긴다고 추측했다. 마흐의 이런 생각은 뒷날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론과 중력론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초기 논리실증주의

개요

20세기 실증주의자의 첫 세대는 1907년경부터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대표적 인물은 물리학자 필리프 프랑크, 수학자 한스 한과 리하르트 폰 미제스,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 오토 노이라트 등이다.

이들은 1920년대 빈 논리실증주의 학파와 베를린 경험철학회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보통 빈 학파와 베를린 학파로 나뉜다. 1924~36년에 빈 학파의 지도자는 모리츠 슐리크였다. 1924년경 슐리크, 한, 노이라트, 빅토르 크라프트, 쿠르트 라이데마이스터, 펠릭스 카우프만 등은 빈에서 정기적인 저녁 토론회를 열었다.

초기의 주요활동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2)를 읽고 토론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베를린 학파도 생겼으며, 이 학파의 중심 인물은 한스 라이헨바흐, 미제스, 쿠르트 그렐링, 발터 두비슬라프 등이었다.

슐리크는 〈일반 인식론 Allgemeine Erkenntnislehre〉(1918)에서 이미 빈 학파의 기본적 인식론을 밝혔다.

그러나 이 학파의 철학 견해는 〈과학적 세계관 : 빈 학파 Wissenschaftliche Weltauffassung : Der Wiener Kreis〉(1929, 바이스만과 파이글의 도움으로 카르나프·한·노이라트가 지음)라는 팜플렛을 출판하면서 더욱 날카로워지고 깊어졌다.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제목은 전통 철학과의 단절을 선언한 것이며 저자들의 정신에 따르면 '모든 철학을 끝장내는 철학'을 의미했다.

언어와 의미 명료화

논리실증주의의 기본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철학의 진정한 과제는 특히 과학의 기본 개념과 주장의 의미를 명료하게 만드는 것이지 궁극적 실재나 절대자의 성격 등과 같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와 씨름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독일어권 나라에서는 헤겔류의 형이상학이 여전히 유행하고 있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형이상학을 무익한 것으로 경멸했고 형이상학 대신 논리학과 방법론을 추천했다. 논리실증주의의 한 가지 공헌은 언어의 기능과 의미의 다양한 유형을 잘 이해한 점이었다.

언어는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목적은 자연과 사회의 사실과 규칙을 표상하는 것, 감정을 전달하는 것, 행동을 불러일으키고 지도하고 수정하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단어와 문장 속에 있는 인식적·사실적 의미와 표현적·정서적 의미를 구분한다. 일상생활에서는 물론이고 과학의 서술 속에도 대체로 이 2가지 의미가 혼합되어 있다.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정서적 유형의 표현이나 호소가 인식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물론 도덕적 명령·권유·충고 등의 표현에는 여러 가지 행동의 결과와 관련된 사실적으로 의미있는 내용도 들어 있다. 그러나 '해야 한다', '옳다' 등의 말로 표현되는 규범적 요소는 그 자체만으로는 인식적 의미를 갖지 않으며 정서적·동기부여적 의미를 가질 뿐이다.

도덕적 가치판단에 관해 카르나프와 그보다 더욱 철저한 영국 실증주의자 A. J. 에어가 펼친 주장은 도덕규범을 일종의 취향으로 다루고 모든 도덕적·미학적·형이상학적 주장을 무의미한 것으로 경멸한다는 점에서 많은 철학자에게 충격을 주었다.

미국의 실증주의자 찰스 스티븐슨과 같이 좀더 온건하고 세련된 실증주의자들은 곧 이런 극단적 견해를 수정했다. 그들은 가치판단에도 인식적 의미를 어느 정도 부여함으로써 실증주의의 견해를 좀더 받아들이기 쉬운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모든 실증주의 견해에는 도덕적·미학적 규범은 비인식적이라는 주장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의미의 검증가능성 기준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하고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이른바 사실적 유의미성에 관한 검증가능성 기준이었다.

슐리크는 이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서술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을 검증하는 방법이다." 이 정식은 지지하거나 반박하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는 문장을 인식적으로 유의미한 문장의 영역에서 배제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실증주의자들이 의미기준을 정식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동기를 부여한 사건은 1905년 아인슈타인이 에테르(ether) 가설과 절대동시성 개념을 포기한 일이었다.

19세기 후반 물리학자들은 빛과 그밖의 전자기파의 전달매체로서 에테르가 우주 속에 존재한다는 가설을 널리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가설을 받아들일 경우 에테르가 가지고 있어야 할 속성들은 논리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고, 절대동시성 개념도 아드 호크 가설 없이는 주장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이 가설들을 과감히 버림으로써 특수 상대론에 도달했다.

1930~60년대에 검증가능성 기준은 증명가능성 또는 확증가능성 등 좀더 관대한 기준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모든 고양이는 발톱을 가지고 있다"라는 보편명제는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고양이를 검사할 수 없는 한 긍정적 사례들로는 부분적으로만 지지할 수 있고 완전히 검증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는 불완전하고 간접적인 검증, 즉 '증명'이나 '확증'을 바탕으로 한 법칙적 진술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카를 포퍼는 검증가능성 기준 대신 반증가능성 기준을 제시했다.

반증가능성 기준이란 경험적·과학적 진술과 초경험적·비과학적 진술을 구획하는 기준이며, 이 기준에 따르면 반박 증거를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진술(법칙·가설·이론)이 경험적·과학적 진술이다.

통일과학 테제

과학의 통일성 테제는 2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통일과학운동). 첫째, 카르나프·노이라트 등은 물리주의적 사물언어를 모든 인식의 출발점 및 검증증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언어에서 명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태 또는 사건을 기술한다. 그러므로 이런 물리주의자에게는 모든 과학의 관찰 기초가 통일적이라는 점이 과학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둘째, 모든 과학의 설명원리가 통일적이라는 점을 근거로 과학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환원주의자도 있다. 이런 환원주의자는 열역학을 열운동론(통계역학)으로, 광학을 전자기학으로 환원하고, 화학현상을 원자·분자 과정에 기초해서 설명하며, 특히 분자생물학에서 생물학적 현상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자극받아 모든 실재의 규칙성을 도출할 수 있는 일련의 물리학적 전제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환원주의 이데올로기가 부딪치는 가장 큰 난점은 생명마음의 문제이다. 환원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력한 대안은 창발적(創發的) 진화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생명과 마음은 매우 새로운 실재형식이며 이 형식은 보다 낮거나 보다 우위에 있는 실재에 관한 법칙이나 이론만으로는 도출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

논리경험주의의 후기 실증주의

개요

논리실증주의, 특히 빈 학파의 학설은 20세기 중반에 중요한 변화를 겪었고 따라서 새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다. '실증주의'라는 이름은 콩트와 마흐의 현상주의·도구주의의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전통은 긍정적 관찰 사실만을 강조하고 원자론과 이론적 실체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으므로 더이상 20세기 과학의 정신과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설과 이론을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 새 이름으로 '논리경험주의'가 자연스럽게 채택되었다. 찰스 모리스는 기호학의 3가지 차원을 통사론·의미론·어용론으로 구분했다.

통사론은 언어의 형성규칙과 변형규칙, 의미론은 지시와 진리의 규칙, 어용론은 언어와 그 사용자·사용조건 사이의 관계를 연구한다. 의미론에 관해서는 2가지의 서로 다른 관점이 생겨났다.

첫째, 이른바 '일상언어' 분석철학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을 연구했으며, 전통적인 철학 난제들이 언어를 비정상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이 철학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저작에서 비롯되어 길버트 라일, 존 랭쇼 오스틴, 존 위즈덤에 의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달했다. 둘째, 논리적 재구성주의라 불리는 카르나프의 이데올로기는 인공언어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논리적 재구성주의자들은 연구대상이 되는 언어인 대상언어와 이 언어를 분석하는 언어인 메타 언어를 구분했다.

메타 언어적 분석으로 가장 획기적 성공을 거둔 사람은 괴델인데, 그는 1931년 수학체계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 괴델의 불완전 정리).

비판과 논쟁

논리실증주의와 논리경험주의는 출발할 때부터 비판을 받았다. 가장 먼저 비판을 받은 것은 의미에 관한 검증가능성 기준이었다. 비판자들은 이 기준이 그 자체가 비추어 유의미한가를 따졌다. 카르나프는 이 기준 자체가 사실적 주장이 아니라 언어의 더 나은 사용을 위한 제안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논리경험주의자들은 의미기준이 자의적인 정식이라기보다는 상식과 특히 과학적 태도를 해명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의 또다른 비판은 과학적 설명의 성격에 관한 논리경험주의자의 견해를 겨냥한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과학에서 통계적 또는 확률적 설명의 역할은 갈수록 치밀한 분석대상이 되고 있다. 많은 과학철학자와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에르빈 슈뢰딩거 등 과학자 출신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관찰 자료에서 과학이론에 이르는 논리적 지름길은 없다는 데에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