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나프

카르나프

다른 표기 언어 Rudolf Carnap
요약 테이블
출생 1891. 5. 18, 독일 론스도르프
사망 1970. 9. 14,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모니카
국적 독일/미국

요약 독일 태생 미국의 논리실증주의 철학자.

목차

접기
  1. 개요
  2. 교육
  3. 빈과 프라하에서의 경력
  4. 미국에서의 경력

개요

논리학·언어분석·확률론·과학철학 등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교육

1910~14년 예나대학교와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수학·물리학·철학을 공부했다.

예나대학교 시절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로 널리 인정받는 고틀로프 프레게의 강의를 듣고 그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공간의 개념에 관한 논문으로 1921년 예나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당시 학자들이 주장한 다양한 공간이론이 서로 상충하는 까닭은 이 이론들이 실제로는 완전히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주제들을 각각 형식적 공간, 물리적 공간, 직관적 공간이라 부르고 그것들의 주요특성과 기본 차이점을 부각시켰다. 그후 수년 간 개인적으로 물리학 기초와 논리학을 연구하여 공간·시간, 인과관계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했으며, 기호 또는 수리논리학에 관한 교과서 〈논리학 개론 Abriss der Logistik〉(1929)을 썼다.

빈과 프라하에서의 경력

철학 문제를 정기적으로 토의하기 위한 철학자·수학자와 그밖의 학자들의 소규모 모임인 빈학파의 창시자 모리츠 슐리크가 1926년 카르나프를 빈대학의 교수로 초청했다.

카르나프는 곧 빈 학파의 유력한 성원이 되었다. 논리실증주의 또는 논리경험주의의 초기 사상은 바로 이 학파의 논의에서 나왔다. 빈 학파의 기본 사상은 경험주의로, 스코틀랜드의 경험론자 데이비드 흄과 오스트리아 물리학자·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의 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이 학파의 주요성원들은 현대 수학과 과학의 이론·방법에 자극을 받아 철학연구에 정밀과학의 엄밀함과 정확성을 도입함으로써 '과학적인 세계관'을 발전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카르나프는 부적절한 전통논리학의 분석장치보다는 기호논리학의 개념과 기법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카르나프와 동료들은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나라의 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중에는 저명한 과학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흐가 이끈 베를린의 경험주의자 집단도 있었다. 카르나프는 라이헨바흐와 함께 새로운 '과학철학'을 위한 토론지로서 〈인식 Erkenntnis〉(1930~40)이라는 정기간행물을 만들었다.

경험주의의 기본 테제는 세계에 관한 인간의 모든 개념과 믿음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술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다소 모호한 것이기도 하다. 카르나프는 자신의 몇몇 대표 저술에서 사실상 경험주의의 이러한 생각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해명하려 했다. '어떻게 인간이 세계에 대한 관념을 획득하는가'는 철학보다는 심리학의 문제인데, 그는 일단 이 문제를 제쳐두고 경험주의를 경험적 지식의 증거적 기초에 관한 체계적·논리적 테제로 해석해나갔다.

이를 위해 과학언어든 일상언어든 세계에 대한 주장을 표현하는 용어와 문장이 어떻게 직접적 경험자료를 기술하는 용어와 문장과 관련을 맺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경험주의의 쟁점을 언어적으로 뚜렷하게 전환했다. 따라서 카르나프가 해석하고 옹호한 경험주의의 테제는 첫번째 종류의 용어와 문장이 분명하고 확정적인 의미를 갖는 2번째 종류의 용어와 문장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카르나프는 환원가능성을 늘 정확한 논리학 용어로 진술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염두에 둔 환원가능성의 의미는 처음에는 다소 좁게 쓰였으나 점점 더 자유롭게 사용되었다(인식론).

첫번째 대작 〈세계의 논리적 구조 Der logische Aufbau der Welt〉(1928)에서 카르나프는 경험주의적 환원가능성이라는 테제를 전례없이 엄밀하게 해석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실제적이거나 가능한 경험사실을 기술하는 데 적합한 모든 용어는 오로지 직접경험의 측면만을 지시하는 용어에 의해서 완전히 정의될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경험적 진술은 직접경험에 관한 진술로 완전히 번역될 수 있다.

빈에서 동료들과 벌인 토론에 힘입어 카르나프는 경험주의를 더욱 자유롭게 해석하기 시작했으며, 프라하의 게르만대학교에서 자연철학교수로 재직하는 동안(1931~35) 이러한 해석을 더욱 발전시켰다. 마침내 이 해석은 그의 논문 〈검사가능성과 의미 Testability and Meaning〉(〈과학철학 Philosophy of Science〉 3권[1936], 4권[1937])에 자세히 제시되었다.

카르나프는 경험과학의 용어가 순수 경험적인 용어로 완전히 정의될 수 없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환원문장'과 '관찰문장'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환원문장은 논리적으로 매우 세련된 형태의 조작적 정의이며, 관찰문장은 직접 관찰을 통해 참·거짓을 검사할 수 있는 문장이다. 카르나프는 이러한 검사가 일반적으로 경험적 진술을 엄밀하게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는 없고 다만 어느 정도 강하게 '확증'할 수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관찰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아 관찰을 통해 검사하거나 확증할 수 없는 문장은 경험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경험적 의미의 유무를 가리는 검사가능성이라는 기준에 의거하여 카르나프와 논리경험주의자들은 사변적 형이상학과 신학의 다양한 이론을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 의미 있는 주장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검증가능성원리).

카르나프는 경험적 진술을 검사할 수 있는 준거인 관찰진술은 마치 맥박수의 변동을 보여주는 심리검사에서 측정기구의 바늘이 특정 눈금을 가리키는 것처럼 물리적 대상의 직접적·공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측면을 기술하는 문장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이런 문장은 모두 물리학의 어휘에 속하는 용어들로 정식화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물리학주의'의 기본 이념이다. 이 이념에 따르면 물리학에서 사회학·역사학에 이르는 경험과학의 모든 용어와 문장은 물리학의 언어에 속하는 용어와 문장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후의 저술에서 카르나프는 환원가능성과 경험적 의미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더욱 자유롭게 펼쳐 과학 이론과 과학적 증거 사이의 관계를 더욱 적절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미국에서의 경력

〈검사가능성과 의미〉가 출판될 무렵 카르나프는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주된 이유는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위협이 점차 커졌기 때문이다.

1936~52년 시카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1940~41년에는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로도 있었으며 버트런드 러셀, 알프레드 타르스키, W.V.O. 콰인 등이 속한 토론모임에 활발히 참여했다. 시카고에 도착한 직후 카르나프는 빈 학파의 옛 동료인 사회학자 오토 노이라트, 학문의 동료이자 실용주의 철학자 W. 모리스 등과 함께 〈통일과학의 국제백과전서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Unified Science〉 발간에 착수했다.

1938년부터 출간된 이 책은 과학철학의 일반 문제와 수학이나 개별 경험과학과 관련한 철학 문제를 다룬 일련의 논문집이었다. 빈 시절부터 카르나프는 언어철학과 논리학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철학적 혼란은 종종 언어를 잘못 사용하거나 오해하는 데서 비롯하며, '언어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통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 그는 영국에서 시작된 분석철학의 '일상언어학파'와 의견이 같았다.

그러나 일상언어학파와는 달리 더욱 전문적인 문제, 즉 과학철학이나 수학의 문제는 일상언어의 용법만으로는 적절하게 취급할 수 없고, 논리적 기호로 정식화되고 이른바 구문론과 의미론의 규칙에 따라 엄격하게 규정된 구조와 의미를 갖는 인공언어를 바탕으로 명료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카르나프는 이 생각을 발달시켰고 이를 이행하기 위한 이론적 장치를 〈언어의 논리적 구문론 Logische Syntax der Sprache〉(1934)·〈의미와 필연 Meaning and Necessity〉(1947, 증보판 1956) 등 일련의 저술 속에서 설명했다.

카르나프는 인공언어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학술 교류와 국제적 이해를 손쉽게 하기 위해 에스페란토와 인터링구아 등 국제적 보조언어를 사용하자고 주창했다(국제언어). 논리학과 지식이론에서 카르나프가 많은 관심을 쏟은 관념은 '분석성'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의 19세기 극단적 경험론과는 대조적으로 카르나프와 그밖의 논리 경험주의자들은, 논리학과 수학의 진술은 경험과학의 진술과 달리 오로지 그 진술을 구성하고 있는 용어들의 의미만으로 참된 진술이 된다는 점에서 분석적이며, 따라서 어떤 경험적 검증 없이도 선험적으로 확립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분석명제 , 선험적 지식). 카르나프는 '분석성'의 성격을 정확히 규정하고 그 이론을 정식화하는 작업을 계속 되풀이했다.

몇몇 사람은 그의 생각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며, 특히 콰인은 분석적 진리개념이 본질적으로 모호하므로 선험적으로 참인 진술의 집합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잘못이며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945년 무렵부터 카르나프는 귀납추리와 합리적 믿음, 결정의 문제를 연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주된 목적은 귀납논리의 형식체계를 세우는 것이었다. 카르나프의 귀납논리의 기초를 이루는 중심 개념은 연역추리의 함언(含言) 개념에 대응하는 확률적 함언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엄격하게 말하면 합리적 신뢰의 정도 또는 어떤 증거들이 제안된 가설을 지지하는 확률의 정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카르나프는 이런 종류의 엄밀한 이론을 〈확률의 논리적 기초 Logical Foundations of Probability〉(1950)에서 제시했다. 카르나프는 1952~54년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에서 확률론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다가 곧이어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의 교수직을 맡았다.

이 기간부터 죽을 때까지 주로 자신의 귀납논리를 수정하고 폭넓게 확장하는 일에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