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론

경험론

다른 표기 언어 Empiricism , 經驗論

요약 낱말이나 개념이 온전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경험 가능한 사물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론의 한 갈래와,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는 인식론의 한 갈래를 가리킨다.

목차

접기
  1. 개요
  2. 경험론의 여러 가지 의미
  3. 넓은 의미
  4. 좁은 의미
  5. 역사
    1. 고대철학
    2. 중세철학
    3. 근세철학
    4. 현대철학
  6. 경험론에 대한 비판과 평가

개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분명히 구분되는 한 쌍의 철학이론인 의미론적 경험론과 인식론적 경험론으로 이루어진다.

즉 낱말이나 개념이 온전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경험가능한 사물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론의 한 갈래와,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는 인식론의 한 갈래를 가리킨다.

경험론의 여러 가지 의미

넓은 의미

일상태도를 묘사할 경우 경험론은 종종 이론에 대한 무시나 무관심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의사를 경험주의자라고 부를 경우 그것은 대개 돌팔이 의사를 뜻한다. 반면 확증된 사실 외에 관습적 견해나 불확실한 추상적 이론을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를 가리켜 좋은 의미로 경험론자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좁은 의미

기본적으로 구분해야 할 사항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앞서 말한 의미론적 경험론과 인식론적 경험론이 동일한 것인가가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험론자는 선천적(a priori) 개념을 부정하지만 그렇다고 선천적 명제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험적 지식). 뿐만 아니라 전통 용어법에서 '경험적인 것'의 반대말을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본유적인 것'(the innate)이라고 보는 점도 경험론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한 요소이다(→ 본유관념). 개념, 지식의 의미·정당화 문제와 인과적 발생의 문제는 구분해야 한다.

본유적이라는 말은 인과적으로 경험과 무관하게 생겨난 것을 뜻하는 반면, 선천적이라는 말은 지식을 정당화하는 일이 경험과 논리적으로 무관함을 뜻한다.

선천적인, 따라서 비경험적인 개념은 대체로 2종류가 있다. 하나는 '아니다', '그리고', '모든' 등과 같은 논리학·수학의 형식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실체', '원인' 등과 같은 범주개념이다. 선천적 명제는 이보다 종류가 많아서 말뜻을 정의하는 명제, 동어반복적 명제, 논리학·수학·형이상학의 여러 공리(公理)·원리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경험론자는 이 가운데 오직 일부만 선천적이라고 주장한다. 철학적 경험론은 경험을 강조하는 정도에 따라서 절대적·실질적·부분적 경험론으로 나눌 수 있다. 절대적 경험론은 어떤 선천적 개념과 명제도 부정한다. 그러나 대다수 철학자가 선천적 명제를 인정하고 있는 이상 지식에 대한 절대적 경험론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좀더 온건한 형태인 실질적 경험론은 모든 개념이 경험적이지만 형식개념만큼은 선천적이라고 본다.

이 관점에 따르면 형식개념은 말과 말의 관계에 속하는 순수 구문론적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논리학·수학 명제도 정의명제(定義命題)처럼 의미들 간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현대 분석철학이 기본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이 실질적 경험론은 모든 선천적 명제를 은폐된 형태의 동어반복 내지 분석명제로 본다. 논리학·수학이 선천적 성격을 띠는 반면 과학은 철저하게 경험적이며, 이밖에 신학·윤리학·형이상학의 명제가 있지만 이는 위장된 동어반복 내지 경험명제이거나 참·거짓을 가릴 수 없는 사이비명제에 불과하다.

끝으로, 부분적 경험론은 선천적이면서도 사실적 성격을 띤 지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칸트의 선험형이상학의 명제, 신학의 명제, 도덕의 근본원리, 자연의 인과법칙 등은 모두 종합적이면서 선천적이다.

역사

고대철학

서양철학에서 최초의 경험론자는 소피스트들이다(→ 그리스 철학). 그들은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합리론적 사변에 반대하여 인간과 사회를 철학의 중심과제로 삼자고 주장했다.

순수이성에 대한 이들의 회의론적 주장은 곧 반발을 불러일으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론 철학을 낳았다(→ 회의주의).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계승자 가운데 스토아 학파에피쿠로스 학파는 인간의 개념형성 과정을 경험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스토아 학파는 정신이 감각을 통해 물질세계와 접촉함으로써 관념이 생겨난다고 보았고, 경험론의 색채가 더욱 강한 에피쿠로스 학파는 모든 개념이 감각경험의 잔상(殘像)이며 이 개념으로 이루어진 지식도 모두 경험적이라고 보았다.

중세철학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대부분의 중세 철학자는 개념형성에 관한 한 경험론의 관점을 취했다.

이는 '먼저 감각에 있지 않은 것은 지성에도 없다'라는 당시의 일반적 공식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74)는 모든 본유관념을 부정하고 감각에 주어진 것을 지성이 추상화함으로써 관념이 형성된다고 보았으며, 13세기 과학자 로저 베이컨은 연역추리보다 관찰을 더 중시했다.

중세의 가장 체계적 경험론자이자 유명론자(唯名論者)인 오컴(William of Ockham)은 모든 지식이 감각에서 기원한다고 보고 '추상적 지식'은 가설적 성격을 띨 뿐 어떤 존재와도 관계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근세철학

근세 경험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귀납의 원리를 체계화한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다.

그는 경험에 앞선 지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진정한 지식은 자연세계에 대한 경험에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물론자이자 유명론자인 토머스 홉스(1588~1679)는 개념에 관한 경험론과 지식에 관한 합리론을 결합하여 모든 관념은 물질이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생겨나지만 지식은 그 관념들에 대한 연역적 계산에서 생겨난다고 보았다.

가장 정교하면서도 영향력이 컸던 것은 〈인간오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90)을 쓴 존 로크(1632~1704)의 경험론이었다.

그는 모든 지식이 감각작용 혹은 반성작용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함으로써 본유관념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로크는 개념의 본성 문제와 지식의 정당화 문제를 혼동하기는 했지만 개념의 경험적 성격을 철저하게 고수함으로써 어떻게 단순관념에서 복합관념이 생겨나는가를 자세히 설명했다.

유신론적 관념론자 조지 버클리(1685~1753)는 정신 외부의 물질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물체를 지각된 관념의 복합체로 보는 현상론을 내놓았다.

스코틀랜드의 회의론자 데이비드 (1711~76)은 로크 경험론의 원칙을 더욱 철저하게 고수함으로써 물체·정신·인과관계 등의 개념 속에는 경험으로 확인되는 내용 이외의 것이 들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비판철학은 경험론과 합리론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는 모든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하지만 경험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본유적인 것과 선천적인 것을 명확히 구별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정신은 여러 선천적 개념과 선천적 종합판단을 갖고 있지만 그것들은 경험을 초월해 있는 실재와는 관계하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19세기말까지 로크 경험론이 성행했다. 특히 존 스튜어트 (1806~73)은 가장 철저한 경험론자였다. 그는 수학지식도 다른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경험적·귀납적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철학

20세기 들어 가장 영향력있는 경험론자는 영국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선천적 종합지식을 인정했지만 언어분석학파의 창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영향을 받고 나서는 논리학·수학의 명제를 분석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흄을 계승하여 철학의 과제는 개념을 감각에 직접 주어지는 요소로 분석해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협력을 통해 발전한 이론의 영향으로 빈 학파의 논리실증주의가 생겨났는데, 이 학파의 이른바 '검증원리'는 흄의 경험론의 연장선 위에 있다.

경험론에 대한 비판과 평가

소피스트의 경험론을 논박하기 위해 플라톤은 변화하는 감각세계는 오직 '억견'(臆見)의 대상일 뿐이고 참된 '지식'은 영원하고 필연적인 진리를 대상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참으로 실재하는 것은 불변적이고 지각불가능한 형상 또는 보편자의 세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생각을 따랐지만 보편적 형상이 질료와 분리될 수 없다고 본 점에서는 의견이 달랐다.

그러나 그도 감각이 인식의 재료를 제공하되 참된 지식은 오로지 이성에 의해 자명한 원리에서 연역된다고 본 점에서는 분명히 합리론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연역논리에 대항하여 생겨난 베이컨의 근대 경험론은 과학의 시대를 맞아 진가를 발휘했지만, 갈릴레오 역학에 내포되어 있는 수학의 혁명적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결함이 있다. 이를 강력히 비판한 사람이 합리론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였다. 그에 따르면 명석판명한 관념은 본유적이며, 비록 인간지성의 한계 때문에 경험에 의존하는 일이 불가피하더라도 원칙적으로 모든 지식은 선천적이다.

17세기 후반 G.W. 라이프니츠는 〈신(新)인간오성론 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1704)을 써서 로크를 비판하고 관념의 본유적 성격을 다시 강조하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 경험론을 비판한 사상가로는 경험에 의한 반증가능성을 내세워 귀납주의를 비판한 과학철학자 카를 포퍼가 있다. 또 미국의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W.V. 콰인은 대부분의 현대경험론자가 전제하고 있는 분석적 진리와 사실적 진리의 구분이 아무 근거도 없는 것임을 논증했다.

17세기 이후 철학의 주요한 영역으로 자리잡은 인식론의 주요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경험론과 합리론 사이의 문제이다.

과학이 실질적이면서도 비경험적인 전제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은 현대과학의 여러 새로운 양상 때문에 의문시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암 촘스키 같은 언어학자가 인간정신의 본유능력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경험론의 강점은 인간의 개념과 지식이 외부세계에 적용되고, 세계는 감각을 통해 인간에게 작용한다는 점을 인정한 데 있다. 그러나 감각자료를 처리하는 과정에 정신이 어느 정도 개입하는지는 그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