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베이컨

프랜시스 베이컨

다른 표기 언어 Francis Ba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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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61. 1. 22, 잉글랜드 런던 요크하우스
사망 1626. 4. 9, 잉글랜드 런던
국적 영국

요약 16~17세기 영국의 정치인. 연설가이자 제임스 1세의 대법관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사상에 기초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연을 정당하게 지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저서인 <신 오르가논>에서 인간이 지식을 추구할 때 범할 수 있는 오류에 관한 심리적 요인으로 우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것을 네 종류로 나누어 설명했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추론이 아닌 실질적인 관찰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학문을 분류하고 지식을 체계화하고자 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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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제임스 1세 치하의 활동
  4. 권력의 몰락
  5. 사상적 배경
  6. 베이컨의 계획
  7. 정신의 우상
  8. 학문의 분류
  9. 새로운 방법
  10. 인간 철학
  11. 평가와 영향
베이컨(Francis Bacon)
베이컨(Francis Bacon)

개요

16~17세기 영국에서 활동했던 정치인이자 철학자. 헌법사 연구가에게 프랜시스 베이컨은 하원과 몇몇 유명한 재판의 연설가이자 제임스 1세의 대법관(1618~21)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상사적으로 모든 지식을 두루 통달하여 자연을 정당하게 지배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내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초기생애

국새상서(國璽尙書) 니콜라스 베이컨 경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73~75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나 허약한 체질 때문에 적잖이 고생했다. 이때부터 '비생산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1576~79년 영국 대사 수행원으로 프랑스에 있다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귀국했지만 아버지가 그에게 유산을 별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평생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1576년 런던에 있는 4개의 법학원 중 하나인 그레이스 인에 들어갔다.

1582년 법정 변호사 자격을 얻은 뒤 법학원 강사, 평의원, 칙선변호사(국왕의 법률고문)가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성공적인 경력에도 불구하고 프랜시스 베이컨의 정치적·철학적 야심은 멈추지 않았다. 1584년 의회에 진출했다. 1589년 여왕에게 바치는 〈충언의 편지 Letter of Advice〉, 〈영국 교회 논쟁에 관한 공고 An Advertisement Touching the Controversies of the Church of England〉는 베이컨의 정치적 관심과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593년 스페인과의 전쟁비용으로 특별 보조금을 요구하는 정부에 반대한 결과 베이컨의 정치적 기대는 일시적이지만 꺾이고 말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페인을 공격했고 프랜시스 베이컨은 몇 해 동안 여왕의 눈 밖에 나 있었다.

1591년경 여왕의 총애를 받던 젊은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와 친교를 맺었다. 이 백작을 "정부에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도구"로 보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에식스는 여왕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프랜시스 베이컨을 등용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598년 에식스는 스페인 보물선을 토벌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권력을 잃었다. 1600년 6월 프랜시스 베이컨은 칙선변호사로서 자기 후견인인 에식스에 대한 비공식 재판에 참여했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친분을 유지했으나, 에식스가 1601년 여왕을 납치하여 정적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자 그를 반역자로 여기고 그 사건에 관한 공식 보고서를 작성했다.

제임스 1세 치하의 활동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제임스 1세를 위해 자기 재능을 쓸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같은 해 사촌 로버트 세실 경의 영향력으로 기사작위를 받았다. 이듬해 칙선변호사로 선임되었고 새 왕조의 제1대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스코틀랜드와의 통일문제를 전담한 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1605년에 왕에게 바치는 〈학문의 진보 Advancement of Learning〉를 출판했으며 이듬해 런던 총독의 딸 앨리스 바넘과 결혼했다. 한동안 승진하지 못하다가 1607년 6월 법무차관이 되었으나 당시에도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나중에 그 이유를 당시 솔즈베리 백작이며 왕의 최고 각료였던 권력자 세실의 시기와 견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612년 솔즈베리 백작이 죽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왕의 신임을 얻으려고 다시 노력했고 정부의 문제, 특히 왕권과 하원의 관계에 대해 조언하는 주목할 만한 글을 많이 썼다. 왕은 베이컨의 제안을 받아들여 을 민소(民訴)법원 수석재판관에서 왕좌(王座)법원으로 옮기는 한편 1613년 베이컨을 법무장관에 임명했다.

그뒤 몇 해 동안 왕의 특권을 옹호하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견해는 코먼 로(common law)와 법관의 독립을 내세우는 쿡의 견해와 자주 충돌했다. 결국 왕의 허락 없이는 일시적인 성직을 갖지 말라는 법령에 저항한 죄로 쿡이 해임되자 베이컨은 1617년 국새상서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대법관이 되었고 베룰럼 남작작위를 받았으며 1620~21년에는 세인트올번스 자작이 되었다. 이러한 승진의 주요발판은 의회와 법원에 대한 아낌없는 봉사와 자기자신을 추천하는 편지들이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중에 버킹엄 공작이 되고 왕의 총애를 받은 조지 빌리어스와 맺은 교분도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문서 가운데는 〈비망록 Commentarius Solutus〉이 남아 있다. 이 문서는 '상인의 부기장'과 같은 일종의 메모철인데, 이 글을 읽어보면 베이컨이 자기를 후견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한편 경쟁자의 약점을 연구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밖에도 그의 다양한 관심, 수입과 빚, 왕의 사업, 자신의 정원과 건축 계획, 철학적 사색, 건강상태 등도 알 수 있다.

이 시절 가장 중요한 일은 왕실 재정과 관련하여 제임스 1세를 보좌하는 일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안목이 넓었으며 장차 청교도혁명에서 절정에 이르는 헌법의 문제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베이컨은 개혁을 두려워했고 왕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베이컨의 정책이 건전했든 그렇지 않았든지 간에 그는 자기 주장처럼 '왕에게 빌붙는 협잡군'은 결코 아니었다.

권력의 몰락

1621년 프랜시스 베이컨의 권력은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였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군주에게 충성했고 총애를 받았으며 풍요로운 생활로 위엄을 갖추었다. 1620년에 나온 저서 〈신 오르가논 Novum Organum〉, 과학을 재조직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거대한 계획 〈대혁신 Instauratio Magna〉의 저자·입안자로서 외국 학자의 관심도 끌었다. 그러나 베이컨에게는 적이 있었다. 1621년 베이컨이 뇌물을 수수했다는 고발 사건이 접수되었는데, 이 사건은 베이컨을 매수하려고 선물을 했는데도 매수자에게 불리한 판결이 난 경우였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선물을 받았다고 인정했지만 판결은 공정했다고 주장하며 왕을 알현하려고 노력했으나 거부당했다. 베이컨은 공직을 사임함으로써 사건이 마무리되기를 바랐으나, 4만 파운드의 벌금, 왕이 만족할 때까지 런던 탑 감금, 공직 보유 금지, 하원과 법원 관할지역에서의 추방 등 가혹한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랜시스 베이컨의 용기는 꺾이지 않았으며 인류를 위해 더욱 중요한 일을 하는 데 남은 삶을 바쳤다. 베이컨은 다른 길이 막히자 법률 요람, 영국 역사, 튜더 군주들의 전기 등을 집필하여 왕에게 바쳤고 교육개혁에 대한 견해도 밝혔다. 이 시기에 6권의 자연사를 쓰려는 계획 중 2권이 완성되어 〈바람의 자연사 Historia Ventorum〉(1622)·〈삶과 죽음의 자연사 Historia Vitae et Mortis〉(1623)가 나왔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불우한 처지에서도 지치지 않는 지적 정력과 불굴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1622(또는 1623)년 1월 20일에 가서야 왕의 손에 입맞추도록 허락받았지만 완전한 사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626년 3월 어느날 런던 북쪽 하이게이트 근처에 마차를 타고 나갔다가 문득 눈이 부패과정을 지연시키는지 알고 싶은 생각이 들어 닭을 1마리 사서 박제로 만든 뒤 그 속을 눈으로 채우는 실험을 했다. 그 일로 기관지염에 걸려 4월 9일 애런들 백작 저택 근처에서 죽었다.

사상적 배경

17세기초 프랜시스 베이컨이 활동을 시작할 무렵 영국은 철학의 진공상태에 놓여 있었다.

15세기는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인문주의가 약간 활기를 띠었을 뿐 지적으로 거의 마비되어 있었으며, 16세기초 존 콜릿, 윌리엄 그로신, 토머스 모어 등이 르네상스의 그리스도교 합리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이 진취적 움직임도 당시 교회의 광적인 위세에 꺾이고 말았다. 리처드 후커가 토마스주의적 합리주의를 영국식으로 온건하게 해석한 1590년대에 이르러서야 철학은 되살아났다. 이때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저술활동을 시작하기 불과 몇 해 전이었다.

16세기 후반 영국에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스콜라 철학, 학문적·미학적 인문주의, 신비주의 등 3가지 사상체계가 퍼져 있었다.

학교 교육의 주된 내용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대한 몇 가지 비판이 프랜시스 베이컨이 공부하던 케임브리지에 전해졌으나 이 비판은 다만 수사학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었다. 페트라르카, 로렌초 발라, 에라스무스로 이어진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전통은 정통 금욕주의와 반대로 현세의 즐거움을 찬양하고 예술·언어·자연의 아름다움을 선호한 반면 종교적 사변에는 비교적 무관심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연에 관한 지식은 무시하고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비주의 또는 비교주의(秘敎主義)는 인간과 우주 사이의 유비(類比)를 주장하거나 연금술처럼 자연과정 배후의 마술적 힘에 관심을 가졌다. 그 대표자는 독일인 파라켈수스이지만 영국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일종의 신비주의자였고 더욱이 장미십자회원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 그가 믿고 퍼뜨린 '자연 마술'은 비교주의 철학자들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사상과 가까운 4번째 르네상스 사유양식은 쿠자의 니콜라우스와 이탈리아의 베르나르디노 텔레시오, 프란체스코 파트리치, 톰마소 캄파넬라, 조르다노 브루노 등의 대담한 자연철학이었다.

그들은 감각적 발견을 일반화하여 자연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글 속에 이 사상가들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도 인간의 정신이 자연에 관한 지식을 얻는 데 적합하며 이 지식을 추상적 추론이 아니라 관찰에서 이끌어내야 한다고 믿었다.

베이컨의 계획

비록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프랜시스 베이컨은 〈대혁신〉이라는 제목으로 큰 작품을 쓸 야심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의 첫째 부분인 〈학문의 존엄에 관하여 De Augmentis Scientiarum〉는 〈학문의 진보〉의 라틴어 확대 번역판으로 1623년에 나왔으며 학문 분류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둘째 부분인 〈신 오르가논〉은 이미 1620년에 나왔으며 자연에 관한 지식을 얻는 정확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셋째 부분은 자연 사실을 관찰·기록하는 자연사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바람·삶·죽음·밀도 등의 자연사를 썼으며 죽기 직전에도 〈숲들의 숲 Sylva Sylvarum:Or A Natural Historie〉을 쓰고 있었다. 넷째 부분은 자신의 방법을 적용한 사례들로 구성된 '지식의 사다리'이다.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신 오르가논〉에서 열이 입자의 운동임을 보여준 귀납 '표'이다. 이밖에 자신의 '선구자'에 관한 서술, 새로운 철학 등이 이 계획의 일부였다.

정신의 우상

〈신 오르가논〉 1권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이 지식을 추구할 때 범하는 오류의 심리적 원인을 논의하면서 그 비유로 '우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4가지 우상을 구별했다.

첫째, 종족의 우상은 인류에게 공통적인 지적 결함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어떤 탐구 영역에는 실제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질서가 있다고 가정하는 지나친 단순화 경향이 있다. 둘째, 동굴의 우상은 개인의 지적 특성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사물들 사이의 유사점에 더 주목하고 또다른 사람은 차이점에 더 주목한다. 셋째, 시장의 우상은 언어와 관련된 오류이다. 예컨대 일상 언어에서 고래와 물고기처럼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 비슷한 것으로 분류되는가 하면, 얼음·물·수증기같이 기본적으로 비슷한 것이 다른 것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한편 프랜시스 베이컨은 예를 들어 '숙명'과 같은 무의미한 주제로 논쟁을 벌이게 만드는 언어 능력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 측면은 계몽주의, 19세기 콩트의 실증주의, 20세기 논리실증주의로 이어지는 회의적 합리주의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넷째, 극장의 우상이란 잘못된 철학체계를 가리킨다. 베이컨은 감각의 역할을 무시한다고 본 인문주의자들의 철학체계를 그 예로 들었다. 정통 스콜라 철학에 대한 베이컨의 공격은 매우 원색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과학은 직관적으로 자명한 전제에서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 전제들이 자명하지도 않고 반박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학문의 분류

〈학문의 진보〉 2권과 〈학문의 존엄에 관하여〉 1~9권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 지식의 전영역을 철저하고 상세하게 체계화한다(인식론). 베이컨은 기억·상상·이성에 대응하여 역사·시가(詩歌)·철학을 구분한다. '시가'는 '가공의 역사'이며, 그 형식이 이야기·심리묘사(또는 드라마)·암시(또는 비유) 등으로 세분되어 있을 뿐 더이상 설명이 없다.

역사는 자연사와 시민사로 구분되며 철학에 원료를 제공한다. 한편 신적 지식과 세속적 지식의 구분, 학문 일반을 의미하는 이론분야와 기술 또는 '기예'를 의미하는 실천분야의 구분도 일반적 분류에 속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모든 과학에 공통된 원리를 다루는 제일철학을 인정한다(과학철학). 자연철학은 '원인을 탐구하는' 자연학과 그 발견을 '인간의 지위를 위해' 응용하는 자연마술로 나누어진다. 베이컨은 수학을 자연학의 보조분야로 보았을 뿐 정밀한 측량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수학철학). '인간철학'에 관한 분류는 매우 엉성했다.

신체과학은 의술·성형술·체육·관능술로 재미있게 분류되어 있고, 논리학·윤리학 등 정신과학은 정확하게 추론하고 행동하는 규칙을 다루는 실용적인 분야이다. 한편 시민철학도 실용적인 분야로서 통치기술·설득기술·격언 등을 포함한다. 원칙적으로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과 사회를 귀납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 분야의 지식을 상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결과 이 분야는 종교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과학성을 갖추지 못한 실용적 기술에 머물렀다.

새로운 방법

프랜시스 베이컨 과학철학의 핵심은 〈신 오르가논〉 2권에서 설명한 귀납적 추론이다.

이전 사상의 결점은 일반명제를 성급하게 도출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자명하게 가정한 데 있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점진적 상승' 기법을 주장했다. 이 기법은 점차 일반성의 정도를 높여가면서 충분한 근거를 가진 명제들을 참을성있게 모으는 방법이다.

귀납은 단순한 열거가 아니라 제거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정적 예의 강력한 힘'을 강조했다. 즉 "모든 A는 B이다"는 "이 A는 B이다"에 의해서 약하게 확증될 뿐이지만 "이 A는 B가 아니다"에 의해서는 거짓임이 증명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 제거 심사에서 통과한 것을 진리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귀납의 수단으로 존재표·부재표·정도표를 제시했다. 존재표는 특정 속성이 나타난 경우들의 집합이고, 부재표는 그 속성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들의 집합이며, 정도표는 두 속성의 정도를 비교한 표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방법에는 몇 가지 결점이 있다.

우선 이 표들을 단 하나의 증거에 적용하는 것으로는 진리에 잠정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 또 관찰사실을 설명해주는 숨은 '형식'을 발견하는 것이 형이상학의 과제라고 했지만, 이 표는 지각가능한 속성에 제한되어 있으므로 그 과제를 수행하는 데 부적합하다. 이때문에 흔히 프랜시스 베이컨은 과학에서 가설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비판받는다. 지금까지 별로 주목되지 않은 베이컨의 또다른 약점은 정적인 것에만 몰두하고 자연과학에서 각광을 받은 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노바 아틀란티스 Nova Atlantis〉에서 설명한 과학연구제도에 대한 견해는 귀납이론보다 더 중요한 공헌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 철학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시민 철학을 실천적 기예 또는 기술의 문제로 다루었지만 그의 역사학과 법률학은 강한 이론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헨리 7세의 통치사 Historie of the Raigne of King Henry the Seventh〉는 왕의 정책을 깊이 파헤친 해석사이다. 정치학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정치와 종교를 조심스럽게 분리했다. 교육에 대한 글은 별로 남기지 않았지만 말에 대한 스콜라주의의 망상을 날카롭게 공격했으며, 이 비판은 코메니우스의 교육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평가와 영향

프랜시스 베이컨은 보통 힘있는 사람에게 굽신거리고 인정이 없으며 뻔뻔스러운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기본적으로 이 평가를 의심할 만한 근거는 없지만 당시는 누구든 선량한 인물로 평가받기 어려운 시대였다. 한편 프랜시스 베이컨처럼 글을 잘 쓴 인물치고 예술에 그토록 둔감했던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베이컨은 로버트 후크, 로버트 보일 등 영국 왕립학회 창시자들의 영웅이었고, 장 달랑베르는 〈백과전서 Encyclopédie〉에서 학문을 분류하면서 그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칸트도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을 그에게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