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표기 언어 Sir Edward Co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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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52. 2. 1, 잉글랜드 노퍽 마일럼
사망 1634. 9. 3, 버킹엄셔 스토크포지스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법률가·정치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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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공직생활
  3. 수석재판관 시절
  4. 공직 해임
  5. 쿡에 대한 평가

개요

스튜어트 왕조의 왕권신수설에 맞서 코먼 로(common law:보통법)의 우위를 주장함으로써 영국의 헌정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법).

초기생애와 공직생활

쿡은 노리치 그래머 스쿨과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은 뒤, 1572년 4대 법학원 가운데 하나인 이너 템플에 들어갔다.

1578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그는 곧 명성을 얻게 되었다. 초기에 맡은 사건 중에는 노퍽 교구 신부인 에드워드 데니가 크롬웰 경 헨리에게 반란 선동죄를 뒤집어씌웠다는 이유로 크롬웰이 데니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한 사건과, 영국 토지법사상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 셸리 사건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쿡은 엘리자베스 1세 때의 총리인 벌리 경 윌리엄 세실의 후원으로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뒤, 빠른 속도로 출세해 1589년에 올더버러 출신 하원의원이 되었고, 1592년에는 법무차관 겸 런던 시재판관(市裁判官)이 되었다.

1년 뒤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어, 하원이 교회문제에 관한 토론에 열중하는 것을 억제하려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정책을 수행하는 데 상당한 수완을 보였다. 1593년에 처음으로 프랜시스 베이컨과 대립했다. 법무장관 자리가 비었을 때, 에식스 백작의 지지를 받는 베이컨이 그 자리를 놓고 쿡과 경쟁한 것이다.

쿡은 1594년 법무장관에 임명된 뒤, 베이컨이 법무차관이 되는 것을 방해했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베이컨은 그렇게 생각했다. 첫번째 아내 브리짓 패스턴이 1598년에 죽은 지 4개월 뒤에, 쿡은 또다시 경쟁자가 된 베이컨을 물리치고 엘리자베스 해턴과 결혼했다. 쿡은 법무장관으로서 왕과 왕의 특권을 옹호했다. 그는 국가의 명예를 손상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을 국가 모독죄로 기소하기 시작했고, 에식스 백작과 사우샘프턴 백작(1600~01), 월터 롤리 경(1603), 화약음모사건의 연루자들(1605)을 기소하여 당시의 몇몇 대역죄 재판들을 진행시켰다.

이들 재판, 특히 월터 롤리 경에 대한 재판에서 그가 택한 방법은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잔인했다.

수석재판관 시절

1606년에 쿡은 민소법원(民訴法院) 수석재판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중에 일어난 일련의 갈등으로 결국 법관 생활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가 수석재판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리처드 밴크로프트 대주교는 이미 종교법원(또는 교회법원)의 사법권에 대한 코먼 로 법원의 통제를 떨쳐버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 문제는 풀러 사건(1607~08)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국왕이 법원으로부터 사건을 빼앗아 이를 재결할 권한을 가지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쿡은 코먼 로가 최고법이며 "국왕 자신이 직접 아무 소송도 재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제임스 1세의 분노를 샀다.

1610년에 그는 추밀고문관들 앞에서 왕의 포고령에 대한 유명한 견해, 즉 왕은 코먼 로의 어떤 부분도 자의적으로 바꿀 수 없으며, 전에는 범죄가 아니었던 행위를 포고령을 통해 새로이 범죄로 규정할 수도 없다는 견해를 표명하여 다시금 왕의 비위에 거슬렸다. 같은 해에 그는 고등종교법원이 간통을 저지른 자를 구금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했고, 이듬해에 왕이 그를 이 법원 판사로 임명하려 하자 이를 사절했다(교회와 국가).

쿡의 태도는 단호했다.

청렴하고 존경받는 그는 코먼 로의 화신이었다. 그를 '매수'하려는 마지막 시도가 이루어진 것은 1613년 8월이었다. 제임스 1세가 베이컨의 조언에 따라 그를 왕좌법원 수석재판관에 임명한 것인데, 이 자리에 앉혀 놓으면 국왕을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쿡은 또한 추밀고문관을 겸임함으로써 영국 수석재판관(lord chief justice of England:왕좌법원 수석재판관의 정식 칭호)으로 불린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왕좌법원에서 그는 우세를 유지하고, 코먼 로는 의회를 제외한 모든 기관과 개인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피첨 사건에서 그는 왕이 판사들을 한 사람씩 따로 불러서 개인적으로 자문을 구하는 관행에 항의했다. 판사들을 한데 모아서 자문을 구하면 쿡의 견해를 앵무새처럼 되뇌일 것이 뻔했기 때문에, 제임스 1세는 베이컨의 부추김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이 관행을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1615년, 형평법법원(대법관법원이라고도 함)이 코먼 로 법원의 판결에 간섭하거나 간접적으로 파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왕좌법원이 형평법법원의 대법관 엘즈미어와 논쟁을 벌였을 때, 그는 도가 지나쳐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쿡은 또한 왕좌법원의 판결에 저항하기 위해 형평법법원의 도움을 받으려고 애쓴 몇몇 원고들을 교황존신죄(敎皇尊信罪: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로마 교황이 영국 국왕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성립하는 죄)로 처벌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의 장본인으로 지목되었다. 한편 그는 오버베리 살인사건에 대한 공판정에서 고위층의 추문을 짙게 암시하는 말("그 사랑스러운 아기 헨리 왕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을 내뱉음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는 여러 개의 성직록을 한꺼번에 보유할 수 있도록 윤허하는 국왕의 권한을 둘러싸고 제임스 1세와 마지막으로 충돌했다. 쿡을 비롯한 판사들은 왕의 뜻이 알려질 때까지 이 권한과 관련된 사건에 대해 어떤 판결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왕의 금지명령을 무시했다. 왕과 추밀원은 그들을 소환하여 왕의 금지명령에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대해 다른 판사들은 굴복했지만, 쿡은 정직하고 공정한 판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겠노라고만 말했다(교황존중처벌법).

공직 해임

1616년 6월 추밀원은 베이컨의 배후 조종을 받아, 쿡에 대한 3가지 혐의를 정식으로 제기했다.

하나는 그의 손을 거쳐간 보석금에 관한 사소한 문제였지만, 이 혐의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나머지 둘은 형평법법원의 판결을 부당하게 간섭한 혐의와 복수의 성직록 문제에서 왕에게 불경죄를 저지른 혐의였다. 쿡은 순회재판에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의 〈판례집 Reports〉에 포함되어 있는 '잘못'을 시정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1616년 11월 14일에 결국 해임되었다. 그러자 그는 유력한 친구를 얻기 위해 버킹엄 공작의 동생인 존 빌러스 경을 사위로 삼으려고 했다.

쿡의 아내는 베이컨의 도움을 받아 이 결혼에 반대하고, 당시 14세밖에 안 된 어린 딸을 숨겼다. 쿡은 딸을 납치하여 빌러스와 억지로 결혼시켰다. 그후 그는 조금씩 공직생활로 복귀했고, 1617년경에는 이미 추밀원과 성실법원에 돌아가 있었다.

1620년 쿡은 콘월 지방의 한 자치도시에서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이론적으로는 왕의 지지자로서 다시 의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왕의 지지자가 아니라 끝까지 대중의 지도자였던 그는 찰스 왕자와 스페인 왕녀의 예정된 결혼을 반대했고, 베이컨의 수뢰 혐의를 밝히는 데 참여했으며, 1621년에는 의회의 자유에 대한 중요한 토론에서 연설했다.

그결과 9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는 꼬투리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1628년에 그가 제출한 자유 법안은 결국 권리청원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의회 경력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다. 76세의 쿡은 자신의 견해가 달라졌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대헌장을 비롯한 옛날의 선례들을 하나로 통합해 왕권을 제한하는 자유 헌장을 만들었다. 이 의회의 회기가 끝날 무렵, 그는 공직에서 은퇴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서류들은 즉각 압수되었고, 유언장을 비롯한 일부 서류는 끝내 회수되지 않았다.

쿡에 대한 평가

쿡은 변호사와 판사로서 고압적이고 성급한 경향이 있었으며, 다소 편협하고 항상 논리적이지만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중세 법률가로서가 아니라 튜더 왕조 시대 사람으로서 '연감'(옛날의 '판례집')을 읽었지만" 그의 법률 지식은 아무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그는 중세의 '판례'를 교묘히 처리하여, 코먼 로에 대한 자신의 17세기식 견해를 뒷받침하는 데 이용했다.

그는 법정과 의회에서, 교회와 해군 본부 및 위험한 왕권 주장에 맞서서 코먼 로를 성공적으로 지지했다. 그가 코먼 로를 지지하는 데 실패한 것은 형평법법원과 맞섰을 때뿐이었다. 형평법법원은 그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막강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판례집〉을 발행하여 판결에 대해 자신이 말하고 논평한 바에 따라 영국 법의 원칙을 체계화했지만, 다른 법관들은 아무도 자신의 판례집을 발행하지 않았다. 이 〈판례집〉은 근대적 의미의 판례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정 사건과 관련된 법률을 해설하고 거기에서 제기된 요점에 대한 개인적 의견이나 일반적 소견을 덧붙인 일종의 법률 해설서이다. 1824년 윌리엄 베스트 수석재판관은 법률권위자로서의 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사실 쿡 경의 주장에는 근거가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근거 없이 하는 말이 법률이 아니라면, 우리는 국회의사당에서 법률로 여겨지는 불문법의 대부분을 없애버려야 할 것이다. 쿡 경은 판사로서 재판을 주재한 경험이 있는 가장 탁월한 법률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외에 쿡이 출판한 책으로는 4권으로 된 〈영국법제요 Institutes of Lawes of England〉가 있는데, 이 저서의 제1권은 〈리틀턴에서의 쿡 Coke Upon Littleton〉(1628)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한 인간으로서 쿡은 동정보다는 감탄을 자아낸다. 베이컨보다 더 박식한 법률가였지만 베이컨과 같은 철학적 재능을 갖지 못했고, 공정한 재판관으로서 자부심 강하고 야심 만만하며 오만했지만 무자비한 기소자였고, 불법적인 권한행사에는 완강하게 반대했으며, 형평법법원에 도전하면서까지 코먼 로의 우월성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그는 왕권에 도전하고 있는 순간에도 왕 앞에서 굽신거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