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롤리

월터 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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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54(?), 잉글랜드 데번 버들레이샐터턴 근처 헤이스바턴
사망 1618. 10. 29,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영국의 모험가, 작가, 아메리카 초기 식민 개척자. Walter Raiegh라고도 씀.

월터 롤리는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으로 1585년에 기사작위를 받았으나 제임스 1세 때 반역 혐의로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가 결국 처형당했다.

데번 주의 월터 롤리(1581 죽음)와 그의 3번째 아내 캐서린 길버트의 작은 아들인 그는 프랑스 종교전쟁 때인 1569년 위그노의 편에서 전투에 참가했으며 나중에는 옥스퍼드대학의 오릴 칼리지(1572)와 미들템플 법학원(1575)에 다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80년에는 뮌스터에서 아일랜드의 반란군을 상대로 싸웠으며 아일랜드에서 시행되고 있는 잉글랜드의 정책방침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엘리자베스 여왕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582년경에는 영향력있는 총신으로 발판을 굳히고 수익이 높은 독점 사업과 부동산 및 영향력있는 직책을 손에 넣기 시작했으며, 아일랜드에서 활약한 대가로 뮌스터의 방대한 영지를 받기도 했다.

1583년에는 여왕의 후원으로 런던의 스트랜드에 있는 더럼 저택 일부를 사용할 수 있는 차용권을 얻어내 이곳에서 주류 생산(1583)과 모직물 수출(1585) 독점권을 차례로 따냈다. 월터 롤리는 또한 주석 광산 관리인, 콘월 부총독, 데번과 콘월의 해군 부제독을 지냈으며 의회 의원으로도 여러 차례 활약했다. 기사작위를 받은 지 2년 후인 1587년에는 여왕의 근위대 대령이 되었다. 1600년에 임명된 저지 총독직이 엘리자베스 여왕 밑에서 롤리가 지낸 마지막 직책이었다.

1592년 도싯 주의 셔번 장원을 획득한 후 정착해서 가정을 꾸미고 싶어하던 월터 롤리는 1588년초에 니콜라스 스록모턴 경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여왕의 질투를 우려해 이 결혼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1592년 아들이 태어나면서 결혼 사실이 들통나는 바람에 월터 롤리는 아내와 함께 런던 탑에 갖히는 신세가 되었다. 무장 사략선 항해 때 노획한 재물을 이용해 풀려나긴 했으나 궁정에서의 지위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첫아들이 죽은 뒤 1593년과 1604년(또는 1605)에 아들 월터와 커루가 차례로 태어났다.

월터 롤리는 여왕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거만함과 사치벽 때문에 평판이 좋지 못했다.

또한 이단적인 사상을 가졌다고 비난받았으며, 1592년 발표된 예수회 교단의 한 소책자에서는 월터 롤리가 '무신론파'를 고수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실제로 롤리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롤리는 대담한 달변가로서 회의론적 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항해술에 필요한 수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또한 화학도 공부했으며 몇 가지 의학 처방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몇몇 학자들은 '무신론파'를 셰익스피어의 희곡 〈사랑의 헛수고 Love's Labour's Lost〉에 나오는 비슷한 구절인 '암흑파'(School of Night)와 연결시켜왔으며 이 작품을 롤리에 대한 풍자로 해석했다.

여왕과의 불화는 오히려 월터 롤리의 활동 영역을 넓혀주었다.

1584~89년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로어노크 섬 근처에서 식민지 건설을 추진하고 버지니아라는 이름까지 지었으나 정작 자신은 이 땅을 밟아보지도 못했다. 1595년에는 탐험대를 이끌고 남아메리카에 있는 지금의 기아나로 떠나 스페인 식민지 제국의 중심부인 오리노코 강을 항해했다. 월터 롤리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탐험기 〈기아나 발견 The Discoverie of Guiana〉을 썼다.

스페인의 문서와 인디언들의 이야기를 통해 월터 롤리는 남아메리카 내륙에 전설적인 황금도시인 엘도라도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었다. 금광 몇 군데를 찾아냈으나 아무도 이 지역을 식민화하려는 롤리의 계획을 지지하지 않았다. 1596년 그는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와 함께 스페인의 식민지 카디스 침략 원정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1597년에는 에식스의 해군 소장으로 아조레스 제도를 탐험했다.

스페인에 대한 월터 롤리의 호전적인 태도 때문에 평화주의자인 제임스 1세(1603~25 재위)는 그를 기용하지 않았다.

월터 롤리의 적들은 그를 몰락시키기 위해 일을 꾸몄고 1603년 왕을 폐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고발했다. 롤리는 헨리 브루크, 코범 경이 제출한 증거로 유죄 선고를 받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처형이 연기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롤리는 셔번 장원을 잃지 않으려고 애써서 아들에게 명의를 양도했으나 사소한 글자를 잘못 쓰는 바람에 허사가 되었다. 롤리는 1616년에 풀려났지만 사면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기아나의 풍부한 자원을 빼낼 꿈에 젖어 있던 월터 롤리는 기아나가 1595년에 이미 원주민 족장들에 의해 영국에 양도되었다고 주장했다. 국왕의 승인을 얻은 롤리는 스페인을 침해하지 않고 금광만을 개발할 것을 약속하며 자금을 모아 2번째 원정에 올랐다. 그러나 심한 열병에 걸려 부하들의 강 상류 진입을 지휘하지 못했다. 탐험대 대위인 로렌스 케미스가 스페인 정착촌에 불을 질렀으나 금이라곤 찾지 못했으며 롤리의 아들 월터마저 이 와중에 죽었다. 국왕 제임스는 연기했던 1603년의 사형선고를 집행하도록 했고 1618년 롤리는 씩씩하게 자기의 행위를 변호하는 글을 남긴 뒤 처형당했다.

월터 롤리는 1603년 이래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월터 롤리가 가끔씩 써놓은 글들은 1618년 이후에 수집·출판되었다. 그 가운데 그리 중요하지 않은 몇 편은 롤리가 쓴 것인지 아직 분명치 않다. 560행으로 된 운문집에서 롤리는 여왕을 킨티아(그리스 신화에서 달의 여신)로 부르면서도 그녀의 불친절함에 대해 불평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1592년에 자신이 수감되었던 일을 원망하고 있는 듯하다. 〈기아나 발견〉 외에 가장 잘 알려진 산문작품은 〈지난 여름의 아조레스 섬 전투에 관한 보고서 A Report of the Truth of the fight about the Iles of A이미지ores this last Sommer〉(1591)와 〈세계사 The History of the World〉(1614)가 있다.

〈세계사〉는 월터 롤리가 탑에 갇혀 있을 때 쓴 것으로 천지창조에서부터 BC 2세기까지 다루고 있다. 여기서 롤리는 역사는 신의 섭리에 대한 기록이며 동시대인들을 기쁘게 해주고 무신론의 공격에 반격하는 교의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제임스 국왕은 폭정을 하는 왕은 벌을 받게 마련이라는 교훈의 실례로 묘사되었다.

역사상 월터 롤리는 권력가이기 보다는 흥미롭고 수수께끼같은 인물로 부각되어 영웅이 아니면 악당으로 그려진다.

월터 롤리는 남·북아메리카를 모두 영국 영토로 간주할 만큼 폭넓은 상상력의 소유자였으며 아울러 상당한 현실적 능력과 호소력있는 문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야망과 일치하지 않은 실제 행동으로 타고난 재능을 보다 효과적으로 발휘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