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

세실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Cecil, 1st Baron Burghley
요약 테이블
출생 1520. 9. 13, 잉글랜드 링컨셔 번
사망 1598. 8. 5,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엘리자베스1세가 가장 신임했던 조언자이자 정치의 대가이며 외교관, 정치가, 행정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인물이다. 헨리 8세 재위시에 의회에 진출했다.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서머싯 공작과 일했고, 1550년에 왕의 자문기관인 추밀원 고문관이자 국왕의 비서가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했을 때 여왕의 단독 비서로 임명되었다. 첫 번째 외교업적은 여왕을 설득해 스코틀랜드와 에든버러 조약을 맺게 함으로써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도록 한 것이었다. 이후 뛰어난 재정 감각으로 1561년의 화폐 개혁에도 큰 몫을 했고, 여왕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1570년 교황이 엘리자베스를 폐위시키는 칙령을 내리자 대주교 매튜 파커와 함께 여왕의 국교회를 옹호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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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생애
  3. 세실에 대한 평가
세실(William Cecil)
세실(William Cecil)

개요

르네상스 정치의 대가이며 외교관·정치가·행정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고위직책과 귀족작위를 얻었다.

생애

세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튜더 왕가를 위해 일하고 지방의 상속녀와 결혼함으로써 부와 관직 및 젠트리의 직위를 얻었다.

어릴 때 그는 아버지가 의상부 궁내관(宮內官)으로 있던 궁정에서 옷시중을 드는 시동으로 지냈다. 1535년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들어가 다재다능한 인문주의자 존 체크 아래서 고전을 배웠고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았다. 20세 때 체크의 여동생 메리를 사랑해 1541년에 결혼했으나 메리는 토머스라는 아들을 하나 남기고 1543년에 죽었다.

1542년 헨리 8세는 자기의 정책을 옹호한 보상으로 그에게 관습법 법원에 자리를 마련해주었고 1년 뒤 그는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1545년 교양있고 신앙심이 깊은 밀드레드 쿠크와 재혼했으며, 이 결혼으로 궁정에서 영향력있는 프로테스탄트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이 모임에는 장인인 앤소니 쿠크와 이전의 처남 존 체크, 뒷날 섭정이 된 하트퍼드 경이자 서머싯 공작인 에드워드 시모어, 헨리 8세의 왕비 캐서린 파 등이 있었다. 세실은 캐서린 파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소책자를 편찬해 바쳤다.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섭정인 서머싯 공작과 일하기 시작했고 1548년에는 그의 비서가 되었다. 1549년 서머싯이 처음 권좌에서 쫓겨났을 때 세실은 잠깐 동안 런던 탑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서머싯과 그의 맞수인 워릭 백작 존 더들리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함으로써 다시 총애를 얻었고, 1550년에는 추밀고문관이 되는 동시에 윌리엄 피터와 함께 국왕의 비서가 되었다.

1551년 서머싯이 완전히 몰락한 뒤 세실은 노섬벌랜드 공작령을 차지한 승리자 워릭에게 기사(騎士)로 서임되었다. 그는 노섬벌랜드 공작에게 충성했으나 공작이 왕위계승 순위를 바꿀 것을 제안하자 법관들과 함께 이를 반대했다. 그는 왕의 명령을 받고 나서야 마음을 바꾸어 노섬벌랜드의 의견에 동의했다.

언제나 튜더 왕가에 충성스러웠던 세실은 에드워드 6세가 죽은 뒤 노섬벌랜드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는 추밀원의 대표로서, 승리를 거둔 메리 튜더에게 접근했고 그녀에게서 "매우 정직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얻어냈다.

세실은 에드워드 6세 밑에서 부비서관으로 있었지만 활동범위는 그리 넓지 못했다.

궁정의 극단적인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적 이상주의에도, 구습타파에 대한 열정에도 공감하지 못했다. 그는 부패한 정부의 이권을 일부 나누어 가졌지만 능력있는 관료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그는 법의 정의를 인정하는 온건주의자였으며 종교개혁문제에서는 동맹자였던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와 마찬가지로 점진주의자였다. 그러나 메리가 즉위했을 때 관직을 제안받았음에도 그는 대부분의 동료들과는 달리 가톨릭 궁정에서 물러났다.

1558년 엘리자베스가 즉위했을 때 그는 여왕의 단독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첫번째 중요한 외교업적은 망설이는 엘리자베스를 설득해 스코틀랜드에 개입해 에든버러 조약(1560)을 맺게 함으로써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도록 한 것이었다. 그는 타고난 협상 수완을 발휘해 1559년에 교회 문제를 도와 타결했고, 뛰어난 재정 감각으로 1561년의 화폐 개혁에도 큰 몫을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존 더들리의 아들 로버트를 총애하면서 그의 지위는 약해졌다.

엘리자베스는 그가 사표를 걸고 로버트 더들리에게 맞서겠다고 위협했음에도 그를 변함없이 신뢰했고, 1561년에는 그에게 후견법원(後見法院)을 총괄하는 수지 맞는 자리를 맡겼다.

정책결정을 위해서는 왕위계승문제가 선결되어야 했다. 세실은 더들리를 물리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한편, 의회 내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엘리자베스를 결혼시키려 하자 이에 동의했다. 그는 메리 스튜어트의 왕위계승권 주장에는 반대했으나 대신 합스부르크 가문출신으로 엘리자베스에게 구혼한 카를 대공을 천거했다.

주도권을 잡고 있던 더들리는 프랑스의 위그노들을 지원하기 위한 프랑스 원정을 지지했으며(이 원정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트루아 조약으로 끝맺음) 그뒤 추밀원 의원이, 1564년에는 레스터 백작이 되었다. 수세에 몰린 세실은 노퍽 공작 4세인 토머스 하워드를 추밀원에 끌어들여 다시 세력균형을 이루었으나, 1565년 메리 스튜어트가 단리 경과 결혼함으로써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하나로 묶으려는 세실의 희망은 위협을 받게 되었다.

1568년 메리 스튜어트가 잉글랜드로 도망쳐오자 세실은 당황했다.

이는 스코틀랜드와 외교 교섭을 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노퍽 공작으로 하여금 과부가 된 스코틀랜드 여왕과 결혼하려는 생각을 품게 했기 때문이었다. 노퍽은 메리의 운명과 위그노들에 대한 비밀지원, 스페인에 대한 정책을 둘러싸고 세실과 대립했다. 알바 공작이 거느린 네덜란드 주둔 스페인 군대의 위협에 분개한 세실은 1568년 12월 금괴를 싣고 알바로 가던 배를 나포하도록 했고, 이에 응수해 알바는 안트웨르펜에서 영국 교역을 봉쇄해 전쟁은 바로 눈 앞에 다가오게 되었다.

레스터는 노퍽과 협력해 세실을 축출하려 했으나 여왕이 비서인 세실을 계속 뒷받침해주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실에게 도전한 자들은 패배했다. 1571년 세실은 벌리 남작 1세로서 작위 귀족이 되었으며, 1572년에는 가터 훈위의 기사로 서임되고 경리부장이 되었다. 그는 이제 여왕에게서 레스터와 맞먹는 총애를 받게 되었다. 한편 1570년 교황이 엘리자베스를 폐위시킨다고 칙령을 내리자 대주교 매튜 파커와 함께 엘리자베스의 국교회(國敎會)를 옹호했다.

메리 스튜어트를 왕위에 추대하기 위해 스페인이 영국을 침략한다는 각본으로 짜여진 이른바 리돌피 음모(Ridolfi Plot)로 말미암아 1572년 노퍽이 처형당하고 메리 스튜어트와 친(親) 스페인파는 불신받게 되었다. 세실은 스페인과 교류를 단절하고 1572년에는 프랑스와 블루아 조약을 맺었다. 네덜란드에서 프랑스가 휘둘렀던 영향력이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벌어진 학살사건(1572) 때도 세실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단념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그는 스페인의 비위를 맞추어 안트웨르펜을 상대로 한 교역봉쇄도 풀게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섭정문제를 해결한 그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설득해 메리 여왕을 폐위시키지는 못했다.

1570년대에 레스터는 국무장관이 된(1573) 프랜시스 월싱엄의 지지를 받아 청교도에게 환심을 사려 했고,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 반란 지도자 오라녜 공(公) 빌렘에 대한 지원을 선동했으며, 프랑스와의 협상을 지지했다.

세실은 프랑스를 견제하고 네덜란드의 반란에 대한 공공연한 지지를 피하려 애썼으며, 네덜란드에 대한 스페인의 명목상 종주권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펠리페 2세의 명백한 의도들을 무시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1576년 타협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마침내 레스터와 제휴해 엘리자베스에게 오라녜 공의 편에 서도록 촉구했다. 엘리자베스는 공공연히 싸우기보다는 앙주 공작과 결혼을 협상함으로써 네덜란드에서 프랑스가 지니고 있던 영향력을 이용하려고 했다. 세실은 여왕의 방침을 받아들였으나 청교도들의 반대로 앙주 공작과의 결혼문제는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세실이 천거했던 대주교 에드먼드 그린달이 여왕과 싸운 끝에 실권을 잃게 되자 온건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던 그의 기대는 무너졌다.

그는 공격적인 가톨릭 세력에 대항하던 청교도 전사(戰士)들을 약화시킬 수 없었다. 1580년 아일랜드에 대한 예수회 활동과 교황의 개입으로 세실은 가톨릭에 적대적인 행동을 취했으며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의도에 대해 경계심을 품었다. 그는 1584년 오라녜 공 빌렘의 암살사건과 프랑스의 애런들 상륙계획을 알고 여왕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으며 스페인을 상대로 한 전쟁을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비용 때문에 망설이다 네덜란드에 주둔한 스페인군 사령관인 파르마 공작 3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에게 평화지지자를 파견한 일로 레스터와 사이가 나빠졌다. 1585년 세실은 레스터의 네덜란드 원정과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카리브 해 항해를 지지했다. 1586년 한때 메리 스튜어트의 시동이던 앤소니 배빙턴이 엘리자베스를 암살하려던 음모인 배빙턴 음모를 월싱엄이 적발하자, 세실은 1587년 메리 스튜어트를 재판·처형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는 지나치게 독자적으로 일을 주도하다가 외교적인 문제로 한동안 엘리자베스의 총애를 잃었다. 1587년 스페인 무적함대의 위협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세실은 파르마와 협상을 했고 나바라의 엔리케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에게 환심을 사려고 애썼으며, 아일랜드와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을 날카롭게 경계했다. 그의 외교·군사·해군 및 재정적인 준비는 1588년에 무적함대를 패배시킬 수 있었다.

그는 승리를 자신의 공로라고 선전해 엘리자베스의 가장 중요한 고문관으로서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퍼졌다.

무적함대가 패배한 뒤 레스터는 죽었으나(1588) 세실은 살아 남아 새로운 세대의 정치를 주관했다. 그는 1563년에 태어난 아들 로버트에게 국무장관이 되는 데 필요한 자질을 가르쳤고 1596년에는 아들에게 그 직책을 마련해주었다(로버트는 1590년에 윌싱엄이 죽은 뒤 이미 일을 수행하고 있었음). 건강이 나빴으나 세`실은 공적 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회고록을 쓰며 송사를 다루는 등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는 재정이 나빠지지 않도록 어떤 정책도 새로 입안하지 않는 대신 경비절약계획을 강화해 보조금을 받기 위해 하원에 압력을 가했다. 대외문제에서 그는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상대로 벌인 전쟁과 드레이크 및 에식스의 해상원정에 찬성했다. 결국 그는 프랑스·스페인 협약과 전쟁이 길어질 것을 두려워해 스페인과 화약(和約)을 촉구했으나 그 협상이 마무리되기 전에 죽었다.

세실에 대한 평가

정치가로서 세실은 여왕에게 가능한 한 좋은 조언을 하고 여왕에게 유리한 것이면 어떤 정책이든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높은 충성심으로 엘리자베스의 신뢰를 얻었다. 지극히 신중했던 그는 여왕의 종복으로서 공식적으로는 자신을 숨기면서 '은밀하게' 일을 잘 해냈다. 정책을 결정할 때는 무엇이 국가에 이익인가를 직관적으로 알았고 이를 여왕에게 전달하려 애썼다. 그는 유럽 프로테스탄트 교도의 대의(大義)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중시했다. 실제적인 이유로 전쟁보다 외교를 더 선호했고 비공식 접촉 및 반역과 적대국가 내의 파벌싸움을 이용했다.

경제문제에서는 전통적인 정책을 통해 영국의 안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농업과 산업에서는 자급자족을, 상업에서는 중금주의(重金主義)를 장려했으며 행정가인 그는 실용주의를 표방했다. 이 덕분에 그는 지식인이자 법률가로서 행동에 앞서 빠지기 쉬운 안정된 평가와 법률적인 탁상공론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가톨릭 왕위계승권자인 메리 스튜어트를 제거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확정했고, 미리 준비를 갖춤으로써 영국이 무적함대에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를 결혼시키거나 교회를 개혁하도록 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네덜란드에 대한 그의 정책은 비현실적이었고 결국 스페인과 공공연한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세실은 여왕의 애매한 태도에 실망하곤 했지만 결국에는 여왕의 행운을 프로테스탄트 영국을 위한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실의 장점은 근면하고 행정업무에 유능하다는 데 있다.

과격한 개혁가는 아니었지만 그는 부패와 싸우며 기존체제가 원만하게 운영되도록 힘썼다. 교회와 국가에 대한 폭 넓은 공직 추천권을 가졌던 성직자·젠트리·귀족들을 행정업무에 추천했다. 그는 추밀원과 의회에 빠짐없이 출석했고 이 기구들을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국내외의 검열, 선전, 정보망을 지휘했다.

재무담당 귀족으로서 그는 1580년대말 어마어마한 전쟁비용이 들기 전까지는 재정을 튼튼하게 유지했다.

그는 무거운 세금이 국민과 여왕의 관계 및 의회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으로 확신해 세입팽창보다는 예산삭감과 절약을 추구했다. 그는 왕실과 육해군 기구들을 재정적으로 통제해 능률을 향상시켰고 추밀원과 재무 법정에서 청렴한 심사원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신중하게 국왕의 재정과 사법(司法)을 다루었다. 그는 공직과 관련된 비공식적인 기회를 통해 재산을 모았으나 사례금과 선물을 받으면서도 당시 대중의 도덕 한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는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신사적이고 효율적인 행정부를 운영했다.

1559년부터 케임브리지대학교 총장으로 봉직했던 그는 교과과정보다는 규율 확립에 공헌했고, 그의 집을 학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자 여왕의 종복과 젊은 귀족들의 교육장으로 만들었다. 이탤릭체 글씨에 관한 것과 같은 그의 지적 관심은 존 체크의 진보적인 인문주의자 모임에서 비롯되었다.

예술에 관해 그가 가졌던 절충주의는 서머싯과 노섬벌랜드 아래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그가 몸소 설계한 그의 집 세 채(스탬퍼드에 있는 벌리 하우스, 런던 스트랜드 거리에 있는 세실 하우스, 허트퍼드셔에 있는 시어볼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집들의 장식과 가재도구, 수집된 그림과 주화(鑄貨), '온갖 수공품(手工品)들', 식물학자 존 제러드가 감독해 만든 정원은 널리 찬사를 받았고 이로써 엘리자베스 시대 건축에 창조적인 기여를 했다.

세실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에게 희생된 가톨릭 교도와 외국 대사들, 실망한 탄원자들에게서 비롯된 그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는 가톨릭 역사가들에게 이어졌다. 반면 프랜시스 베이컨, 윌리엄 캠든 같은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은 세실을 호의적으로 평가해왔다. 즉 종교적인 당파성이 정치가이자 인간으로서 세실의 명성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가 정책 결정에 얼마나 큰 몫을 했는가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들이 여왕과 세실의 동료들이 정부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져왔다. 세실의 전문적인 능력에 대한 평가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행정·재정·당파정치·외교 등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했다.

세실의 공적 역할, 그 시대 사람으로서의 특징은 점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만 그의 개인적인 인격의 깊이를 살펴보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