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네세

파르네세

다른 표기 언어 Alessandro Farnese, duca di Parma e Piacenza 동의어 Alejandro Farnesio,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디 파르마 공작
요약 테이블
출생 1545. 8. 27, 로마
사망 1592. 12. 3, 프랑스 아라스
국적 네덜란드

요약 네덜란드의 섭정(1578~92 재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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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혈통과 초기생애
  3. 총독 승진
  4. 말년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

개요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를 대신하여 네덜란드를 다스렸다.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계속 지배하고 네덜란드의 남부지방(지금의 벨기에)에서 가톨릭이 살아남은 것은 주로 그의 덕분이었다. 1586년에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이 되었지만, 한번도 이탈리아로 돌아가 자신의 공국을 다스려보지 못했다.

혈통과 초기생애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태어난 콘도티에리(용병대장) 가문은 교황에게 봉사함과 아울러 정치적으로 유리한 혼인을 맺는 관례 때문에 15세기에 높은 지위를 얻었다.

그중 한 사람이 1534년 교황 파울루스 3세가 되었다. 파울루스 3세는 자신의 사생아 피에르 루이지에게 주기 위해 교황령인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공국으로 만들었다. 피에르 루이지의 아들 오타비오(1547~86, 파르마 공작)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속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사생아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 결혼했고 1545년 8월 27일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한 아이만 살아남았다.

이 아이가 바로 알레산드로였다.

어머니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혈통이었지만, 아버지 오타비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계속 불화를 일으켰다. 이 2가지가 알레산드로의 운명을 결정했다. 아직 어렸을 때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오타비오의 충성을 위한 볼모가 되어, 역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인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궁정으로 보내졌다.

펠리페는 당시 네덜란드의 브뤼셀에 있었고, 알레산드로도 1556~59년 네덜란드에 머물면서 얼마 후 네덜란드를 분열시킨 종교적·정치적 갈등의 주역들을 알게 되었다. 1559년에 그는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가서, 왕실의 친구가 되었다. 1565년 그는 네덜란드로 돌아갔는데, 당시 어머니인 파르마 공작 부인 마르가레테는 1559년부터 6년 동안 네덜란드 섭정을 맡고 있었다. 같은 해 그는 20세의 나이로 포르투갈 공주 마리아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오랜 협상 끝에 이루어졌는데, 그는 결혼하기 이틀 전까지 약혼녀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1566년 파르마에서 가정을 이루었지만, 그는 여전히 사냥과 승마와 전투에 주로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특별히 행복하지는 않았다. 이 무렵에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쓴 편지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야 하는 생활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행동할 기회를 기다렸는데 그 기회는 1571년에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의 부관으로 임명된 그는 레판토 전투에서 투르크군을 맞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듬해 파르네세는 원한을 품고 파르마로 돌아왔다.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종교전쟁은 곧 그를 따분한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당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서 반란을 진압해야 할 책임을 맡고 있던 돈 후안이 1577년 그에게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다.

1578년에 파르네세는 장블루 전투에서 정력적으로 싸웠다. 네덜란드 반란군은 패주했고, 수많은 도시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이런 가혹함은 그가 그후에 취한 태도와는 대조적이다.

총독 승진

돈 후안이 1578년 10월 1일에 죽자, 며칠 뒤 펠리페 2세는 파르네세를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했다.

펠리페 2세는 처음으로 운 좋은 선택을 한 것이었다. 파르네세는 지적인 유연성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전임 총독들의 가혹함이나 종교적 파벌주의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어, 네덜란드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파르네세는 훌륭한 군인으로서, 자기 직업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상당한 매력을 지닌 타고난 사교적인 인물로서, 모든 광신적 행위를 거부했다. 여러 점에서 그는 자신의 적인 오라녜 공 빌렘과 비슷했고, 빌렘도 처음으로 자신과 수준이 맞는 상대를 만남 셈이었다.

그리하여 파르네세는 34세의 나이에 눈부신 활동을 시작했다. 이 활동은 그가 죽었을 때에야 끝났다. 그는 당장 네덜란드의 주 가운데 가톨릭교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주와 외교적인 화해를 시도하여 약삭빠른 면을 충분히 보여주는 한편, 빌렘이 이끄는 위트레흐트 동맹에 대해서는 군사작전을 계속했다. 위트레흐트 동맹은 프로테스탄트가 다수를 차지하는 북부 7개주의 동맹이었다.

파르네세는 중병에 걸렸지만, 마스트리히트에 대한 포위 공격을 계속한 끝에 1579년 6월 29일 이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빌렘의 명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가톨릭교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남부 주와 그의 협상은 1579년 5월에 아라스 조약으로 열매를 맺었다. 그의 통치가 이룩한 주요업적 가운데 하나는 이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 남부지역에 평화를 회복한 것이다.

파르네세와 네덜란드 남부가 합의에 이른 것은 그 지역에서 외국군을 철수하고 파르네세 자신도 6개월 이내에 네덜란드를 떠나겠다고 양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련한 정치가인 파르네세는 사령관 겸 섭정으로 네덜란드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이때문에 그는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처음에 네덜란드 섭정으로 임명한 어머니(파르마 공작 부인 마르가레테)와 충돌하기까지 했다(네덜란드 공화국).

외국군 철수와 '국민군' 조직으로, 파르네세에게는 1만 5,000명의 병력밖에 남지 않았다.

이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데다, 대다수는 상대인 위트레흐트 동맹군과 같은 민족이었다. 파르네세는 이 오합지졸을 이끌고 그후 2년 동안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포위 공격을 장기간 계속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파르네세는 되도록 빨리 협상을 벌였고 명예로운 항복을 받아들였다. 그는 1581년 11월 투르네 시를 점령하여, 그곳에 자신의 항구적인 정부를 세웠다. 이듬해에도 또다른 도시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의 군대는 기진맥진하여 빌렘이 이끌고 있는 위트레흐트 동맹군에 대해 더이상 광범위한 작전을 벌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자 파르네세는 설득의 재능을 총동원하여 스페인 왕과 스페인의 지배를 받는 영토의 군주들을 움직여 스페인군을 소환하고, 이탈리아군이 네덜란드로 파견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충분한 증원군을 얻은 파르네세는 1582년말에 마침내 공세로 전환했다. 완전한 기동력을 갖춘 6만 명의 병력을 이끌게 된 파르네세는 뛰어난 전략을 구상하여 실행에 옮겼다. 1583년 중엽 그는 디스트 시와 웨스테를로 시를 점령하여, 안트웨르펜과 브뤼셀 사이의 연락을 위협했다.

그는 해안지방의 몇몇 도시를 정복했고, 쥣펜군을 점령하여 네덜란드 연합주를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 1584년 전반기에 그는 전략 요충을 세 군데 더 점령하여 안트웨르펜을 바다에서 고립시켰다. 이프르와 브뤼주도 차례로 포위되었다. 파르네세는 더이상 지체하지 않고 안트웨르펜 공격을 개시했다.

이 도시를 고립시키기 위해 파르네세는 작은 요새들을 세웠고, 스헬데 강 하류를 가로지르는 부교를 설치하여, 포위당한 부대가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안트웨르펜은 13개월 뒤인 1585년 8월 17일 항복했다. 이로써 전쟁 역사상 가장 유명한 포위 공격 가운데 하나가 끝났다. 안트웨르펜 점령은 파르네세 생애의 절정이었다. 네덜란드 남부지방을 더욱 굳게 단결시켰으며, 이 지방은 나중에 벨기에가 되었다. 게다가 빌렘이 1584년 7월 10일 델프트에서 암살당했기 때문에 파르네세의 강력한 상대가 제거되었다.

1586년에 아버지가 죽자, 알레산드로는 파르마 공작이 되었다.

말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 원정계획에 참여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면, 파르네세는 계속 북쪽으로 진격하여 네덜란드 연합주에 대한 공격을 강행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영국 침공에 앞서 영국 해협 해안에 병력을 집결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1588년에 스페인 무적 함대가 패배하는 바람에 영국 침략의 꿈은 깨지고 말았다. 스페인에서는 이 재난의 책임이 파르네세에게도 있다고 주장했고, 그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다. 바로 이때 파르네세는 병에 걸려, 나소의 마우리츠가 재건한 네덜란드군에 대해서는 부관들이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우도록 맡겨놓고, 광천으로 유명한 보양지 스파에서 치료를 받았다.

병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그는 47세의 나이로 아라스에서 죽었다. 펠리페 2세가 그에게 치욕을 안겨줄 작정이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 죽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카를 5세가 다스리는 동안 네덜란드 섭정을 맡은 사람들 가운데 전략가로나 외교관으로서 파르네세를 능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은 네덜란드 남부지방에 스페인 지배를 회복하고, 그곳의 가톨릭교를 확고하게 지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