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2세

펠리페 2세

다른 표기 언어 Felipe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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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27. 5. 21, 스페인 바야돌리드
사망 1598. 9. 13, 스페인 엘에스코리알
국적 스페인·포르투갈

요약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운동의 옹호자였으며 그의 통치기에 스페인은 최상의 국력과 영토확장을 자랑했다. 황제 카를 5세와 포르투갈의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540년 부왕으로부터 밀라노 공작령을, 1554년 잉글랜드의 메리와 결혼해서는 나폴리와 시칠리 왕국을, 1555년엔 네덜란드를, 이어 1556년엔 스페인 왕국과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를 차례로 물려받았다. 그는 비록 부하들의 신임을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열정적으로 통치했다.
책과 그림을 아꼈으며 그의 통치기간에 스페인은 문학의 황금기를 누렸다. 특히 그는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는 문제에 투철한 사명을 갖고 왕권을 행사했다. 서유럽의 가톨릭 신앙과 네덜란드에서의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영국을 침공하다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격멸되기도 했고, 네덜란드의 반란 진압에도 실패했다. 그의 대외정책은 거의 실패했지만 가톨릭 교회를 지키는 데는 실패하지 않았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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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결혼
  3. 스페인 왕
  4. 통치방식
  5. 대외정책
펠리페 2세(Felipe II)
펠리페 2세(Felipe II)

개요

로마 가톨릭반(反)종교개혁 운동의 옹호자였으며 그의 통치기에 스페인은 최상의 국력과 영토확장을 자랑했다.

1566년에 일어난 네덜란드의 반란 진압에 실패했으며 1588년에는 영국 침략을 감행하다가 '무적함대'가 격멸되었다.

초기생애와 결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포르투갈의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를 5세는 종종 비밀 비망록을 통해 아들 펠리페에게 신이 부여한 최고의 권위로서의 왕권을 유지하고 측근에 대한 지나친 믿음을 경계할 것을 당부했으며, 성실한 아들인 펠리페는 진심으로 이 충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했다. 1543년부터 카를은 자신이 외국으로 나갈 때마다 아들 펠리페에게 섭정을 맡겼다. 1548~51년 펠리페는 이탈리아·독일·네덜란드를 여행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과묵했고 카스티야어 외에 다른 어떤 언어도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과 플랑드르의 귀족들에게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펠리페는 4번 결혼했다.

1545년 사촌인 포르투갈의 마리아와 처음 결혼했으나 그녀는 1545년 돈 카를로스를 낳다가 죽었다. 1554년 잉글랜드의 메리 1세와 결혼해, 1558년 메리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을 때까지 메리와 공동으로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1559년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딸인 엘리자베트와 3번째 결혼을 했으며 이 결혼은 30여 년 간 지속된 스페인과 프랑스와의 전쟁을 종결시킨 카토캉브레지 평화조약(1559)의 초석이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이사벨 클라라 에우게니아(1566~1633)와 카탈리나 미카엘라(1567~97)라는 두 딸을 낳고 1568년에 죽었다.

그후 1570년 펠리페는 오스트리아의 안나와 결혼했다. 펠리페의 사촌인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딸인 안나는 1580년 죽었으며 유일하게 생존한 그녀의 아들이 나중에 펠리페 3세로 즉위했다.

스페인 왕

펠리페는 1540년 부왕 카를 5세로부터 밀라노 공작령을, 1554년 잉글랜드의 메리와의 결혼에 즈음해서 나폴리와 시칠리 왕국을, 1555년 10월 25일 네덜란드를, 이어 1556년 1월 16일 스페인 왕국과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를 차례로 물려받았으며 그 후 곧 프랑슈콩테도 얻었다.

삼촌인 페르디난트 1세가 독일 내의 합스부르크 영토를 다스릴 황제 자리에 올랐을 때 펠리페는 네덜란드에 있었다. 1557년 생캉탱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승리한 후에 그는 전쟁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지만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펠리페는 1559년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후 다시는 스페인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마드리드에 있으면서 모든 종류의 관직과 성직임명권을 직접 통제하며 제국을 다스렸다. 따라서 카스티야 지역 외의 신하들은 국왕을 볼 수조차 없게 되었으며 차츰 중앙 각료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펠리페에게까지도 반감을 갖게 되었다.

특히 네덜란드·그라나다·아라곤에서 이런 양상이 두드러졌다.

통치방식

펠리페는 성실한 업무로 이러한 구조적 결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으며, 그의 통치방식은 유명해졌다.

각료들이 왕에게 제출하는 메모·보고서·제언 등의 문서를 바탕으로 전체업무를 문서화했다. 마드리드에서나 시에라 드 구아다라마 언덕에 세운(1563~84) 엘에스코리알 궁에서나 그는 항상 작은 집무실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곳에서 모든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때로 연기하기도 했다. 그의 업무 진행방식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의 통치방식이 늑장 행정으로 악명이 높은 정부체계를 치명적일 정도로 둔화시켰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그는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열성적이었으며 이런 태도는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그의 무능력과, 결정을 회피하는 타고난 성품을 덮어주었다. 이는 가장 능력 있고 충실한 신하에 대한 펠리페의 병적인 의심과도 관련이 있었다. 파르마 공작부인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알바 공작,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 안토니오 페레스,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등과 같은 유명한 인사들도 곤욕을 치렀다.

당시 궁정사관인 카브레라 데 코르도바는 "그가 웃을 때와 노려볼 때를 분간하기 힘들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오스트라아 돈 요한의 측근인 후안 드 에스코베도의 경우에도 펠리페의 동의하에 살해되었다. 결국 왕궁은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악명이 높아갔다. 이러한 분위기는 스페인 왕정의 전반적인 행정체제를 마비시켰다. 이후 발생한 네덜란드 반란(1568~1609), 그라나다 모리스코인들의 반란(1568~70), 아라곤 반란(1591~92)의 주요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 펠리페 2세를 편협하고 잔인한 악마로 묘사한 '어두운 전설'(black legend)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의 절제되고 세련된 외모는 이탈리아의 화가 티치아노와 앤서니 모어 경이 그린 유명한 초상화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책과 그림을 아꼈으며 그의 통치기간에 스페인은 문학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는 딸들에게 자상한 아버지였고, 엄격하고 헌신적인 생활을 했다. 그가 1566년 로마에 있는 특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단의 통치자가 되어 신의 가호와 신앙에 손상을 입히느니 차라리 나는 국가와 목숨을 버릴 것"이라는 것을 "교황에게 확실히 밝히라"고 썼다.

이는 펠리페의 통치 이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펠리페는 국민들을 진정한 가톨릭 신앙 안에 살게 하는 신성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왕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에서 보여주었던 대로 필요하다면 무자비한 폭정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교황조차도 신의 사역과 스페인 왕정의 사명에 대한 펠리페의 신념을 구별하는 데 종종 어려움을 겪었다.

대외정책

펠리페 2세는 통치초기 20년간 서유럽 국가들과의 평화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며 그후 지중해의 오스만 제국과 1차례 중요한 해전을 벌였고 1568년부터 네덜란드의 반란과 전쟁에 직면했다.

1570년대말부터 그의 대외정책에 변화가 생겼다. 1578년 8월, 조카인 포르투갈 왕 세바스티앙이 후계자 없이 죽자 펠리페는 포르투갈의 왕위를 넘보기 시작했다. 1580년 그는 포르투갈의 왕위 세습권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해 무력으로 이를 차지했으며 유럽 국가들은 스페인의 세력 증대에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반란세력에 대한 지원을 늘려나갔다.

이에 대응해 1580년대에 펠리페는 서유럽의 가톨릭 신앙과 네덜란드에서의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대한 전면적인 개입에 들어가야 한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 네덜란드 주둔 스페인 군대의 협조를 얻어 무적함대를 구축해 영국 침공에 나섰다(1588). 또한 나바라의 엔리케와 위그노파에 대항한 프랑스의 극단적인 가톨릭 진영인 동맹군에 군대와 자금을 지원했다.

앙리 3세가 살해되자(1589) 그는 자신의 딸 이사벨 클라라 에우게니아의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가톨릭 동맹국들은 펠리페의 대외정책이 가톨릭 교회 옹호를 위한 것인지 스페인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분간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펠리페의 대외정책은 거의 실패했다. 1593년 나바라의 엔리케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앙리 4세로 즉위했다(베르뱅 평화조약, 1598). 잉글랜드와 북부 네덜란드는 여전히 프로테스탄트 지역으로 남아 있었고 정복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펠리페의 통치를 전반적으로 평가할 때 모두 실패라고 할 수는 없다. 지중해의 레판토 해전(1571)에서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선왕인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추진한 통일 과업을 완성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보는 견지에서 가톨릭 교회가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는 데 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부 네덜란드를 잃었지만 남부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는 가톨릭을 유지했으며,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이단의 확장을 막았고, 프랑스에 개입해 앙리 4세가 결국 가톨릭교도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598년 펠리페 2세는 엘에스코리알에서 암으로 죽었다. 이때 스페인은 여전히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펠리페가 추구했던 반종교개혁의 물결은 그의 사후 50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