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4세

앙리 4세

다른 표기 언어 Henri IV 동의어 헨리케 3세 나파로아코아, 대왕, Henry the Great, 선량왕, Good King Henry
요약 테이블
출생 1553. 12. 13, 나바르 베아른 포
사망 1610. 5. 14,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부르봉가 출신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왕이 되었다. 원래는 프로테스탄트였으나 종교전쟁이 끝난 뒤 파리를 얻고 프랑스를 재통일하기 위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했다(1593). 앙리 4세가 프랑스 국왕이 된 후 왕국을 평정하는 데에는 9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앙리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많은 가톨릭교도들이 그를 저버리고 탈주하는 바람에 군대는 차츰 사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망설인 끝에 1593년 칼뱅교를 버렸다.
이후 앙리의 조언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쉴리 공작 막시밀리앵 드 베튄은 국가 재정을 개편하고 경제를 안정시켰으며 따라서 나라는 번창해갔다. 그의 뒤를 이어 두 왕의 치세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것도 앙리가 토대를 놓았기 때문이다. 앙리 4세는 결코 조용히 앉아 지내거나 생각이 깊은 사람은 못 되었지만 탁월한 정치적 통찰력 덕분에 나라를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해양 활동과 식민지 확장에 관심이 많아서 사뮈엘 드 샹플렝의 캐나다 탐험을 지원했다.

목차

접기
  1. 베아른 공 시절의 앙리 4세
  2. 나바라 왕 시절의 앙리 4세
  3. 왕위계승자 시절의 앙리 4세
앙리 4세(Henri IV)
앙리 4세(Henri IV)

나바라 왕(엔리케 3세, 1572~89 재위)이었으며 부르봉가 출신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왕이 되었다.

원래는 프로테스탄트였으나 종교전쟁이 끝난 뒤 파리를 얻고 프랑스를 재통일하기 위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했다(1593). 그는 쉴리 공작 같은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에 새로운 번영을 가져왔다.

앙리 4세는 프랑스 국왕이 되었지만 왕국을 평정하는 데에는 9년이라는 세월이 걸릴 형편이었다. 앙리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많은 가톨릭교도들이 그를 저버리고 탈주하는 바람에 군대는 차츰 사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결국 파리 교외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왕위에 오른 지 몇 주일 뒤 그는 노르망디의 아르크 성이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마옌 공작 샤를 드 로렌과 싸웠다. 형 기즈 공작이 죽은 뒤 신성동맹의 우두머리가 된 마옌은 1590년 3월 14일 이브리에서 더 심한 참패를 당했다. 앙리 4세가 자신의 군대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호를 외친 곳도 이브리였다. "기수를 잃어버린 자들아 나의 하얀 깃털로 모여 들어라. 명예와 승리로 가는 길을 찾게 되리라." 프랑스 수도 시민들은 그의 오랜 포위 공격으로 극심한 기아에 허덕였지만 끝내 그는 그들의 저항을 쳐부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샤르트르를 포위 공격해 1591년 4월 10일 이 도시를 점령했다. 샤르트르를 포위하고 있을 때 앙리 4세는 가브리엘 데스트레라는 여인과 관계를 갖게 되었는데 그녀는 그가 관계한 여자들 가운데 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샤르트르를 점령한 직후 앙리 4세는 누아용을 점령했지만 루앙은 정복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없이 지루하게 계속되자 왕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오랫동안 망설인 끝에 1593년 7월 25일 프랑스 국왕들의 묘지가 있는 생드니의 바실리카에서 칼뱅교를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의 진실성을 의심했지만 그래도 군주의 개종은 신속한 결과를 초래했다.

주요 도시들, 특히 오를레앙과 리옹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해왔다. 그러나 랭스는 여전히 신성동맹에 충성을 바쳤다. 그래서 왕은 1594년 2월 27일 샤르트르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그는 개종으로 모든 반대 구실을 제거하고 3월 22일 마침내 파리에 입성했다. 그가 "파리는 정말로 미사를 드릴 만하다!"는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박수 갈채를 받으며 노트르담 성당에서 사은 찬미가 '테 데움'을 들었다.

앙리 4세(Henri IV)
앙리 4세(Henri IV)

그의 표현대로 그는 "개선 마차를 타고" 있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신성동맹에 가담한 많은 도시들이 서둘러 왕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랑은 앙리가 심한 포위 공격을 퍼부은 뒤에야 겨우 굴복했다. 교황 클레멘스 8세가 1595년 9월 17일 앙리 4세의 파문을 취소한 뒤에도 브르타뉴는 여전히 기즈 공작과 마옌 공작의 동생인 메르쾨르 공작 필리프 에마뉘엘 드 로렌의 손아귀에 남아 있었다.

신성동맹이 브르타뉴를 계속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스페인의 지원 덕분이었다. 국왕은 이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 1595년 1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6월 5일 부르고뉴의 퐁텐프랑세즈에서 앙리는 스페인 기병대를 압도적으로 무찔렀고 그 보복으로 펠리페 2세의 군대가 캉브레에 이어 칼레와 아르드르를 점령했다.

앙리는 6개월 동안 라페르를 포위 공격해 이 도시를 빼앗는 데 성공했지만 1597년 3월 11일부터 12일 밤 사이 파리는 공포에 휘말리게 되었다. 스페인이 기습 작전으로 아미앵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앙리는 "프랑스 왕에는 이제 싫증이 났다. 지금은 나바라의 왕이 되어야 할 때다!"라고 외치면서 재빨리 이 상황에 대처했다. 병력과 돈이 모두 부족했지만 그는 기적처럼 병력과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의 각료 가운데 빌루아의 영주 니콜라 드 뇌프빌은 사신에서 "왕은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줄 용기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말했다.

9월 19일 앙리는 스페인 군대를 아미앵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1598년 5월 2일에 베르뱅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조약을 체결했다(베르뱅 조약). 이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캉브레를 그대로 보유했는데 이 도시는 1677년에야 프랑스에 반환되었다.

앙리는 또한 브르타뉴의 메르쾨르 공작을 밀어낼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가브리엘 데스트레가 낳은 두 아들 가운데 맏이인 세자르 드 방돔과 프랑수아즈 드 로렌을 약혼시킴으로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메르쾨르와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그당시 세자르는 불과 4세밖에 안 된 어린애였다. 앙리의 브르타뉴 방문은 가브리엘이 딸을 출산한 낭트에서 절정에 이르렀는데 1598년 4월 13일 앙리는 이 도시의 이름을 딴 유명한 낭트 칙령에 서명했다. 낭트 칙령에 따라 양심의 자유가 선포되었고 프로테스탄트에게 수많은 예배소와 무려 100여 군데에 이르는 피난처가 마련되었다.

낭트 칙령 (Édit de Nantes)
낭트 칙령 (Édit de Nantes)

앙리 4세는 왕국을 통일하고 국내외의 평화를 이룩했으며 짧은 통치 기간이었지만 프랑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바쳤다.

그러나 그의 치적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는 정통성을 가진 후계자를 남길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적자가 없었다. 불운한 열정에 눈이 먼 앙리는 가브리엘 주위에 모여든 친구들의 부추김을 받아 하마터면 정부에 지나지 않은 가브리엘과 결혼할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가브리엘은 이중의 간통에서 태어난 아들 세자르를 성 루이의 왕관을 물려받을 후계자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세자르가 후계자가 되었다면 왕이 죽은 뒤 반드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전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가브리엘이 1599년 4월 10일에 아이를 출산하다가 죽자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앙리 4세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혼인이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 선언 덕분에 왕은 새로운 애인인 앙리에트 당트라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600년 10월 토스카나 공주인 마리 드 메디시스와 결혼할 수 있었다.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시스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시스

앙리는 왕국 통일을 위해 계속 노력했으며 사보이 공작 샤를 에마뉘엘을 굴복시키고 브레스와 뷔제를 프랑스에 할양하도록 강요했다. 새 왕비는 1601년 9월 27일 나중에 루이 13세가 된 왕세자를 낳았고 계속해서 네 아이를 더 낳았다. 앙리에트 당트라그와 자클린 드 뷔에유 및 샤를로트 데 에사르도 앙리의 자식을 여럿 낳았다.

왕국이 통일된 뒤에도 앙리 4세의 치세는 순조롭지 못했다.

한 세기가 넘게 계속된 치열한 종교 분쟁은 프랑스를 갈기갈기 찢어놓았고, 평화는 쉽게 찾아들지 않았다. 앙리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 기도가 여러 번 일어났다. 1594년 12월 장 샤텔은 단검으로 왕에게 상처를 입혔다. 샤텔은 고문을 당했고 그의 범죄는 예수회 수도사들을 왕국에서 쫓아낼 구실로 이용되었다. 앙리가 이단의 승리를 위해 위선적인 개종의 가면을 쓰고 국왕 암살 기도를 연출해냈다는 믿음이 지금도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앙리에 의해 프랑스는 다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앙리의 조언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쉴리 공작 막시밀리앵 드 베튄은 국가 재정을 개편하고 경제를 안정시켰으며 따라서 나라는 번창해갔다. 그의 뒤를 이어 두 왕의 치세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것도 앙리가 토대를 놓았기 때문이다. 앙리 4세는 결코 조용히 앉아 지내거나 생각이 깊은 사람은 못 되었지만 탁월한 정치적 통찰력 덕분에 나라를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해양 활동과 식민지 확장에 관심이 많아서 사뮈엘 드 샹플렝의 캐나다 탐험을 지원했다.

앙리의 어리석은 연애행각은 국사에 임하는 그의 지혜와 여전히 대조를 이루었다.

마침내 그는 베르뇌유 여후작이 된 약삭빠른 앙리에트 당트라그에게 싫증이 났다. 아니면 젊은 여자들에게 더 끌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55세의 나이에 프랑스 컨스터블이자 친구의 딸인 방년 15세의 샤를로트 드 몽모랑시에게 빠지고 말았다. 앙리는 샤를로트를 여자한테 별 관심이 없어 보인 사촌 소(小)콩데 공 앙리 2세와 결혼시킬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일단 결혼하자 콩데 공은 국왕이 자기 아내를 만나지 못하도록 아내를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수도인 브뤼셀로 데려갔다.

앙리 4세는 격분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앙리 4세가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를 대상으로 전쟁을 준비한 것은 이 불행한 연애사건 때문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설은 신빙성이 없다. 클레베와 윌리히의 계승 전쟁으로 그의 전쟁 준비가 어려움을 겪게 되자 앙리는 잠시 망설인 뒤 마침내 윌리히에서 제국 군대를 쫓아내기 위해 원정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이번의 라인 강 원정에 대비해 조직해 놓은 세 부대 가운데 하나인 동부군을 지휘하기 위해 떠날 날짜를 1610년 5월 19일로 정해놓고 있었다.

5월 14일 이른 오후, 그는 쉴리 공작을 문병하기 위해 마차에 올라탔다. 루브르 궁전을 떠난 마차가 비좁은 페롱네리 거리에서 교통 혼잡으로 길이 막히는 바람에, 마부는 속력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갑자기 프랑수아 라바야크라는 미치광이가 뛰쳐나와 앙리의 마차에 올라타더니 장칼로 왕을 2번이나 찔렀다. 앙리는 평생 많은 오해 속에서 살아왔지만 이 비극적인 종말은 마침내 국민의 눈을 뜨게 해준 것 같았다.

프랑스 국민들은 곧 그에게 앙리 대왕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베아른 공 시절의 앙리 4세

그는 방돔 공작 앙투안 드 부르봉과 1555년부터 나바라 여왕을 지낸 잔 달브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앙리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프랑스 카페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프랑스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국왕 앙리 2세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이미 셋이나 낳았고 4번째 아이를 곧 낳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앙리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앙리는 어린시절을 대부분 베아른에서 보냈다. 1561~67년 그는 국왕의 자녀들과 함께 살았는데 그중 마르그리트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무렵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종교적 위기가 싹트기 시작해 결국 기나긴 내전으로 이어졌다(→ 위그노). 앙리의 아버지 앙투안은 잠시 프로테스탄트와 동맹을 맺었지만 곧 편을 바꾸어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 앙리의 어머니 잔 달브레는 확고한 신앙을 지키다가 1560년 크리스마스 때에 칼뱅교를 선언했다. 앙리가 막 13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그를 베아른으로 다시 데려왔다.

지적 발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인 이때에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엄격한 원칙에 따라 키워졌으며 동시에 군사 교육도 받기 시작했다. 1567년 가을 그는 나바라 남부의 반항적인 가톨릭 무리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원정대의 이름뿐인 지휘자가 되어 이 원정을 간단히 승리로 끝맺었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3번째 종교전쟁이 일어나자, 처음 2차례의 종교전쟁 때는 중립을 지켰던 잔 달브레도 이번에는 기꺼이 참전했다. 잔 달브레는 라로셸로 가서 아들을 위그노의 지도자인 시동생 콩데 공(公) 부르봉의 루이 1세에게 맡겼다. 1569년 3월 13일 프로테스탄트들은 자르나크 근처에서 앙주 공작(나중에 앙리 3세가 됨)에게 기습 공격으로 패배당했고 콩데는 전사했다(→ 자르나크 전투). 잔 달브레는 당장 전쟁터로 달려가 아들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실제 지휘는 후에 앙리가 군사교육을 받게 될 가스파르 드 콜리니에게 맡겨졌다. 앙리와 그의 사촌인 소(小)콩데 공작 앙리는 10월 3일의 몽콩투르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도 프로테스탄트들은 다시 패배를 맛보았지만 콜리니는 앙리가 칼을 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6세의 장군이 된 앙리는 1570년 6월 26일 아르네르뒤크 근처에서 처음으로 출전해 위그노 기병대를 지휘했다(→ 아르네르뒤크 전쟁). 푸아투에서 부르고뉴 심장부에 이르는 황폐해진 지역을 오랫동안 원정하면서 얻은 경험은 그에게 평생 동안 간직할 군인 정신을 심어 주었고, 왕국에 덮친 재난을 곰곰이 생각하게 했다.

나바라 왕 시절의 앙리 4세

1570년 8월에 평화조약이 맺어졌고 프로테스탄트에게는 아주 관대한 포고령이 내렸다(→ 생제르맹 평화조약).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내전의 종식을 기대했다.

평화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카트린 왕후는 앙리 공작과 자기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결혼시키기로 했다. 원래 이 결혼은 앙리 2세가 생존해 있을 당시, 즉 앙리와 마르그리트가 어렸을 때 처음 고려된 적이 있었다. 1572년 봄까지 계속된 우여곡절 끝에 카트린과 나바라 여왕은 합의에 이르렀다. 나바라 여왕은 아들보다 먼저 파리로 떠났지만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6월 9일 호흡기 질환으로 죽었다. 그리하여 앙리는 나바라 왕이자 베아른의 군주가 되었다. 그와 마르그리트는 8월 18일 노트르담 성당의 정문 앞에서 혼인 서약을 했지만 혼인 미사에는 처가 쪽 왕족들만 참석했다.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대학살이 일어나 수천 명의 프랑스 위그노가 왕실군에게 살해당했다. 이 유혈 사태로 인해 앙리와 마르그리트의 결혼을 '피의 결혼식'이라고 불렀다. 앙리는 프로테스탄트를 포기하라는 처남 샤를 9세의 명령에 굴복했다. 하지만 그의 개종이 분명 참다운 것인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앙리는 3년 반 동안 샤를 9세와 그뒤를 이은 앙리 3세의 궁정에 볼모로 붙잡혀 있었다.

앙리는 초조한 마음을 신중하게 억제하면서 그를 억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강인한 성격을 감추었다. 교활한 카트린조차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속아 사위가 아들인 앙리 3세의 궁정에서 탈출하는 것에 은밀히 동의했다. 일단 자유의 몸이 되자 앙리는 날카로운 지성과 정치적 통찰력을 발휘해 프로테스탄트의 보호자 역할을 해냈다. 그가 지닌 가장 뛰어난 재능은 분별력이었는데, 1576년말 내전이 재발했을 때 이를 입증해 보였다.

위그노가 연패를 당하자 상황을 정확히 판단한 앙리는 교우들에게 싸움을 포기하고 1577년 9월 17일의 베르주라크 평화조약(프로테스탄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내용이지만)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딸 마르그리트를 남편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기옌으로 갔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목적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도 사이의 지속적인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네라크에서 이 문제에 대한 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앙리는 가톨릭교도가 가론 강 연안의 라레올 성을 점령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그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플뢰랑스를 기습 공략하여 전멸시킴으로써 타고난 군사 지도력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1580년 봄 그는 5일 동안 계속된 치열한 시가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카오르를 점령하고, 그 자신의 표현대로 '온통 피와 화약으로 뒤범벅이 된' 전투에서 벗어났다. 그의 소유지인 몽드마르상 시가 자신에게 반환되지 않자 1583년 야간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이 정력적인 남자는 전쟁과 정치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앙리는 영토 정복만이 아니라 낭만도 즐겼는데 1583년 여름 그는 기슈 백작 부인인 코리상드 당두앵과 연애를 시작하여 여러 해 동안 관계를 지속했다. 베아른의 고위 귀족인 기슈 백작 부인은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으로서, 수필가 미셸 드 몽테뉴는 그녀를 '위대한 코리상드'라고 예찬했다.

왕위계승자 시절의 앙리 4세

1584년 프랑스 국왕 앙리 3세의 동생인 앙주 공작 프랑수아가 죽자 그는 프랑스의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신성동맹을 결성한 호전적인 가톨릭교도들은 프로테스탄트인 그의 왕위 계승에 맹렬히 반대했고, 교황도 그를 파문시키는가 하면, 왕위 계승에 관련된 어떠한 권리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레고리우스 13세). 기즈 공작 앙리와 그의 형제들이 이끄는 신성동맹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프랑스 종교의 수호자임을 자처했지만 스페인의 지원에 점점 더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이런 외세 의존은 프랑스의 독립에 급속도로 심각한 위협을 제기했다. 그러나 앙리 3세에게는 신성동맹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감수할 힘이 없었다.

나바라 왕으로서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도움이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인색한 지원(이 지원은 약삭빠른 요구 조건과 함께 제공되었음)과 멀리 떨어져 있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지원뿐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이외에 몽테뉴처럼 계몽되고 진보적인 몇몇 가톨릭교도들이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독립이 위기에 처한 중대한 이 역사적 사건에서 앙리의 활약은 결정적이었다. 평화시에는 공무를 팽개치고 사적인 쾌락에 탐닉했지만 일단 위급한 때에는 어느 누구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그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앙리는 모든 상황의 중요성을 재빨리 파악해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겼으며 승리는 분명 그의 대담하고 재빠른 행동으로 얻어진 보상이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는 아니었지만 말이나 글만이 아니라 몸소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부하들로 하여금 스스로 행동하게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4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글과 말은 여전히 맑은 나팔 소리 같은 명쾌함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앙리는 라로셸에 있는 드넓은 군사기지 상황 안에 묶이게 되었다. 라로셸은 요새일 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저항 운동의 상징이었지만 극도로 종교적인 이 도시의 분위기도 앙리의 애정행각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1587년 가을, 프랑스 국왕과 나바라 왕 사이의 전투가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임박해지자 갈수록 신성동맹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 앙리 3세는 또다른 매제인 주아외즈 공작 안에게 군대 지휘를 맡겼다. 전투는 10월 20일 보르도에서 북동쪽으로 약 48㎞쯤 떨어진 쿠트라 교외에서 벌어졌다. 주아외즈와 그의 부대는 전멸했다. 이 사건은 군사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치적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콩데 공의 이복 형제인 2명의 젊은 가톨릭교도가 나바라 왕과 힘을 합쳐 가톨릭교도와 싸웠기 때문이다(→ 쿠트라 전투).

종교적 갈등으로 처음 시작된 분쟁이,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 사이의 딸을 신성동맹측이 프랑스의 차기 통치자로 받아들인 뒤로는 왕권을 둘러싼 싸움이자 민족간의 싸움이 되었다(→ 3앙리 전투). 앙리 3세는 프랑스의 미래를 고려할 때 이런 상황이 지니는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망설인 뒤 기즈 공작을 암살하게 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앙리 3세는 나바라 왕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고 타협은 1589년 4월 30일에 이루어졌다.

앙리 3세와 나바라의 연합군은 7월 30일 파리를 포위 공격했지만, 8월 1일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앙리 3세가 생클루의 사령부 안에서 칼에 찔리고 말았다. 왕실 법에 따라 그는 부르봉 왕가의 수장이자 혈연상 왕위 계승서열 1위인 앙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한 뒤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