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브르타뉴

다른 표기 언어 Bretagne
요약 테이블
위치 프랑스 북서부의 반도부
인구 3,429,882명 (2023년 추계)
면적 27,209㎢
대륙 유럽
국가 프랑스

요약 프랑스 북서부의 일레빌렌·모르비앙·코트뒤 노르·피니스테르 주들을 포함하는 계획지구. 역사상의 브르타뉴 지방과 대체로 일치하며 중심지는 렌이다. 육류용 돼지와 닭을 사육해 다른 프랑스 지역으로 공급한다.

목차

접기
  1. 역사
  2. 지리·인구·경제
    1. 지리
    2. 인구
    3. 경제
  3. 전통문화

역사상의 브르타뉴 지방과 대체로 일치하며 중심지는 렌이다.

북쪽으로 망슈 주, 동쪽으로 마옌·멘에루아르 주, 남쪽으로 루아르아틀랑티크 주와 맞닿아 있다. 남서쪽으로 비스케이 만, 북쪽으로는 영국 해협이 있다.

브르타뉴(Bretagne)
브르타뉴(Bretagne)

역사

브르타뉴의 역사는 이곳의 고립적 위치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켈트족은 2차례에 걸쳐 이 지방을 피난처로 삼았다.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브르타뉴 주민인 켈트계 부족은 그들보다 먼저 이곳에 거주하며 멘히르·고인돌·환상열석 등의 유물을 남긴 종족과 섞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BC 5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복할 당시 아르모리카라고 알려졌던 이 지방의 주민들은 BC 52~51년 카이사르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AD 5~6세기에 로마인들이 물러간 후 아일랜드와 브리타니아로부터 많은 수의 켈트족이 옮겨왔다. 이들 가운데 끼어 있던 켈트족 전도단들이 점차 전지역을 개종시킨 후 도시와 마을에 생말로·생브리외·생튀그뒤알·생폴드레옹 같은 그들의 이름을 붙였다.

켈트족이 살던 브르타뉴는 많은 소영주들에게 분할되었고 메로빙거 왕조와 초기 카롤링거 왕조는 이들에게 권한을 행사하고자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9세기 민족영웅인 놈노에(Nomenoë)가 브르타뉴 지방에 대한 프랑스 왕 샤를 2세의 지배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키고 낭트 및 렌을 점령했다. 이로써 브르타뉴의 영토가 확정되고 켈트족과 프랑크족의 영토가 혼합됨으로써 복잡한 구성을 갖게 되었다.

놈노에(Nomenoë)
놈노에(Nomenoë)

명목상으로는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지만 실제로는 독립되어 있던 놈노에의 후계자들은 브르타뉴인들을 단결시켜 바이킹의 침략에 저항했다. 이들은 바이킹을 멀리 쫓아버려 그들이 센 강가에 건설한 노르망디 공작령에 준하는 새로운 노르망디 공작령을 루아르 강에 세우지 못하도록 막았다.

10세기 렌의 코낭은 브르타뉴에서 최고 유력자가 되었고, 그의 아들 조프루아는 공작 칭호를 얻었다.

브르타뉴의 봉건영주들을 진압하기 위해 숱한 전쟁을 벌인 후 코낭의 가문은 혈통이 끊겼다. 이 전투들로 인해 브르타뉴 공작들은 이웃하고 있는 노르망디 공작가, 앙주 백작가, 그리고 잉글랜드 왕과 접촉하게 되었다. 브르타뉴인들은 노르망디의 공작 윌리엄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이후 윌리엄과 그의 후계자들이 브르타뉴를 정복하거나 종주권을 행사하려 하자 브르타뉴인들은 잉글랜드 왕실에 대항해 싸웠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와 반항적인 귀족들에게 심한 압박을 받은 코낭 4세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에게 도움을 청했으며 자기 딸 콘스탄스를 헨리의 아들 제프리와 결혼시킴으로써 브르타뉴 공작령은 제프리가 계승하게 되었다.

브르타뉴는 거의 앙주(플랜태저넷) 제국의 속령이 될 지경에 이르렀으나 제프리의 후계자 아르튀르 1세가 잉글랜드 왕 존에게 살해당하고 아르튀르의 누이 알릭스가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 2세의 주선으로 카페 가문의 공(公)인 드뢰의 피에르(피에르 모클레르)와 결혼함에 따라 프랑스 쪽으로 넘어갔다.

이후 브르타뉴는 장 3세가 후계자 없이 죽을 때까지(1341) 렌에 상주(常住)하던 프랑스 공작들의 지배를 받았다. 장 3세의 죽음으로 직계가 아닌 두 후계자, 즉 잉글랜드의 지지를 받는 몽포르의 존파(派)와 프랑스 필리프 6세의 조카인 블루아의 샤를을 지지하는 당파들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고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다시 브르타뉴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다.

샤를이 오레에서 패한 후 죽음으로써(1364) 브르타뉴 공작령은 몽포르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몽포르 가문의 공작들(장 4세, 장 5세, 피에르 2세)은 100년전쟁 동안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브르타뉴 공국이 지리적으로 중간에 위치한 것을 의식해 중립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콩스타블인 리슈몽 백작은 그의 조카 피에르 2세의 뒤를 이어 1457년 아르튀르 3세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는데 그는 이전에 영국에 대항해 프랑스 왕실을 크게 도운 바 있었다. 1458년 리슈몽의 또다른 조카인 프랑수아 2세(1488 죽음)가 그의 뒤를 이었고, 나중에는 그의 딸 안이 브르타뉴를 상속했다.

안의 첫번째 결혼(샤를 8세)과 2번째 결혼(루이 12세)으로 브르타뉴는 결정적으로 프랑스 왕국에 통합되었다.

안의 딸 클로드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왕비가 되었으며, 1532년 프랑수아 1세의 치세하에서 브르타뉴 지방의 자유권을 보장하면서 프랑스에 결합시킨다는 내용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브르타뉴의 지방자치는 계속 유지되었고 이같은 속지적 애국주의는 중앙집권을 이루려는 부르봉 왕조의 시도에 저항하는 힘이 되었다. 브르타뉴의 일반 민중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종교전쟁 동안 이곳에서는 위그노교도에 대항해 수차례 싸움이 벌어졌으며 많은 스페인인 유격대들이 주둔했다.

루이 13세 재위 초기에 브르타뉴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으나 오래 가지 않았고, 그뒤 이 지방은 장기간 평화를 누렸다.

1789년 11월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지방의 파를르망 귀족정치 체제에 대한 반동으로 브르타뉴에서는 연방(federation) 운동이 출현했다. 그러나 1792~99년 브르타뉴의 슈앙 형제는 제1공화국의 반종교적인 움직임에 맞서 싸웠다. 19세기말부터 브르타뉴의 여론은 서서히 보수적인 공화주의로 바뀌었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분리주의자들이 가끔 시위를 벌이고 드물게 폭력사태(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분리주의자 운동의 양상과 비슷함)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브르타뉴인의 대부분은 프랑스에 충성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리·인구·경제

지리
브르타뉴 지리
브르타뉴 지리

브르타뉴는 아르모리캥 대산괴의 오래된 고지에 속하며, 지대가 낮아 평균고도는 104m이다.

북쪽에는 아르레 산맥이 있어 고도가 383m에 달한다. 침식작용 때문에 북쪽지역에 날카로운 협곡들이 형성되었고, 해안선은 깊이 만입되어 있다. 해양성기후가 지배적이다.

인구

북대서양 어장에서 프랑스 해역이 감소하고, 20세기초의 프랑스 타지역에서처럼 농촌 인구가 빠져나가면서 1911~46년에 인구가 11% 이상이나 감소했다. 그러나 그후로는 공업 및 서비스 부문의 발전에 힘입어 프랑스 전체 인구증가율을 웃도는 수준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인구증가는 브르타뉴 전지역에 고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서, 해안지역이 내륙 오지보다 증가율이 높다. 타지역으로 떠나는 주민 때문에 농촌인구가 감소하고 있는데, 농촌의 출생률은 프랑스 평균치보다 낮다.

경제
브르타뉴 경제
브르타뉴 경제

농촌을 떠나는 이주현상 때문에 많은 농장들이 통합되었다. 전통적인 곡물재배를 대신해 축산업이 주산업으로 되었으나 사료작물 재배는 증가하고 있다. 육류용 돼지와 닭을 사육해 다른 프랑스 지역으로 공급한다. 브르타뉴는 우유의 주요 생산지이다. 어업은 계속된 주요산업이며, 이 지방은 프랑스 전체 상륙장(上陸場)의 약 2/5를 차지하고 있다. 에너지와 원자재 대부분을 수입해야 하기 때문에 공업은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상태이다.

코트뒤노르의 플뢰뫼르보두는 주요한 우주원격통신산업의 중심지이며 브레스트와 렌에 관련산업 발달을 촉진시켰다. 중요한 산업인 관광업은 해안도시와 마을들에 집중되어 있다.

전통문화

브르타뉴인들은 직업과 전통주의를 조화시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원으로 유명해졌으며, 오랫동안 프랑스 해군의 많은 승무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가톨릭이 널리 퍼져 있으며, 특히 로크로낭·조슬랭·생트안도레의 성지순례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브르타뉴는 다른 어떤 지방보다도 옛 사회구조를 잘 보존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대가족제에 가부장권을 존중하고, 시골 귀족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한다. 브르타뉴어는 모르비앙·피니스테르·코트뒤노르의 일부 지역에서 흔히 사용되며, 19세기 중엽부터 문학이 상당한 활기를 띠고 있다. → 브르타뉴 문학, 브르타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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