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

다른 표기 언어 Ottoman Empire

요약 오스만은 1300~1481년에 아나톨리아 전역을 정복하였고 1346년 유럽에 진출하여 1389년 코소보, 카이로를 지배했고 1444년 십자군을 패퇴시키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했고, 알바니아·크리미아 등을 합병했다.
오스만인들은 개종시킨 젊은이들을 평생 복무시킨 데브시르메 제도를 활용해 지배계급에 절대 복종을 요구하고, 권력의 분산을 막았다.
1516~1595년 까지 헝가리, 트리폴리를 병합하고 지중해에서 제해권을 확립하는 등 영토 확장이 계속되었지만 쉴레이만 이후 행정적·사회적 쇠퇴가 서서히 진행되었다.
18세기 이후 쇠퇴는 가속화하여 1912~13년의 발칸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1922년 근대 튀르키예가 건립되었다.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

비시니아의 아미르였던 오스만(아랍어로는 '⁽Uthmān')의 이름을 딴 명칭이다.

그는 1300년경 인근 지역을 정복하면서 왕조를 창건했다. 오스만 제국사의 제1기인 1300~1481년은 전쟁과 동맹, 그리고 영토의 현장 매입에 의한 거의 끊임없는 팽창의 시기였다. 오스만과 그의 계승자들인 오르한(1324~60 재위), 무라드 1세(1360~89), 바예지드 1세(1389~1402) 아래 아나톨리아의 거의 전역이 정복되었다.

동로마 제국 내의 여러 분파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1346년경 유럽에 발판을 마련했다.

즉 갈리폴리로부터 트라키아·마케도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 등으로 진출했다. 1389년 코소보에서 무라드는 발칸 동맹군을 무찌르고 이 지역에 대한 오스만의 지배를 확립했다. 바예지드는 오스만의 지배를 더욱 강화했고, 카이로의 칼리프에게서 술탄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오스만 세력의 급속한 성장은 타타르의 지도자 티무르의 주의를 끌게 되었고, 그는 인도를 정복하다가 서쪽 측면을 지키기 위해 돌아왔다.

그는 1402년 앙카라에서 오스만 군대를 무찔렀다(→ 색인:코소보 전투). 티무르는 오자마자 곧 떠나갔지만, 여러 해가 지나서야 오스만인들은 그들의 정복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바예지드의 네 아들 가운데 메메드(무하마드) 1세는 1413년에 술탄으로 부상했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인 무라드 2세(1421~51), 메메드 2세(1451~81) 아래서 제국은 도나우 강 이남의 유럽에 대한 지배를 거듭 주장하고, 1444년 바르나에서 십자군을 패퇴시켰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었고, 그뒤 몇 해 안에 모레아·트레비존드·보스니아·알바니아·크리미아 및 다른 지역들이 정복되거나 합병되었다. 오스만인들이 발전시킨 많은 독특한 군사와 행정 제도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 중의 하나가 발칸 지역 출신 그리스도교 젊은이들을 징집해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 평생 복무시킨 데브시르메 제도였다.

데브시르메 제도로 충원된 군대는 술탄을 호위하는 보병대인 정예병단이었는데 그 이름은 예니체리라 했다. 메메드 2세는 정부와 군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튀르크족이든 발칸족이든, 이슬람교도이든 비이슬람교도이든 간에 술탄의 개인 노예의 지위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제도를 발전시켰다. 그는 이러한 조처로 전 지배계급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하고, 권력의 분산을 확실하게 막기를 희망했다.

셀림 1세(1512~20) 때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 재개되었다.

1516~17년 맘루크인들을 격퇴함으로써, 그는 일격에 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알제리 등을 통합해 제국의 영토를 2배로 늘렸다. 그의 아들 쉴레이만 1세(1520~66)의 통치기간은 오스만의 힘과 위엄에 있어 황금기였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헝가리를 빼앗고, 트리폴리를 병합하고 남동쪽으로 제국을 확장하여 메소포타미아에서 페르시아 만에 이르렀고, 오스만 해군은 동부 지중해에서 제해권을 확립했다.

쉴레이만의 통치가 끝나자 오스만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무라드 3세(1574~95) 때 카프카스를 정복하고 이란에서 아제르바이잔을 빼앗는 등 한동안 영토 확장이 계속되었지만 행정적·사회적 쇠퇴가 서서히 진행되었다. 쉴레이만 이후 제국의 쇠퇴는 그의 뒤를 이었던 술탄들의 무능함, 데브시르메 계급의 세력 신장, 그로 인한 지배계급 내부의 긴장, 오스만 산업의 침체, 항해술 발달에의 오스만 지배 무역로의 쇠퇴, 급작스런 인구 팽창과 그에 따른 도시 중심지의 쇠퇴 등이 그 원인이었다.

17세기에 개혁은 너무 미약하고 협소해 쇠퇴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반면 이 시기에 유럽에서 흥기한 강력한 민족국가들은 동맹을 맺어 유럽 대륙에서 오스만을 몰아내고자 했다.

18세기에 쇠퇴는 가속화하여 농촌행정조직이 소규모의 봉건국가들로 해체되어가고, 식량조달의 혼란과 광범위한 기근으로 도시에서는 불안이 증대되었다. 유럽 번영의 기초가 되었던 기술혁신은 거의 오스만 제국으로 이전되지 않았다. 18세기초에 몇몇 귀족들이 서구풍을 받아들였고(튤립 시대), 18세기 후반에 셀림 2세는 정부 조직을 근대화하려 했다.

그러나 1807년 무스타파 4세가 이끈 반동적 반란에 의해 오스만 제국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1808년 마무드 2세가 즉위했을 때 오스만 제국은 절망적인 상태였다. 제국이 영국·러시아 양국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지방 정부가 공공연하게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다음 몇 십 년 동안 마무드 2세는 군대를 근대화하고, 정부를 재조직하여 어느 정도 질서를 되찾았으나 제국의 국경은 계속 줄어들었다.

마무드의 아들들인 아브뒬메지드 1세와 아브뒬하지즈는 '탄지마트'라고 하는 일련의 자유주의적이고 근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는데, 서방 세계에서는 이것을 대체로 유럽 국가들과 우호관계를 증진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았다. 그 개혁 중에는 최초의 종합교육제도와 상법·해양법·형법전의 서구화 등이 있었다.

권력의 집중으로 황제권에 대한 모든 방해물이 제거되었지만, 1876년 아브뒬하미드 2세는 다른 어떤 이슬람 국가들보다 먼저 헌법을 두는 데 동의했다. 2년 뒤 산스테파노 조약과 베를린 회의의 협정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루마니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불가리아·키프로스 그리고 다른 영토들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브뒬하미드는 유럽인들에게, 튀르크인들은 자기들의 국경 내에서 제국을 보존하면서 평화를 유지할 것임을 환기시킴으로써 19세기의 남은 기간 동안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 말년은 반란들로 점철되었는데, 특히 1908년 청년 튀르크당 반란이 유명했다. 1912~13년의 발칸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파국적인 패배와 바로 이어졌던 혁명으로, 36대이자 마지막 오스만 제국 황제인 메메드 6세 와히데딘이 1922년 권좌에서 밀려나고 근대 튀르키예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