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빙턴

배빙턴

다른 표기 언어 Anthony Babington
요약 테이블
출생 1561. 10, 잉글랜드 더비셔 데식
사망 1586. 9. 20,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배빙턴 음모'의 주모자.

엘리자베스 1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엘리자베스가 감금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여왕인 가톨릭교도 메리 스튜어트를 잉글랜드 왕으로 추대하려다가 실패했다.

더비셔 주의 헨리 배빙턴의 아들인 그는 남몰래 가톨릭교도로 양육되었다. 어린시절 셰필드에서 메리 스튜어트의 감시자인 슈루즈버리 백작의 시동으로 일하면서 일찍부터 메리 스튜어트에게 열렬한 충성심을 느꼈다. 1580년 런던으로 가서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에서 일하는 한편, 예수회 선교사를 후원하는 비밀 결사에 가담했다. 가톨릭 성직자인 에드먼드 캠피언이 처형된 뒤 1582년 더비셔로 돌아갔다가 해외로 나갔다. 그는 파리에서 메리의 지지자들과 손을 잡게 되었는데 이들은 스페인의 도움을 얻어 메리를 석방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잉글랜드로 돌아갈 때 메리 스튜어트에게 보내는 밀서를 맡았다.

1586년 5월에 성직자인 존 발라드의 사주로 음모를 꾸몄는데 이 음모는 그의 이름을 따서 보통 '배빙턴 음모'라 불렸다. 정부 전복을 목표로 삼았던 이 음모에는 많은 로마 가톨릭교도가 가담했고 전국에 걸쳐 하부 조직을 갖고 있었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여왕 암살에 성공하면 당장 원정대를 보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배빙턴은 메리에게 그의 계획을 설명하는 편지를 썼지만 그 편지와 메리의 답장은 엘리자베스의 신하인 프랜시스 월싱엄 경의 밀정에게 가로채이고 말았다. 8월 4일에 붙잡힌 존 발라드는 심한 고문 끝에 동지들을 배신했다.

배빙턴은 해외여행 허가증을 신청해놓고 있었으며, 이 여행의 표면적인 목적은 해외 망명자들을 염탐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외국 원정대를 조직하고 자신의 신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행 허가증이 좀처럼 나오지 않자 그는 월싱엄에게 위험한 음모를 폭로하겠다고 제의했지만 월싱엄 경은 아무 응답도 보내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항구는 완전히 봉쇄되었다. 그 직후 배빙턴은 월싱엄 경의 하인들과 어울리다가 자신에 관한 월싱엄 경의 비망록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당장 세인트존스우드로 달아나 변장한 다음, 해로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 해로에서 한 가톨릭 개종자의 도움으로 숨어있다가 8월말경 은신처가 발각되어 런던탑에 갇혔다.

9월 13~14일에 그는 발라드 및 5명의 동지와 함께 특별위원회의 재판을 받았다. 그는 죄를 인정했지만, 모든 책임을 발라드에게 전가하려고 애썼다. 피고들은 모두 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9월 19일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자비를 간청하는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사면의 대가로 1,000파운드의 사례금을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이튿날 링컨스인필즈에서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메리 스튜어트도 1587년 2월 8일에 사형당했다.

'배빙턴 음모'의 역사적 의미는 메리 스튜어트가 음모에 관련했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메리가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 음모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명백한 문서는 메리가 배빙턴에게 보낸 마지막 답장의 추신뿐이다. 메리가 정말로 이 추신을 썼는지는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 있지만, 메리가 배빙턴과 교환한 편지의 전체적인 취지와 메리가 처해 있던 상황을 고려하면 메리의 공모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