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달

그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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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19(?), 잉글랜드 컴벌랜드 세인트비스
사망 1583. 7. 6, 서리 크로이든
국적 영국

요약 영국 켄터베리 대주교.

그린달(Edmund Grindal)
그린달(Edmund Grindal)

청교도 성향을 지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다.

케임브리지대학의 맥덜린 칼리지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1551년 궁정 사제가 되고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의 성직록(聖職祿)을 받게 되었으며 메리 1세 때는 종교에 관한 외교 임무 수행차 유럽 대륙에 갔다.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이듬해에 런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교회 밖에서의 성직자 복장 규정, 성체용 빵 사용 규정, 엘리자베스 시대의 기도서에 있는 예배규정 등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교직 수락을 망설였다. 그는 피터 마터에게 조언을 청했는데, 피터 마터는 영국 교회 내부의 가톨릭 잔재를 없애자며 임명을 수락하도록 권유했다. 런던 주교가 된 그는 중백의(中白衣:소매가 넓은 흰 성직자복) 착용 의무화를 원하는 대주교 매튜 파커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주교에게 골칫거리가 되었다.

1570년 요크 대주교가 되어 기도서와 교회 감독제의 폐지를 주장하는 토머스 카트라이트와 장로교파에 강력히 반대했다. 1576년 그는 온건한 청교도와 새로 등장하는 혁명세력을 갈라놓을 수 있으리라 기대되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대주교가 되자 악습에 대한 온건한 개혁안을 몇 가지 제시했는데, 그것은 10년 전에 나왔더라면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성격의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성직자들이 상호계발과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과 관련해서 엘리자베스 여왕과 충돌했다. 그는 그 모임을 관리하면서 계속 유지하려고 했으나 여왕은 성직자 모임을 막으려 했다. 그는 항의서를 제출해 교회문제에 대해 여왕이 가지는 권한의 한계를 지적하고 성직자들의 권한을 존중해줄 것을 거스르는 어투로 여왕에게 권고했다. 여왕은 그의 대주교 직권을 정지시켰으나 논란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