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서머싯

다른 표기 언어 Edward Seymour, 1st duke of Somerset Baron Seymour of Hache
요약 테이블
출생 1500/06경
사망 1552. 1. 22,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잉글랜드의 귀족.
별칭은 The Protector. Sir Edward Seymour(1523~36), Viscount Beauchamp of Hache(1536~37), Earl of Hertford(1537~47)라고도 함.

에드워드 6세(1547~53 재위)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을 때 섭정을 맡았다. 학자들은 그의 개인적 자질과 동기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정책의 실패를 이유로 그를 정치적 안목이 결여된 인물로 비판하고 있다.

여동생 제인 시모어가 1536년 헨리 8세와 결혼한 후 그는 왕실의 총애를 입어 급속히 출세가도를 달렸다.

1537년 하트퍼드 백작이 되었으며 1542년에는 해군장관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1544년 스코틀랜드 침공 때 잉글랜드군을 지휘했으며 에든버러를 함락시켰다. 1년 후에는 프랑스군과 벌인 불로뉴 전투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헨리 8세가 죽은(1547. 1. 28) 뒤, 9세의 어린 에드워드를 위해 국정을 운영하도록 왕이 생전에 지명한 섭정위원회에 의해 섭정에 임명되었다. 곧 서머싯 공작이 되었으며(1547. 2. 16) 이후 2년 반 동안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했다. 당시 그의 최대 정적은 워릭 백작 존 더들리였다.

서머싯은 스코틀랜드인들을 설득해 자발적으로 잉글랜드와 연합하도록 노력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신의 호소가 거절당하자 스코틀랜드를 침공, 핀키 전투(1547. 9. 10)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멸함으로써 화해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국내문제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온건하게 추진했다. 국왕의 교회 지배권에 대한 공격 행위를 반역죄로 규정했던 헨리 8세의 이단법률을 폐지했으며 1549년 신앙통일법을 통해 〈성공회 공동 기도서 Book of Common Prayer〉를 유포함으로써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타협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를 비롯한 여러 온건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적대감정이 들끓어 1549년 잉글랜드 서부에서 가톨릭 반란이 발생했다.

그는 인클로저 운동을 금지함으로써 가난한 농민들을 지원하고자 했으나 이로 말미암아 몰락을 자초했다.

인클로저 운동은 토지를 보유한 유산계층이 경작 가능한 농지를 목초지로 사용하기 위해 농토를 전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토지소유주들은 서머싯의 노력을 좌절시켰고 절망한 농민들은 로버트 켓의 지도로 노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549년 10월 서머싯은 워릭 백작과 유산 계층의 동맹에 의해 모든 권력을 잃고 투옥당했다. 이 동맹이 와해되자 서머싯은 1550년 2월 풀려나 정적들과 화해한 듯 보였다.그러나 1551년 10월 노섬벌랜드 공작(당시 워릭의 칭호)은 반역혐의를 꾸며대 그를 다시 투옥시켰으며 4개월 후 서머싯은 처형당했다. A.F. 폴러드가 쓴 전기 〈섭정 서머싯 치하의 잉글랜드 England under Protector Somerset〉(1900)는 그를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M.L.부시가 쓴 〈섭정 서머싯의 정책 The Government Policy of Protector Somerset〉(1975)은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