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함대

무적함대

다른 표기 언어 Spanish Armada , 無敵艦隊

요약 펠리페 2세는 영국이 해상에서 스페인에 피해를 입히고 네덜란드를 원조하자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선박 130척과 선원 8,000명, 병사 1만 9,000명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함대를 만들었다. 1588년 5월 무적함대는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지휘 하에 리스본을 출항했다. 찰스 하워드경이 지휘한 영국 함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선박의 수효도 많았고 대규모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8월 6일 무적함대는 프랑스의 칼레 인근에 정박했다. 기습을 노리던 영국군은 8월 7~8일 자정 무렵 화염공격을 감행했고 심각한 타격을 입은 스페인은 본국으로 귀환했다. 60척만이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1만 5,000여 명이 사망했다.
무적함대의 참패는 유럽 최강인 스페인의 쇠퇴와 영국이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는 전조가 되었다.

무적함대
무적함대

무적함대의 패배는 해상전투 전술의 혁명을 기록한 사건이었으며, 스페인의 쇠퇴와 영국이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는 전조가 되었다.

영국이 가톨릭으로 복귀하도록 획책하고 있던 펠리페 2세는 영국 해적들이 계속 스페인에 피해를 입히자 분개하고 있었다. 1585년 넌서치 조약으로 영국이 플랑드르 지방의 네덜란드 반군을 원조하기 시작하고 1585~86년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에 의해 카리브 해 무역이 타격을 입게 되자 펠리페 2세는 영국을 직접 침공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네덜란드의 섭정인 파르마 공작 휘하의 노련한 병사 3만 명을 주력 침공군으로 하고 이들 주력군이 플랑드르로부터 영국 남동부에 상륙할 수 있도록 도버 해협을 확보하기 위해 본토에서 충분한 해군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2년에 가까운 준비작업과 오랜 지체기간이 끝난 후 1588년 5월 무적함대는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지휘 하에 리스본을 출항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스페인에서 가장 명망있던 제독인 산타 크루스 후작이 그해 2월 사망함으로써 그를 대신해 함대의 지휘를 맡은 인물이었다.

그는 과단성과 재능을 갖춘 노련한 행정가였으나 상대적으로 해양에서의 경험은 취약한 편이었다. 스페인 함대는 130척의 선박에 약 8,000명의 선원, 그리고 1만 9,000명의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가운데 약 40척은 전함이며 나머지는 대개 수송선과 소형선박이었다. 스페인측은 자신들의 선박 가운데 최상의 것조차 영국 선박보다 느리며 중평사포의 성능도 뒤떨어진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영국군과 싸울 경우 상대편 전함에 올라타 상대를 무찌를 수 있는 역량을 믿고 있었으며 그후 영국군보다 우세한 스페인 보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영국 함대는 에핑엄의 하워드 남작 2세인 찰스 하워드가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는 스페인의 메디나 시도니아에 비해 경험은 많지 않았으나 실전면에서는 좀더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부사령관은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었다.

영국 함대는 때로 거의 200척에 이르는 선박을 보유하기도 했으나 도버 해협에서 잇따라 벌어지는 대부분의 해전에서는 그 수효가 100척이 채 못 되었다. 영국측이 보유한 것 중 가장 규모가 큰 선박은 스페인의 것과 규모가 거의 같았다. 영국군은 대포에 크게 의존했으며 함정에는 적은 수의 병사만을 승선시켰으나 스페인 선박보다 수효도 많고 규모도 큰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민첩하고 조종하기 쉬운 선박에다 이같은 대포들을 갖춘 영국군은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페인 함대에 포격을 가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강풍이 불어닥치자 스페인 무적함대는 재정비를 위해 라코루냐(스페인 북부)항으로 회항했으며 7월에 재출항했다.

이 함대는 7월 29일(구력 7. 19) 콘월의 리저드포인트 인근에서 영국군에 의해 처음으로 목격되었다. 그당시 플리머스에 머물고 있던 영국 함대 대부분은 바람을 등지고 있었으나 노련한 조종기술 덕분에 적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으며(서풍을 이용해 무적함대 서쪽에) 전술적인 면에서 선제권을 쥐게 되었다. 3차례의 접전(7. 31[구력 7. 21] 플리머스 인근, 8. 2[구력 7. 23] 포틀랜드빌 인근 해상, 8. 4[구력 7. 25] 와이트 섬 근처)에서 영국측은 먼거리를 유지한 채 스페인 함대를 괴롭혔으며 접근전으로 끌어들이려는 스페인측의 모든 시도를 손쉽게 피해나갔다.

그러나 영국군도 스페인 진영에 그리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는 없었다. 8월 6일(구력 7. 27) 무적함대는 도버 해협에 도달했으며 프랑스의 칼레 인근의 노출된 장소에 정박했다. 영국 함대 역시 여전히 바람을 안고(무적함대의 서쪽편에서) 정박했으며 도버 해협과 아일랜드 해를 지키던 소함대와 합류해 병력을 늘렸다. 같은 날 무적함대의 진군 소식이 플랑드르에 있는 파르마 공작에게 전해졌다.

그는 즉시 휘하 병력의 함대 승선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으나 그 과정이 6일이나 소요되었다. 게다가 무적함대는 기다리는 동안 머물 수 있는 안전한 항구를 확보하지 못했으며 연안의 얕은 여울을 지나오기로 한 파르마 공작을 호위할 만한 수단도 없었는데 당시 네덜란드와 영국의 군함들은 연안지역을 순항하면서 스페인측 선박에 대한 기습을 노리고 있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스페인군의 이러한 결점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8월 7~8일(구력 7. 28~29) 자정 무렵 영국군은 격랑 속에서 스페인 함대를 향해 8척의 화공선(火攻船)을 발진시켜 스페인 함대가 화염공격을 피하기 위해 닻줄을 끊고 달아나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 함대의 대열은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8일 새벽의 공격으로 그레이브라인 인근 해상에 있던 스페인 선박들이 흩어지면서 결정적인 전투가 이어졌다. 영국 함대는 이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만한 거리로 다가갔으며 대체로 소화기에 의한 저항만을 받았다. 스페인 함대의 중포(重砲)는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포수(砲手)는 포탄을 재장전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스페인측은 제대로 공격해보지도 못한 채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사상자가 속출했다. 3척의 스페인 선박이 침몰하거나 해안기슭으로 밀려났으며 나머지는 크게 파손되었다. 한편 영국군은 탄약부족으로 공격을 중단해야 했으며 일정거리를 두면서 스페인 함대를 추격했다. 9일 아침 서풍을 만난 스페인 선박들이 젤란트의 해변가로 떠내려갔으나 막판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북쪽으로 안전한 항로를 찾을 수 있었다.

서풍의 영향과 영국 함대의 위력에 눌려 무적함대는 파르마 공작의 병력과 재합류할 수 없었으며 스코틀랜드의 북단을 돌아 스페인으로 귀환하는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무적함대가 스코틀랜드 포스 강 하구를 지날 당시 영국함대는 보급물자를 구하러 귀환한 상태였으며 더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가을철 북대서양의 세찬 바람 속에서의 오랜 항해는 귀국길에 오른 많은 스페인 선박에 치명적인 피해를 안겨주었다.

해전에서 당한 피해와 악천후에 따른 재해, 물과 식량의 부족, 항해기법상의 실수 등으로 일부 스페인 선박들은 공해상에서 침몰했으며 다른 선박들은 난파한 채 아일랜드 서해안에 기항해야 했다. 단지 60척만이 스페인으로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들 중 다수도 크게 파손되어 일대 수리가 필요했으며 1만 5,000여 명이 사망했다. 영국측은 수백 명 혹은 수천 명 정도가 부상당했으나 작전중 입은 인적·물적 피해상황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경미한 것이었다.

무적함대의 패배로 영국은 침략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네덜란드는 소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반면 당대 유럽 최강의 스페인은 그 위신에 일대 타격을 입었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무적함대와의 전투는 항해중에 대포를 동원해서 싸운 최초의 주요한 해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이후 약 250년 동안 대포로 무장한 군함이 해양을 지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