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데카르트

다른 표기 언어 René Descartes 동의어 레나투스 카르테시우스, Renatus Cartes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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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96. 3. 31, 프랑스 투렌 라에
사망 1650. 2. 11, 스톡홀름
국적 프랑스

요약 스콜라 학파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처음 반대한 사람으로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모든 형태의 지식을 방법적으로 의심하고 나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직관이 확실한 지식임을 발견했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 체계는 본유관념으로부터 이성에 의해 도출된다는 점에서 직관주의적이나, 물리학과 생리학은 감각적 지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경험주의적이다.
그는 철학 뿐 아니라 인간의 생리현상과 혈액순환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국가·가족 등 사회집단의 일원일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 자신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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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장기
  2. 주요저서
  3. 말년
데카르트(René Descartes)
데카르트(René Descartes)

스콜라 학파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처음 반대한 사람으로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모든 형태의 지식을 방법적으로 의심하고 나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직관이 확실한 지식임을 발견했다. 사유를 본질로 하는 정신과 연장(延長)을 본질로 하는 물질을 구분함으로써 이원론적 체계를 펼쳤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 체계는 본유관념으로부터 이성에 의해 도출된다는 점에서 직관주의적이나, 물리학과 생리학은 감각적 지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경험주의적이다.

데카르트의 목표는 자연에 정통하는 것이었다.

〈세계·광학·기상학·지리학〉에서는 지식 나무의 줄기에 대한 이해를 제공했고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서는 그 뿌리를 해명한 뒤, 역사·의학·도덕 등 지식의 가지를 연구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역학은 의학이나 생리학의 기초이고 의학 또는 생리학은 도덕심리학의 기초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모든 물체가 역학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라고 믿었다(기계론). 생리학을 연구하면서 동물의 육체를 해부하여 각 부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였고, 동물은 영혼을 갖지 않기 때문에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 혈액순환에 대해서도 기술했으나, 심장의 열기가 혈액을 팽창·분출시킨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심혈관계). 〈인간, 태아발생론 L'Homme, et un Traité de la formation du foetus〉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1641년 데카르트는 피코와 자크 발레 데바로의 방문을 받고 이 두 사람을 주인공(자신은 조연)으로 대화록 〈진리 탐색〉을 썼으며, 1644년에는 자신의 물리학과 형이상학을 집성하여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를 출판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과 육체의 통일이며, 정신과 육체는 송과선(松果腺)에서 상호작용하는 서로 다른 두 실체이다(심신이원론). 송과선은 두뇌의 기관으로는 쌍을 이루지 않은 유일한 기관이므로 정신과 육체의 합일점임에 틀림없다고 데카르트는 추론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감각기관에 미치는 작용 하나하나가 신경관을 통해 미세한 물질을 송과선에 전달하여 독특한 진동을 일으키고, 이 진동이 감정과 격정을 유발하여 육체의 작용을 야기한다(자극반응학습). 예를 들어 어떤 병사가 적을 보고 두려움을 느껴 도망치는 경우처럼, 외부자극에서 시작하는 반사궁(反射弓)은 우선 내부반응을 거친 뒤 육체의 작용이라는 최종 결과에 이른다.

정신은 육체의 반응을 직접 변화시킬 수는 없고, 송과선의 진동을 두려움과 도망을 유발하는 상태에서 용기와 싸움을 유발하는 상태로 변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데카르트는 인간이 특수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경험이라는 조건에 좌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조건반사).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어린시절 사팔뜨기 소꿉동무를 사랑해 한동안 사팔뜨기 여인만 보면 마음이 끌린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어릴 적 일을 기억해내고는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제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통찰은 그가 자유의지와 정신의 육체조절 능력을 옹호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그와 같은 논변에도 불구하고, 1649년 〈정념론 Les Passions de l'âme〉에서는 인간의 육체작용 대부분이 외부의 물질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의 도덕관은 반그리스도교적이었다.

데카르트는 칼뱅주의 및 예수회와는 대조적으로 신의 은총구원을 받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진리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데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덕이 쌓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진리발견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데카르트의 낙관적 견해는, 구원을 오로지 신이 내리는 은총의 선물로만 여긴 예수회 운명예정설 변호론자이자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비관적 견해와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데카르트는 유덕한 행동이 은총보다는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한 12세기 아랍 철학자 아베로에스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난받았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인간의 본성에 깃들어 있는 신의 상징이어서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칭찬이나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오직 타인의 선(善)을 위해 호의를 갖고 행동할 때만 선하며 이러한 관용이 최고의 덕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념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에피쿠로스주의자였으며, 선을 이해하는 것이 곧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점에서 극단적인 도덕적 낙관주의자였다.

그가 보기에 정념은 자발적인 의지이며,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은 그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인간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자신의 정념을 통제해야 한다고 촉구한 점에서 스토아주의자이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정치철학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지만, 사물들의 질서에 순종하라는 세네카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정을 생애 최고의 거룩한 기쁨으로 여겼기 때문에, 친구를 속이도록 권하는 마키아벨리의 충고는 거부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국가·가족 등 사회집단의 일원일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 자신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성장기

데카르트의 성장기
데카르트의 성장기

아버지 조아섕은 렌 지방의 브르타뉴 의회 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1세 때 죽었다.

그의 가족은 로마 가톨릭교를 믿었지만 가족의 연고지인 푸아투 지방은 위그노교의 본거지였다. 1606년 라 플레슈 예수회 대학에 입학하여, 훗날 프로테스탄트교를 탄핵한 자로 알려진 교부(敎父)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다. 1614년 푸아티에에 가서 1616년 법학 학위를 땄다. 당시 푸아티에서는 위그노교도들이 루이 13세에게 격렬히 반항하고 있었다. 1618년 네덜란드 브레다로 가서 프로테스탄트 통치자인 오라녜 공(公) 마우리츠의 평화시(時) 군대에서 15개월 동안 수학과 군사건축학을 배웠다.

여기서 의사 이사크 베크만의 격려로 수학을 공부하고 〈음악에 관한 소고 Musicae Compendium〉(1618 저술, 사후 출판)를 썼다.

1619~28년 북·서 유럽을 여행했다. 보헤미아에 머물렀던 1619년 장차 인간의 권능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자 및 철학자가 되려는 포부를 지니게 되었다. 1620년경에 이미 모든 과학에 적용할 수 있는 연역적 추론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또 그는 자연에 대한 신지학적(神智學的) 지식도 검토했으며, 마술사 레이몽 륄과 연금술사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추종자들에게 실망했지만 독일의 수학자이자 장미십자회원인 요한 파울하버의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1620년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로마 가톨릭 군대에 몸담았다가 1662년 파리로 건너갔다. 이때 장 루이 게 드 발자크, 테오필 드 비오, 클로드 미도르주, 교부 마랭 메르센 등의 친구를 사귀었다.

특히 메르센은 일생 동안 수백명의 학자·저술가·수학자·과학자 등에게 서신을 보내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해준 박식한 사람으로, 데카르트가 더욱 광대한 지적 세계와 접촉하도록 만든 주요인물이었다. 데카르트는 저서를 출판하기 훨씬 전부터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데카르트는 1628년 과학에서는 확실성과 마찬가지로 개연성이 중요하다는 연금술사 샹두의 주장을 거부하고 확실성을 얻기 위한 자신의 방법을 이야기했다.

예수회 체제에 맞서 1611년 오라토리오회 교육체제를 기초하고 평신도로 비밀군사조직을 만들어 프로테스탄트교와 싸웠던 베륄 추기경은 이에 깊은 인상을 받고 데카르트를 초대했다. 평론가들의 추측에 따르면 베륄은 예수회의 토마스주의를 대체하기 위해 데카르트에게 아우구스티누스주의 형이상학을 집필하도록 권고했다.

베륄은 데카르트를 가톨릭에 귀의시키고자 애썼으나 결국 데카르트는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로 떠나 거처를 숨기면서 16년 동안 프랑스에 돌아오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교를 포함한 이교도에 대한 가톨릭교의 박해가 심했던 프랑스와 달리 네덜란드는 종교적 관용의 안식처였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루칠리오 바니니처럼 신의 기적을 자연적으로 설명한 죄목으로 화형을 당하거나(1619)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에 충성하는 군대에 징집될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독창적인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데카르트는 1629년 네덜란드 프라네커대학교에 가서도 여전히 로마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의 초안을 썼다.

1630년 라이덴대학교에 등록하여 의사 앙리 르네리를 제자로 맞아들였다. 1631년 덴마크를 방문했고 1633~34년 의사이자 연금술사 에티엔 드 빌브레시외와 함께 독일에 머물렀다. 의사 H. 레기우스가 1639년 위트레흐트대학교에서 데카르트의 견해를 가르치자 칼뱅주의 신학자 기스베르투스 뵈티우스와의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논쟁은 데카르트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데카르트는 1648년 〈뵈티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프로테스탄트교와 가톨릭교는 같은 신을 숭배하기 때문에 둘 다 신의 은총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관용과 인권을 호소했다. 그러나 논쟁이 심화되자 데카르트는 프랑스 대사 및 친구인 콘스탄테인 호이헨스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주요저서

데카르트는 1633년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에서 우주론과 물리학을 다룬 〈세계 Le Monde〉(사후 출판)를 출판하려 했으나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여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훗날 교회가 유죄판결을 철회하면 출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출판을 자제했다(코페르니쿠스 체계). 교회가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물리학이 언젠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대체할 것이라는 희망도 품었다.

1637년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éthode〉을 출판했다.

이 책은 라틴어로 쓰지 않은 최초의 근대철학서이다. 〈방법서설〉의 각 부를 이루고 있는 세 논문에서 데카르트는 과학적 진리를 찾기 위한 이성의 사용법을 예증했다. 〈광학〉에서는 굴절법칙을, 〈기상학〉에서는 무지개를 설명했으며, 〈기하학〉에서는 대수방정식으로 기하학적 도형을 표현하여 지금까지 풀 수 없었던 많은 문제를 푸는 방법인 해석기하학을 제시했다.

또 기지수(旣知數)를 a, b, c 등으로, 미지수를 x, y, z등으로, 평면체와 입방체를 포함한 기하학적 도형을 x2, x3 등과 같이 표현하는 관례를 도입하여 대수 개념을 전보다 훨씬 분명하게 했다. 〈방법서설〉과 〈정신지도 규칙 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1628 저술, 사후 출판)에서 데카르트는 추론의 4가지 규칙을 제시했다(문제 해결). 즉 첫째, 자명하지 않다면 그 어떤 것도 승인하지 말 것, 둘째, 문제를 가장 단순한 부분들로 세분할 것, 셋째,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가며 문제를 풀 것, 넷째, 추론을 다시 검토할 것 등이다.

이 규칙들은 수학적 추론절차를 직접 적용한 것으로, 데카르트는 각 문제의 핵심 개념과 한계는 분명하게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법서설〉에서는 또 진리를 찾기 위해 사용해야 할 도덕률을 잠정적으로(나중에 최종적으로) 제시했다. 즉 첫째, 지방 관습과 법률을 지킬 것, 둘째, 최선의 증거에 입각하여 결정을 내린 뒤 그 결정을 확실한 것으로 고수할 것, 셋째, 세계보다는 욕구를 변화시킬 것, 넷째, 언제나 진리를 추구할 것 등이다. 데카르트에게 모든 지식은 하나의 나무, 즉 형이상학이 뿌리, 물리학이 줄기, 의학·역학·도덕이 가지를 이루어 지식이라는 과일을 생산하는 나무와도 같았다.

1641년 데카르트는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을 라틴어로 출판했다.

책이 나오기 전에 메르센은 얀센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앙투안 아르노,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 에피쿠로스주의 원자론자 가생디 등에게 책을 보냈으며 그들의 비평을 모아 〈반론과 응답 Objectiones Septimae〉(1642)을 출판했다. 〈반론과 응답〉은 독단이 지배하던 시대에 철학과 과학에서 공동 토의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데카르트는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서 한 번이라도 자기를 속인 적이 있는 모든 형태의 지식을 일단 거짓으로 여기고 그것을 거부하는 태도, 곧 방법적 회의를 제의한다(지각). 첫째, 권위에 기초한 지식은 노련한 전문가들도 간혹 틀리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

둘째, 감각경험에서 얻은 지식은 때때로 착각을 낳으므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 셋째, 추론에 기초한 지식은 가령 덧셈과 같이 가끔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으므로 믿을 수 없다. 넷째, 또 어떤 지식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경험하도록 하여 사람을 속이는 악마나 꿈, 정신착란 등에서 오는 환상일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비록 속아서 사유하더라도 '내가 사유하는 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직관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코기토 에르고 숨). '코기토'는 하나의 특수한 사물 곧 자신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므로 논리적으로 자명한 진리이다.

그러나 '코기토'는 단지 사유하는 사람만의 존재를 확실한 것으로 정당화할 뿐이다. 만일 각자가 자기 자신이 존재함을 이미 확실하게 알고 있고 그밖의 모든 것을 불확실한 것으로 의심하는 데 그치고 만다면, 결국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사유뿐이라는 유아론(唯我論)에 빠지게 된다. 이 유아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데카르트는 '코기토'처럼 명석하고 판명한 모든 관념은 반드시 참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다면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의 하나인 '코기토'도 미심쩍은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명석하고 판명한 모든 관념은 반드시 참일 수밖에 없다.

명석하고 판명한 본유관념(本有觀念)에 기초하여 데카르트는 각자의 마음이 정신적 실체이고 육체가 물질적 실체라고 확신했다. 마음이나 영혼은 비연장적이어서 연장을 가진 육체처럼 부분들로 쪼개질 수 없는 까닭에 사멸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나아가 이 존재한다는 점도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완전자로서의 신에 대한 본유관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하여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함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완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이와 같은 존재론적 증명은 감각경험의 도움없이 본유관념에서 출발하는 추론에만 의거하여 사물에 관한 지식을 확립하는 데카르트의 합리론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데카르트는 신은 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을 속이지 않으며, 따라서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데카르트는 자신의 마음·신·세계 등이 존재하기 위한 형이상학 기초를 놓았다고 선언했다.

데카르트의 논과정을 반박하는 견해로 널리 알려진 것은 그의 추론이 순환적임을 지적한 아르노의 '데카르트의 순환'이다. 즉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신에 대한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믿어야 하고,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이 반드시 참임을 알기 위해서는 신이 존재하고 인간을 속이지 않음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리론자 데카르트는 마력(魔力)을 거부했지만, 정작 자신의 존재론적 증명이 사물을 관념과 사유로 결정할 수 있다는 미신에 의거한 언어 마술임을 깨닫지 못했다. 경험론자들은 이와 반대로 사물에 대한 기술(記述)은 사물이 존재함을 경험으로 알고 난 뒤에 이루어져야지 그 이전에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말년

네덜란드에서 16년을 보낸 뒤 데카르트는 1644, 1647, 1648년에 잠깐씩 프랑스에 돌아와 머물면서 〈철학의 원리〉·〈제일철학에 관한 성찰〉·〈반론과 응답〉의 프랑스어 번역을 감수했다. 1647년에는 가생디와 홉스를 만났으며, 기압 측정을 위해 퓌드돔 산에 기압계를 설치하는 실험을 파스칼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프랑스 재무장관 피에르 달리베르와 접촉하여 왕립대학에 기예 실습학교를 설립하는 계획에 참여했다. 1648년 마지막으로 파리에 머무는 동안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자 급히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의 에흐몬트로 돌아갔다.

1649년 데카르트는 클레르슬리에의 동생이자 스웨덴 주재 프랑스 대사 엑토르 피에르 샤뉘의 주선으로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궁정에 초대받았다. 데카르트는 매일 오전 5시에 크리스티나에게 철학을 강의했으며, 그녀의 명령으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5막 형식의 희극 1편과 〈평화의 탄생 La Naissance de la paix〉이라는 무도회용 시를 썼는데, 이 시는 30년전쟁의 종결을 가져온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에서 크리스티나가 한 역할을 칭송하고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글이었다. 이밖에도 스웨덴 학술원 설립 법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1650년 2월 1일 오전 5시 여왕에게 법안을 제출했을 때 데카르트는 감기에 걸렸다. 그 자신이 겨울이면 인간의 사고도 물처럼 언다고 말한 스웨덴에서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된 탓에 1650년 2월 11일 스톡홀름에서 숨을 거두었다. 데카르트가 죽은 뒤, 경건한 가톨릭교도였던 클레르슬리에가 유고를 입수하여 선별 간행함으로써 데카르트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작업을 개시했다. 이 윤색작업은 교부 아드리앵 바예가 1691년 방대한 데카르트 전기를 펴내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정말 그리스도교 교리를 지지하는 데 주된 관심을 쏟은 로마 가톨릭교 옹호론자였는지, 아니면 결정론적·기계론적·유물론적 물리학을 확립하면서도 경건한 자세로 자신을 보호한 무신론자였는지는 그가 살아 있을 때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클레르슬리에와 바예가 이용한 데카르트의 많은 원고들이 현재로선 유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도 대답하기 어렵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667년 데카르트의 유골이 파리 주느비에브뒤몽 성당에 안치되던 바로 그날에 그의 책들을 금서목록에 올렸다. 한편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교 목사들은 데카르트 생전에 줄곧 그를 예수회회원이자 교황예찬론자 즉 무신론자라고 불렀다. 1930경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주요관심이 형이상학적 종교에 있었다고 믿었으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그가 태생이나 정치면에서 프랑스인이자 왕정주의자였다는 점에서 가톨릭교도였다고 믿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사람이 신을 너무 생각하다 보면 분별력을 잃는다고 말했다. 가급적 숨기고자 애썼지만 자신의 유물론적 물리학과 생리학이 무신론의 싹을 내포하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무한한 우주를 쳐다보고 인간의 왜소함과 비참함을 느껴 전율에 휩싸인 파스칼과는 달리, 인간은 불쌍하고 죄 많은 존재라는 견해를 거부하고 오히려 우주를 이해하고 행복을 증진하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사물을 변화시키려고 신에 기도하는 일은 건방진 태도이며, 그보다 인간은 자기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